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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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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는 「대흑호 일석담」에서 "현실에서 도피한 자는 은사이며 굴복하는 자는 노예이며 격투하는 자는 전사이니, 우리는 이 삼자 중에서 전사의 길을 택하여야 한다"고 설파했다.

광주시민들은 반란군들에게서 도피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전사의 길을 택하고 싸웠다. 그것도 무기를 들고 싸웠다.

문제는 과거 같으면, 정치 군부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공수대원들의 가차없는 '화려한 작전'에 일반시민들이 기죽고 겁나서 숨어들어갔을지도 모르는데, 이때는 오히려 더 용감히 시민과 학생들이 손에 손잡고 어깨를 같이하여 싸웠다는데 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박정희 군부정권 아래서 당할 대로 당하고 소외될 대로 소외된 광주지역의 시민들이 이제 박정희의 계승자인 12ㆍ12쿠데타 군부정권체제에서만은 더 이상 당할 수 없고, 그들과 싸워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변혁의 의지가 5ㆍ18을 통해 활화산으로 터뜨려진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주석 18)
 
 거리에 나선 광주시민들
 거리에 나선 광주시민들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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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중에는 비록 군사훈련이나 총기를 다루는 법을 모르는 사람도 적잖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으나 의기는 충천했다. 한말 일본군과 싸우는 의병의 모습이었달까. 시민군이 처음으로 계엄군과 교전한 것은 21일 오후 충장로에서였다.

칼빈과 M1 소총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최초로 중심가에 나타난 것은 21일 오후 3시 15분경이다. 이들은 충장로 광주우체국 앞에서 도청방향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2천여 명의 시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도청앞의 11여단은 노획한 차량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도청 주변에 시민들이 얼씬도 못하도록 발포를 계속하고 있었다.

시민군의 대오가 출현하자 몸을 숨기고 있던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맞이했다. 비록 공수부대의 무기에 비해 보잘것없는 칼빈과 M1소총을 들었을 뿐이지만 시민군은 광주시민의 기개와 자신감을 드높였다. (주석 19)

 
 시민들과 대치중인 진압군
 시민들과 대치중인 진압군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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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의 무차별적인 살상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자위권 발동이었다. 시민군이 무장하고 계엄군과 싸운다는 소문이 돌면서 외곽에 있던 시민들이 몰려오고 각종 무기도 시민군에 속속 전달되었다.

드디어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시간 이후 광주 외곽지역으로부터 계속해서 무기가  반입되어 시민군의 수는 늘어났다. 시민군은 도청을 둘러싸고 금남로, 노동청, 광주천변 도로, 충장로, 전남의대 방면 등에서 공수부대를 압박했다.

오후 4시 15분경 전남의대 12층 옥상에는 시민군이 LMG 2정을 도청방향으로 설치하여 위용을 과시했다. 그러나 시민군은 LMG를 발사하지는 않았다. (주석 20)


오후 4시경 시민군에 밀린 공수부대가 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시민들이 처음으로 계엄군을 물리친 것이다. 환호와 승리의  함성이 진동하고, 시민들의 수는 더욱 많아졌다. 상대가 퇴각하자 시민들은 조직정비와 미성년자들의 총기 회수 등을 논의하고자 공주공원으로 집결하였다.

이곳에서 예비군 장교 출신들이 총기 사용법을 시범하고 미성년자들의 무기를 회수하여 성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사실상 시민군은 이때에 조직된 셈이다.
  
 5.18민중항쟁 사진전 작품 중 하나. '양복 입은 교수가 눈에 뛴다'는 사진 설명이 붙어 있다.
 5.18민중항쟁 사진전 작품 중 하나. "양복 입은 교수가 눈에 뛴다"는 사진 설명이 붙어 있다.
ⓒ 5.18 기념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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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전세가 바뀌고 있을 즈음 신군부 반란세력은 20사단 60연대를 광주에 투입하고 3개 여단의 작전 지휘권을 31사단으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로 넘기는 등 더 강력한 진압 조처를 준비하고 있었다.

21일 오후 2시 53분 소준열 행정학교장이 돌연 광주로 향한다. 이어 오후 3시 35분에는 시위의 전국 확산방지와 도로망 차단 등을 골자로 한 참모총장 지시가 각 부대에 하달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부분은 지휘체계의 일원화, 참모총장 스스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명령계통에 이상이 있으면 이원화된 지휘체계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음을 처음으로 인정한다.

정부와 계엄사는 각각 이날 오후 4시 윤흥정 사령관과 정웅 사단장을 지휘계통에서 제외키로 공식 결정한다. 윤사령관은 이날 단행된 개각에서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한다.

개각 발표와 함께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 통제권이 31사단에서 전교사 직접통제로 작전통제권이 전환된다. 비록 형식적이긴 했지만 그나마 유지했던 정웅 31사단장의 통제권이 상실되는 순간이다. (정사단장은 "이미 20일 오후부터 공수여단장들이 자신의 지휘를 받지 않은 채 전교사의 명령을 직접 대대장들에게 전달했으며 대대장들도 사소한 사실만 보고 할 뿐 중요사항에 대해서는 보고하지 않는 등 지휘권이 박탈된 상태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석 21)


주석
18> 서중석, 「광주학살ㆍ광주항쟁은 민족사의 분수령이었다」, 『역사비평』, 1989년 여름호, 38~39쪽.
19> 정상용 외, 앞의 책, 238쪽.
20> 김영택,『10일간의 취재수첩』, 111쪽, 사계절, 1988.
21> 『정사 5ㆍ18』, 31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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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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