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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 5월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하고 있는 광주 시민들. 이같은 궐기대회는 목포 등 전남 지역으로 급속히 번져갔다.
 80년 5월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하고 있는 광주 시민들. 이같은 궐기대회는 목포 등 전남 지역으로 급속히 번져갔다.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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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민들은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원하지 않았다. 하여 정부와 계엄당국에서 시위대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다.

10시 50분 경에 장형태 전남지사가 헬기를 타고 금남로 상공에 나타나 상공을 돌면서 "공수부대를 철수시킬테니 광주시민들은 질서를 지켜달라"고 하며 시민들을 무마하려 했다.

도청 앞에는 10만이 넘은 시민들이 도지사의 발언을 믿고 기다렸다. 그러나 12시가 되어가도 시민들을 포위한 공수부대가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은 동요했다. 자신들의 힘으로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데 뜻을 모았다.

오후 1시가 조금 못되어 시위대가 장악한 장갑차 한 대가 갑자기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향해 돌진했다. 공수부대의 저지선이 무너지자 부대원들은 도청 안으로 들어가는 등 피신하기에 바빴다. 그때 공수부대의 장갑차가 후진하는 과정에서 군인 1명의 사망자와 1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저지선이 붕괴되자 시위대의 트럭과 버스들이 장갑차의 뒤를 따라 도청앞 분수대를 돌아나오거나 도청쪽으로 전진했다.

12시 58분 광성여객 버스가 접근했을 때 분수대 근처에 있던 일부병력이 사격을 가했다. 이 사격으로 운전사는 즉사하고 버스는 수협 전남도지부 건물에 처박혔다. 그리고 이 직후인 오후 1시 정각에 느닷없이 애국가가 방송되면서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공수대원들이 엎드려쏴 자세로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전일빌딩, 상무관, 도청, 수협 전남도지부 건물의 옥상에서는 저격병들이 시위대 열 선두의 주동자들을 겨냥하여 사격을 실시했다.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격은 메가폰으로 사격중지 명령이 내릴 때까지 약 10분간 계속되었다. (주석 11)

 
 광주 전일빌딩에는 5.18 당시 헬기사격의 탄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국과수에서 8개월에 걸친 조사결과, 헬기에 의한 사격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광주 전일빌딩에는 5.18 당시 헬기사격의 탄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국과수에서 8개월에 걸친 조사결과, 헬기에 의한 사격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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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이었다. 하필이면 애국가를 신호로 시민에 대한 일제사격, 공수대원들이 엎드려쏴 자세로 시민들에게 집단사격, 광기이고 광란이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인이라도 자기 국민을 향해 일제사격, 집단사격이라니, 천인공노할 만행이 대낮에 광주에서 벌어졌다.

순식간에 금남로는 피와 통곡의 바다가 되었다. 공수부대는 도청과 주변의 건물에 숨어 보이는 사람들마다 저격하였다. 1시 30분 경에는 한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윗통을 벗고 태극기를 높이 휘날리며 도청을 향해 '광주 만세!'를 외치며 달려들었다.

모든 시민들이 긴장되어 그를 응시하는 가운에 한 발의 총소리와 함께 피가 튀며 청년의 목이 꺾어졌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시민들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에 눈물로 온 몸을 떨었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전쟁!' 이었다. 시민들은 곧 총을 얻기 위해 시내, 시외의 무기고로 향했다. (주석 12)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및 분수대 광장과 전일빌딩(왼쪽 큰 건물). 전일빌딩은 계엄군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5.18항쟁 역사의 현장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및 분수대 광장과 전일빌딩(왼쪽 큰 건물). 전일빌딩은 계엄군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5.18항쟁 역사의 현장이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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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고 시민군을 편성했다. '시민군'이라면 라틴 아메리카 등에서 보이는 민병대 수준이 연상되지만, 그야말로 급조된 예비군 수준이었다. 연령도 무기도 제각각이었다.

그들의 직업은 그곳에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은 노동자, 목공, 공사장 인부 등 직접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거나 구두닦이, 넝마주이, 술집 웨이터, 부랑아, 일용품팔이 등등이었으며 또한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들도 많았고 가끔은 예비군복을 입은 장년층들도 보였다. 삼사십 대의 중년층 참가자는 자기 가족이나 동생, 친척 또는 친구들의 죽음에 분연히 일어나 총을 든 사람들이 많았다.

지휘자는 가능한 한 어린이들에게서는 총을 회수해서 예비군들이 소지할 것을 지시했지만, 울면서 총을 안주겠다고 버티는 아이도 있었다. 자기 형이 죽었다고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것이었다. (주석 13)

 
 1980년 5월24일 당시 금남로 상공에 헬기가 날아다니고 있다.<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24일 당시 금남로 상공에 헬기가 날아다니고 있다.<5·18기념재단 제공>
ⓒ 광주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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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시민군의 구성을 두고 뒷날 전두환 5공 나팔수들과 수구정치인ㆍ언론인들은 시위군중의 대부분이 깡패ㆍ넝마주이ㆍ무직자ㆍ공원 등 사회최하층이라고 비하하게 되었다. 일반 시민들의 참여는 애써 외면한 것이다.


주석
11> 정상용, 앞의 책, 219쪽.
12> 최정운, 앞의 책, 150쪽.
13>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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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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