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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해 가족을 잃거나 직접 피해를 당한 103명의 청원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식 답변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지난 4월 4일 이들 청원인을 대표해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두 명의 응우옌티탄(퐁니퐁넛 마을과 하미 마을)은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에게 진상조사와 피해회복조치 등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국방부로 이관된 청원서는 접수 5개월 만에 무책임한 답변으로 돌아왔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 자료를 확인하지 못했으며, 한-베 정부 간 공동조사 여건이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는 요지였다.

피해자들이 호소하는 사건이 일어난 걸로 치면 50여 년, 전쟁이 끝난 지는 44년, 한국군 민간인학살 문제가 제기된 때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 한국 정부가 내 놓은 첫 번째 공식 답변이었다.

간절한 호소, 차가운 응답
 
2019년 4월 4일 103명의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는 진상조사, 공식사과, 피해회복 조치 등을 요구하며 한국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 청원서 제출 기자회견 2019년 4월 4일 103명의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는 진상조사, 공식사과, 피해회복 조치 등을 요구하며 한국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 한베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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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
"나는 만족할 수가 없어."


그날 청원인 대표로 참석했던 두 명의 응우옌티탄은 한국 정부의 답변에 대해 이런 반응을 내놓았다.

"국방부 답변을 보니 그들 자료에 한국군 학살 관련 증거가 없다고 하는데, 미국 자료를 찾아보면 분명 관련 내용이 있을 텐데 말이야, 왜 그렇게 답변을 하는 거지? 그래도 조금이나마 희망을 갖고 한국의 답변을 기다렸는데, 나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 - 청원인 퐁니퐁넛마을 응우옌티탄

"우리 두 사람 포함해서 103명 모두 답변서를 받은 거 맞지? 한국의 변호사분들이랑 많은 분들이 이번 일에 최선을 다하셨을 텐데, 나는 답변서를 보고 실망했고 도무지 만족할 수가 없어. 한국에 학살 관련 자료가 없다고? 우리가 증언한 내용을 확인은 한 건지, 미국에 있는 자료는 찾아본 건지... 아무튼 나는 만족할 수가 없어." - 청원인 하미마을 응우옌티탄


103명의 베트남 청원인이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총 218쪽에 달하는 청원서는 한국 정부의 응답을 간절히 원하는 염원이 담겨있었다. 그들은 청원서를 통해 무엇보다 한국 정부에게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생존자들은 사과를 원한다'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한국 정부가 '베트남이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이 문제를 회피해 온 것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현 정부가 주창하듯 피해자 중심주의에 근거해 이 문제를 해결하길 기대하며 스스로 '사과를 원한다'는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해 발생한 전쟁범죄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신속히 나서주길 주장하며, 청원서에 세 가지 요구를 담았다.

첫 번째는 진상조사 및 사실인정, 두 번째는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한 공식 사과와 선언, 세 번째는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였다. 피해자이며, 목격자이자 생존자인 청원인들은 그들의 간절한 호소에 한국 정부가 응답하길 기대하며 그렇게 용기를 냈다.
 
1968년 2월 22일 남동생 응우옌반판(11세), 여동생 응우옌티씨(5세)가 한국군에 의해 죽었다. 어머니 팜티호아(40세)는 수류탄에 두 발목을 잃었고, 큰어머니, 사촌동생 등도 한국군에 의해 희생되었다.
▲ 청원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 하미 마을 학살 유가족 응우옌럽 1968년 2월 22일 남동생 응우옌반판(11세), 여동생 응우옌티씨(5세)가 한국군에 의해 죽었다. 어머니 팜티호아(40세)는 수류탄에 두 발목을 잃었고, 큰어머니, 사촌동생 등도 한국군에 의해 희생되었다.
ⓒ 한베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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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1월 9일 어머니 럼티녓(54세), 남동생 레떤웃(13세), 올케 응우옌티땀(23세)를 잃었다. 한국군은 내 가족을 학살하고 집을 불태웠으며, 돼지 한 마리 남겨놓지 않았다. 나는 직접 목격한 끔찍한 광경 때문에 며칠 간 밥도 물도 넘기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 청원서에 서명하는 프억빈 마을 학살 유가족 레티뚝  1966년 11월 9일 어머니 럼티녓(54세), 남동생 레떤웃(13세), 올케 응우옌티땀(23세)를 잃었다. 한국군은 내 가족을 학살하고 집을 불태웠으며, 돼지 한 마리 남겨놓지 않았다. 나는 직접 목격한 끔찍한 광경 때문에 며칠 간 밥도 물도 넘기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 한베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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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의 진상조사, 사실인정,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 등을 요구하며 피켓을 들었다.
▲ 반꾸엇 마을 학살 피해자 쯔엉티쑤엔과 가족들 한국정부의 진상조사, 사실인정,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 등을 요구하며 피켓을 들었다.
ⓒ 한베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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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인들의 힘겹고 절절한 호소에 국방부는 지난 9월 9일, 공문과 붙임 글, 단 두 장으로 간략히 회신했다. 예의 정중한 문체였지만, 정작 담긴 내용은 없었다. "한국군 전투사료 등에서 주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국-베트남정부 간 공동조사 여건이 조성되지 못해 역사적 사실 확인이 어렵다"며 어쨌든 최선을 다하겠다는 형식적이고 짤막한 인사로 마무리 지었다.

확인을 해 보았다. 과연 국방부가 어떤 자료를 검토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결론을 내린 것일까. 청원을 회신한 국방부의 한 행정사무관은 청원에 대한 검토는 국방부 내 베트남 담당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이 진행했으며, 어떤 자료에 대한 검토를 했는지 여부는 본인은 알 수 없어 확인 후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며칠 뒤 담당 사무관에게 확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문: 청원 회신에 따르면 '국방부에서 보유하고 있는 한국군 전투사료 등'을 확인했다고 되어있는데 정확히 어떤 자료에 대한 확인을 한 것인가.
답: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작성한 자료가 주요 검토 대상이었다. 대표적으로 전투의 상세기록 보고서인 전투상보와 전쟁 이후 실시되었던 파병 장병 증언, 파월 한국군 전사 등을 검토했다.

문: 청원인의 피해사실과 요구사항에 대한 검토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과거 국방부에 제출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자료 외에도 2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민간인학살 의혹에 대한 여러 자료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것인가.
답: 청원서에 작성된 자료를 기반으로 기본적으로 검토하였다. 과거 자료 등은 확인할 수 없고, 2000년 당시 제주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관련 통계 내용은 이미 이전에 검토한 바가 있는 자료이다.


문: 전투기록에 '민간인 학살'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한국군 작전과 학살과의 관련성을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닌가. 68년 퐁니퐁넛 사건의 경우는 한국군 괴룡 1호 작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답: 한국군 자료와 대조를 해보았으나 청원에 등장하는 16개 사건의 해당 시기 장소와 관련한 내용은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문: 68년 퐁니퐁넛 사건의 경우 미군 조사 자료가 존재하고, 사진도 남아있다. 또 당시 안기부가 조사한 기록도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현재 민변이 이에 대한 정보공개청구와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엄연히 이런 근거가 존재하는데 확인을 한 것인가.
답: 국방부는 한국군이 작성한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청와대에서 청원을 이관을 할 때에 국방부에 전권을 주면서 이관을 하는 게 아니다. 때문에 국방부 권한 내에서만 검토할 수 있다. 국정원 자료 등 권한 밖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있는 게 없다. 접근 권한 자체가 없다.
 

문: 청원인들은 한국정부에 청원을 한 것이지 국방부에 청원을 한 것이 아니다. 국방부 조사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 국방부 청원 회신에 대해 시민사회단체가 지난 9월 26일 기자회견을 한 것을 알고 있는가.
답: 알고 있다.

문: 청원회신에 보면 '이 문제의 역사적 사실 확인을 위해서는 한국 측의 단독조사가 아닌 베트남 당국과의 공동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나, 한국-베트남정부 간 공동조사 여건이 아직까지 조성되지 못해' 결국 조사가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시민사회단체가 기자회견에서 제시한 한국만의 단독 조사 기구를 만들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검토한 바가 있는가.
답: 검토하고 있는 내용이 없다. 국방부가 보유하고 있는 자료는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고, 일부 국가기록원에 이관이 되어 있는 자료도 있어 향후 자료들에 대해서 확인하고 싶다면 홈페이지나 공식적인 기구를 통해 개별적으로 검토하길 바란다.


문: 20년 동안 의혹으로만 제기되어 왔던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에 대해 피해자가 직접 한국 정부에 청원을 한 것이다. 이것은 그 무게감이 다르다. 이번 답변이 한국 정부의 최초의 답변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국방부의 검토가 미흡하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답: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씀드릴 바가 없다. 국방부가 검토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검토했다.


마지막으로 해당 연구원의 검토보고서를 열람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족을 잃고 피해자로 고통 속에 살아온 청원인들의 절절한 호소를 한국 정부는 이렇게 외면했다.

한국 정부는 정말 '최선'을 다했나
  
지난 9월 26일, 60여개 시민사회단체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 103명의 청원에 대한 한국정부의 무성의한 답변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 103명의 청원에 대한 한국정부의 공식입장을 규탄하는 기자회견 지난 9월 26일, 60여개 시민사회단체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 103명의 청원에 대한 한국정부의 무성의한 답변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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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6일, 한국과 베트남 역사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촉구하는 60개 시민사회단체는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피해자 103명의 청원에 대한 한국 정부의 무성의한 답변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실제 확인한 바로도 국방부의 검토는 아주 부족하고, 무성의했다.

기자회견에서 시민사회단체는 두 가지를 한국 정부에 제안했다. 하나는 최소한 청원인 103명이 진술한 사건에 대해서라도 민간전문가가 참여하여 국방부 및 국가정보원이 보관하고 있는 관련 사료를 검토하고 관련 참전군인의 진술을 청취하는 단위를 정부 공식 기구로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사결과 한국군의 위법 행위가 존재했다고 볼 가능성이 확인된다면 고령인 피해자의 나이와 오랜 시간 문제해결을 방치한 한국 정부의 책임을 고려하여 피해자에게 공식 사과하고, 해당 지역에 위령사업 등 피해회복 조치를 실시하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조치는 103명의 청원인에 대해 한국 정부가 보여야할 가장 기본적이고 책임 있는 답변이다. 그리고 청원에 포함되지 못한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서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사건에 관해 한국 정부 단독으로나마 포괄적이고 진정성 있는 1차적 진상조사를 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석미화씨는 한베 평화재단 사무처장입니다.


태그:#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청원서, #책임있는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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