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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초기, 지독한 입덧을 하며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과정 가운데 서러운 날들이 많고 많았으나 A씨(33)가 정말로 복받쳐서 엉엉 운 날은 그날뿐이었다.

그날도 A씨는 온종일 메슥거리는 속을 달래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터덜터덜 간신히 걸음을 옮겨 퇴근하는데 문득 슈퍼 가판대의 귤이 너무도 당기는 것이다. 워낙 좋아했지만 입덧이 시작한 뒤로는 제대로 입맛을 돋우는 음식물이 없었던지라 고민하지 않고 한 팩을 샀다. '임신을 하면 신 게 끌린다더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임산부인가'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며.

텅 빈 속이지만 한 개를 까서 입에 넣었다. 단 맛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산미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6월의 하우스 귤은 영 맛이 없었다. 나머지 귤은 가방에 잘 넣고 지하철을 탔다. 때로는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자리에 앉기도 하며 열심히 버텼다.

그러나 환승을 하고 갈아탄 지하철에서는 핑크색 임산부석 앞에 꼿꼿이 서 있게 되었다. 중년의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만삭이 아니라 배는 많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에 핑크색 임산부 배지가 달랑달랑 아주머니 눈앞에서 흔들렸지만, 그녀는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실은 출퇴근 길에 종종 겪는 일이라 A씨는 서운함도 그다지 느끼지 못한 채 몇 정거장을 더 서서 갔다.
 
 입덧의 고충을 전혀 헤아려주지 않는 태도에 A씨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입덧의 고충을 전혀 헤아려주지 않는 태도에 A씨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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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아주머니의 옆자리가 비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 10분 정도지만 앉아서 갈 수 있게 된 A씨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핑크 자리가 아닌들 어떠랴, 자리는 다 같은 자리인 게다. 아마 아주머니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지하철의 진동에 몸을 맡긴 채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지하철 문이 수차례 열렸다 닫혔고, 어느덧 다음번 열리는 문에 내려야 한다. 주섬주섬 몸과 맘을 추스르는 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저 깊은 단전에서부터 올라왔다.

"웁!"

순식간이었다. 망할 입덧이 갑자기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귤즙 같은 신물이 목구멍으로 왈칵왈칵 올라왔다. 넘어온 신물을 입안에서 모아 가까스로 다시 삼키며 A씨는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괜찮아, 조금만 참자. 1분만 아니 30초만 다음에 내리면 돼. 토해도 내려서 하자. 할 수 있다, 제발, 제발!'

그러나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은 가련한 임산부를 봐주지 않았다. 뒤늦게 참을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한 A씨는 가방에 늘 구비하고 다니는 검정 비닐봉지를 꺼내 구토를 해버렸다.

'우엑!'

고요하고 빠르고 깔끔하게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A씨의 위 속에 들어 있던 거라곤 한 시간 전에 먹은 작은 귤 한 알이 전부였다. 두어 번의 토악질에 뭉개지지도 않은 예쁜 귤 한 알이 검은 봉지 안으로 쏙 들어갔고, A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얼른 봉지 입구를 봉인했다. 원래 토를 하고 나면 압력 때문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곤 했는데, 이날은 워낙 규모가 작았던지라 평온하기까지 했다. A씨의 눈에 눈물이 맺힌 건 귤 때문이 아니었다. A씨 옆 핑크 자리에 앉아 계시던 아주머니 때문이었지.

"아유, 더럽게 뭐하는 거야? 빨리 내리지 않고?"

아주머니는 A씨에게서 최대한 몸을 멀리 떨어뜨린 자세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이목이 A씨에게로 집중되었다. 그 순간 지하철 문이 열렸고, 안 그래도 내릴 때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서던 A씨는 마치 아주머니로부터 쫓겨나기라도 하듯 지하철에서 내렸다.

내린 뒤에는 개찰구로 나가지 않고 잠시 쓰레기통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 검은 봉지를 손에 든 채로 또다시 구토가 몰려올 것이 두려워서. 잠시 후 그제야 실감이 났는지 자신도 모르게 눈물방울이 투두둑 봉지 위로 떨어졌다. 이렇게 비참하고 초라할 수가 없었다.

자리를 양보 받지 못한 서러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주머니도 아마 겪었을 임신과 출산, 그 과정에 있는 입덧의 고충을 전혀 헤아려주지 않는 태도에 A씨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사실 딸뻘이나 되는 낯선 이에게 굳이 괜찮냐고 토닥여줄 필요는 없다. 휴지나 물티슈를 건네줄 필요는 더더욱 없다. 다만 더럽다고 당장 내리라고  쫓아냈어야만 했을까. 그런 마음들이 A씨를 괴롭게 했다.

심상치 않은 A씨의 카톡을 본 그녀의 남편이 야근을 미루고 곧장 달려와줬다. 집에서 남편이 한참을 안아주고 달래주어도 A씨의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서럽고 더럽고 외로웠다.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주머니 탓을 하자니 그녀는 이미 너무 멀리 가버렸기에. A씨는 그저 가방에 들어 있던 나머지 귤들을 꺼내 내던져버렸고  나중에 그 귤에 곰팡이가 피어 쓰레기통에 들어갈 때까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귤 한 알 때문에, 그깟 귤 한 알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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