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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나라냐?" 피켓을 들고 정권을 바꾼 게 엊그제 같은데, 이번에는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 아니, 이미 두 동강 난 나라인데 세 동강 난 것인가?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나는 서초동에도 광화문에도 속해 있지 않은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을 느꼈기 때문이다.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상류층의 특권을 무작정 덮어주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데.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말 못하고 있으니 회색분자가 된 느낌. 자책감이 스치고 마음 한 켠이 답답한 와중에 반가운 캠페인이 있었으니, 녹색당의 '서초동과 광화문 사이'에서 '나는 나의 깃발을 들겠습니다' 연재 기사였다. 안도했다. 나같은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해주어서 고마웠다.

 10월 4일, 나는 영등포구에 있었다. 전시 오프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제주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예술인들이 '제주4.3'을 중심으로 팀을 만들고, 반 년 동안의 활동 내용을 다듬어 전시를 개최했다. 쇼앤텔에서 진행 중인 '제0세계' 프로젝트 결과공유전시 <동백꽃 피다>가 바로 그것이다.
 
<동백꽃 피다> 포스터
 <동백꽃 피다> 포스터
ⓒ 장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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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는 제주4.3 71주년이다. 하지만 반도의 남쪽은 71년 동안 여전하다. 낮과 밤, 오른쪽과 왼쪽, 두 개의 세상만 존재하는 듯 보인다. 사이의 사람들은, 기록되지 않는 사람들은 역사적 의미가 없는 걸까. 서초동도 광화문도 아닌 곳에서 조용하게 쌓아 올린, 작은 바람에도 허탈하게 흩날려버릴 꽃잎들을 보기 위해 '사이'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일상에서 지하철을 타지 않는 터라(도시를 벗어나 살고 있다) 오랜만에 마주한 퇴근시간 9호선은 정말 힘들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사전 공지되었던 오프닝 시간 7시가 지나자 마음이 조급했다. 행여나 어떤 장면과 말들을 놓칠까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했을 때의 안도감. 오프닝에 맞춰진 작가와의 대화 라든지, 모두가 기획자의 말을 경청하는 그런 광경은 없었다. 네 명의 작가들은 관객에게 둘러 쌓여 있었지만, 익히 보아왔던 하나의 큰 원이 아닌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모이고 흩어지는 작고 일시적인 원이었다. 누구 하나 같은 시간에 몰려 오지 않았으므로, 작가와의 대화와 기획자의 말은 늦은 9시까지 지속되었다. 

관객들은 전시를 보고 전시 공간 외부에 준비된 작은 다과회에 참석해서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대화를 나눴다. 아, 오프닝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보통 전시 개막 행사는 잘 기억나지 않는 말 잔치를 하고,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급히 식사(?) 장소로 이동하기 때문에 관람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동백꽃 피다>의 오프닝은 신선했다. 작품을 충분히 관람할 수 있었고, 작가들과 깊게 대화 나눴으며, 전시 공간에서 오랜 시간 머물 수 있었다. 신선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인사를 나누는 관계자들이 모두 20, 30대의 젊은 층이었다는 것. 기성 제도를 경험하며 불편했던 것들을 개선하고자 했거나 혹은 주어진 환경을 섬세하게 고려하여 기획된 아주 작은 시도가 천천히 조용하게 마음에 닿았다.

'제0세계'를 기획하고 현재 구성원들에게 참여를 제안한 박선영 작가는 예술공간 이아(아래 이아) 레지던시(제주)에 입주했을 때 4.3을 처음 접했다. 그 때가 2017년이니, 벌써 3년 전이다. 이후 작년 '4.3 70주년 해원상생큰굿' 현장에서 고승욱 박정근 작가와 함께 4.3유족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옛날사진관>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유족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눴던 일주일 간의 경험이 감정의 변화를 일으켰고, 초상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4.3유족 초상화 시리즈 작업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26회 4.3미술제 <경야>(2019, 제주), <섬의 얼굴>(2019, 서울), <100 마이너스 30>(2018, 제주), <섬의 얼굴>(2019, 제주)에서 다양한 변주로 전시되었다. 스케치도 없이 일필휘지로 그려 넣은 유족들의 얼굴에는 생명력이 가득하다. 잘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다양한 원색들이 서로 어울려 감탄을 자아낸다. 특히 이번 전시에 처음 발표된 "순출삼촌" 드로잉 영상은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는 매력이 있다.

평소 '초상화'와 '기억'을 매개로 작업을 해왔던 김준한 작가는 겹겹이 배접된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 이후 그 '겹'들을 분리해서 전시 중이다. 당연하게도 붓이 직접적으로 닿았던 층의 이미지는 선명하고, 아래 층으로 갈수록 희미해진다. 관객이 처음 마주하는 작품들은 가장 흐릿한 그림들인데, 처음엔 '추상화'라고 생각했다. 한 걸음씩 내딛을 수록 점점 선명한 이미지가 등장하고, 이내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참 탁월한 구성이다. 경험과 기억의 성격을 명쾌하고 직관적으로 알게 해준다. 아픈 역사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형광, 핑크색들로 4.3평화기념관의 '백비'를 그렸다.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다.
 
<동백꽃피다> 전시 현장
 <동백꽃피다> 전시 현장
ⓒ 박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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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세계의 특징 중 하나는 작가 뿐만 아니라 아키비스트와 디자이너가 함께한다는 점이다. 기획자 김유민은 제0세계 아키비스트 역할을 맡아 프로젝트의 과정을 기록했다. 김유민이 발간한 <모호한 담론>은 "우리는 왜 제주 4.3이 생소한가?" 질문으로 시작되는데,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서 그 답을 찾으려는 시도가 흥미롭다. 7차 교육과정 속에 제주4.3이 어떻게 언급되고 있는지 살펴본 것이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이지만, 제도권에서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았다. 교과서를 통해 역추적해 보는 우리 사회는 여전히 '빨갱이'와 '토벌대', '산 사람'과 '서북청년단'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

제0세계의 4인은 모두 87년생으로 '독재정권'과 '민주시민'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회를 변화시킨 역사적 사건들과 분명한 시간적 거리를 두고 있는 이들이 실험하는 것은, 바로 그 '사이'의 언어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표방하는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차원의 시각"은 양면만 존재하는 납작한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각도의 시선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입체적인 역사인 것이다. 4.3유적 답사와 토론, 역할극과 낭독 등 4.3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음에도 그 담론이 "모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장윤미 디자이너의 "극락왕생"이 그들의 합의점을 보여준다.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가 "아직은 어쩔 수 없이 그러"(전시 서문)한 결론이 아니라 87년생으로 구성된 제0세계를 잘 드러내는 결론이다. 죽음을 넘어선 4.3의 미래를 말 할 수 있고, 살아 남은 사람들의 생명력과 해원 상생의 정신을 주목할 수 있는 세대로 인해 이렇게, 동백꽃이 다시 핀다.

덧붙이는 글 | 제0세계 프로젝트 결과공유 전시 <동백꽃 피다>는 2019.10.1-22 쇼앤텔(서울 영등포구 양평로18길 8 B1)에서 개최된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제0세계 웹페이지에 접속하면 프로젝트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접할 수 있다. https://0sideworld.modoo.at


태그:#동백꽃피다, #제0세계, #서울청년예술단, #제주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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