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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전일빌딩에는 5.18 당시 헬기사격의 탄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국과수에서 8개월에 걸친 조사결과, 헬기에 의한 사격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광주 전일빌딩에는 5.18 당시 헬기사격의 탄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국과수에서 8개월에 걸친 조사결과, 헬기에 의한 사격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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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낫과 창

갑오농민에게 소중했던 것 그것은
한술의 밥이었던가 아니다
구차한 목숨이었던가 아니다
다 빼앗기고 양반과 부호들에게
더는 잃을 것이 없는 우리 농민에게 소중했던 것
그것은
돌이었다 낫이었다 창이었다.

고 김남주 시인의 <돌과 낫과 창>의 앞 부분이다.

5ㆍ18 이전 이른바 남민전사건으로 15년 실형선고를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광주민중항쟁의 소식을 들었다던 그는 당장 돌과 낫과 창을 들고 광주 금남로에 뛰어가고 싶었지만 옥문의 자물쇠는 너무 견고했다.

1894년 동학도와 농민들이 돌과 낫과 창을 들고 궐기했듯이, 그 후예들은 같은 정신으로 신군부 민주주의 찬탈자들과 맞서고자 일어섰다. 그들에게는 낫도 창도 없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가톨릭센터였지만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5.18 기록물들을 보존하고 전시하고 있는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가톨릭센터였지만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5.18 기록물들을 보존하고 전시하고 있는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 김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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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정문에서 가톨릭센터까지 걸어 이동하기는 약간 먼 거리다. 하지만 약동하는 20대, 계절은 바야흐로 꽃 피고 녹음짙은 5월, 거기에 불의와 대결하는 신념에 가득 찬 청춘들의 발걸음은 빨랐다.

약 3㎞(전남대 정문→광주역→공용버스터미널→가톨릭센터)를 순식간에 달려온 5백여 명의 학생들은 피로도 풀겸 11시경부터 가톨릭센터 앞 금남로 도로상에서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숫자는 5백여 명 선으로 불어나고 금남로 일대의 교통은 차단됐다. 연좌농성중인 학생들을 빙 둘러선 시민들의 숫자는 대략 2천 명 정도에 달하고 있었다.

연좌농성에 들어간 지 10분도 채 못 되어 대기 중이던 전투경찰들이 이들을 포위하고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대오는 급작스레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경찰에 의해 많은 숫자가 연행돼갔다. 경찰들의 태도 역시 엊그제의 횃불시위 당시와는 판이했다.

"곤봉세례와 군화발로 짓이기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면서 서서히 학생세력과 동화되는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시위에 직접 합세하는 시민은 별로 없었다. 아직도 동정적ㆍ심정적 동화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주석 1)


역사는 종종 우연한 일로 얽혀진다. 가톨릭센터 앞 금남로 도로상에서 연좌데모를 하는 학생들은 여느 집회 때처럼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날 경찰이 포악하게 대처했고 잔학스러운 태도로 나왔다.

'우연'이 아닌 '작위' 였다. 지휘부의 시나리오를 충직하게 시행한 것이다. 이날의 실황을 더 소개한다.
 
전투경찰의 완강한 저지를 받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충장로 황금동 불로동을 무리지어 행진하면서 구호를 외쳐댔다. 이날 시위대는 두 방향으로 나뉘었는데, 충장로 쪽으로 향한 시위대열은 황금동→수기동→광주공원→현대극장→한일은행4거리를 거치면서 5백여 명으로 숫자가 불어났고, 또다른 시위대열은 광주천에서 광주공고와 동구청을 돌면서 3백 명선으로 불어나 있었다.

양 시위대열은 곧 합류하여 공용버스터미널 로타리를 거쳐 시민회관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공용버스터미널을 지나면서 학생들은 각 지방(목포 여수 순천 해남) 주민들에게 광주의 시위사실을 알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영터미널 안쪽으로 들어간 학생들은 포위되고, 터미널은 삽시간에 최루가스에 휩싸였다. 헬리콥터가 계속 공중을 맴돌면서 학생들의 시위현황을 무전으로 연락, 학생들은 경찰저지망을 뚫기가 힘들었다. 계림극장 부근까지 피신한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많은 수가 붙잡혀가고 폭행에 가까운 곤욕을 치르었다. (주석 2)

 
"계엄군에게 얻어 맞았던 그곳" 광주트라우마센터가 9명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의 사진전을 10일 개최했다. 세계인권선언 65주년을 기념해 '오월 광주, 빛을 들이다'는 주제로 20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사진전엔 9명의 유공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유공자 황의수씨는 33년 전 자신이 계엄군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한 '전일빌딩 후문자리 계단'을 사진에 담았다. '80년 5월' 이후 황씨는 이곳을 찾지 않았다.
▲ "계엄군에게 얻어 맞았던 그곳" 광주트라우마센터가 9명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의 사진전을 10일 개최했다. 세계인권선언 65주년을 기념해 "오월 광주, 빛을 들이다"는 주제로 20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사진전엔 9명의 유공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유공자 황의수씨는 33년 전 자신이 계엄군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한 "전일빌딩 후문자리 계단"을 사진에 담았다. "80년 5월" 이후 황씨는 이곳을 찾지 않았다.
ⓒ 광주트라우마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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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부터 10일 간 광주에 동원된 군경은 1919년 3ㆍ1혁명에 참여한 조선민중을 학살한 일경ㆍ헌병부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는 상대가 이족(異族)이었지만, 광주에서는 동족 간이었다. 동족에 대해 그토록 야만적이기는 제주 4ㆍ3항쟁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학생 시위대가 터미널 로터리를 거쳐서 시민회관 쪽으로 쫓겨가는데 공중에서 헬리콥터가 시위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시위진압에 헬기까지 동원된 것은 과거에는 없던 일이다. 헬기에서 경찰 진압부대에 무전으로 시위대의 위치를 알리는 게 분명했다. 시위대 속에 섞여 있던 전남대생 임낙평(22세)은 낮게 날아온 헬기의 강한 프로펠러 바람 때문에 시위대가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버린다고 생각했다.

시위대가 소규모로 쪼개져서 비좁은 골목으로 숨어도 마치 손금 들여다보듯 곧바로 경찰이 나타나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헬기의 도움으로 경찰 병력의 이동도 신속해진 듯 보였다. 공중과 지상에서 서로 협동하여 시위를 진압하는 '공지(空地)협동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주석 3)


학생들의 시위에 헬리콥터가 동원되었다. '진압'에서 '전투'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이다.


주석
1> 윤재걸, 앞의 책, 92쪽.
2> 앞과 같음.
3> 황석영 외, 앞의 책, 6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5ㆍ18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민저항권의 발동이었다. 박정희의 무소불위한 18년 독재가 그의 암살로 막을 내리고 국민은 ‘서울의 봄’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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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