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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생은 행운과 불운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 지독히 운이 좋은 점 중의 하나가 밝은 눈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에 붙어 산 지가 20년이 훨씬 넘었고, 주변에 읽고 있는 책이 없었던 경우가 거의 없이 30년 이상을 보냈는데도 지난주 안과에서 측정한 내 시력은 양쪽 모두 1.0이다. 

언제부터인가 책을 읽을 때 초점이 흐려져서 활자를 읽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꼈지만 설마 내 눈에 이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연히 독서용 안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안경원에 가보기로 했다. 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은 아니고 뭔가 책을 읽는 데 도움을 주는 아이템 인줄로만 알았다. 마치 책갈피라든가 독서대처럼 사용자의 건강과는 상관없는 독서가 모두에게 도움을 주는 물건인 것으로 생각했다. 
 
삼일문고에 전시되어 있는 책들.
 삼일문고에 전시되어 있는 책들.
ⓒ 박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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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안경을 써본 적이 없는 사람은 묘하게 안경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심하게 말하면 저렴한 패션 아이템(인터넷 쇼핑몰을 보니 독서용 안경은 2만 원이 채 되지 않더라)이나 하나 추가하자고 재미 삼아 난생 처음 고객으로 안경원에 들렀다. 동네 안경원이라고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내 눈의 건강함을 자랑할 기회 따위는 주지 않았다. 대뜸 멋지게 생긴 기계에 나를 앉히고 들여다 보란다.

자신만만하게 안경사가 시키는 대로 보이는 대로 대답을 했다. 안경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서 나는 내 장래를 읽을 수 있었다. 그 표정은 신규 고객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흡족한 표정이었다. 근엄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안경사는 피고석에 앉아서 처분을 기다리는 나에게 판결을 내렸다.

"네, 노안이 오셨군요. 정도를 보아하니 대략 1년 정도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쩐지 현미경처럼 생긴 물건이 심상치 않더니 정확하게 내가 책을 읽을 때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현대 기술은 정말 놀랍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쪽 눈을 가리고 검사하는 시력과 노안은 별개의 사안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마치 죽을병이라도 선고받은 것처럼 안경사에게 '치료할 방법이 없느냐'고 몇 번이나 캐물었는데도 안경사는 특별한 치료법은 없고 갈수록 악화할 뿐이고 2년 뒤에 도수가 더 높은 렌즈로 교체해줘야 한다고 말했다(10년 넘게 동안 홀수 해에 휴대폰을 교체해왔으니 내 돋보기 렌즈 교체 주기는 헛갈리지 않겠다).

안경원의 진짜 고객이 된 나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안경테를 고르기 시작했다. 범죄자가 자기가 찰 수갑을 고를 수 있다면 이런 기분이겠다. 뜻밖에 고객을 확보한 안경사는 승리자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위로의 덕담을 던져주었다.

"그래도 먼 곳을 보는 시력은 정말 좋으시네요."

물론 그 와중에 나한테 잘 어울리는 테를 고르고 또 고르긴 했다. 어쨌든 들어갈 때는 한가한 쇼핑객이었는데 나올 때는 노안을 앓는 환자가 되었다. 다음날 가족들과 외출을 하는 길에 내 안경이 완성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심 지금껏 겪지 못한 신문물의 성능이 궁금했다. 마침 이웃 동네 구미의 핫 플레이스로 소문난 삼일 문고를 가볼 셈이었는데 좋은 우연이었다.

다만 딸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보채는 바람에 신문물의 성능 확인은 약간 뒤로 미뤄져야 했다. 식사하고 무려 3km의 산책 그리고 커피와 디저트를 먹고 나서야 구미 삼일문고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조심스럽게 내 안경을 닦고 또 닦았다. 안경 인생의 첫걸음 아닌가? 그 첫 경험을 내가 가고 싶었던 서점에서 하게 된다니 설렌 일이다. 
 
삼일문고의 시민 서가
 삼일문고의 시민 서가
ⓒ 박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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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자마자 빨리 안경을 끼고 책이 어떻게 보이나 허기에 찬 사자처럼 서점 안에 있는 아무 책이나 집어 들려고 덤비는데 내 눈에 금방 띈 것이 내 책 <독서 만담>이라니. 마법과도 같은 일이다. 자세히 보니 '시민의 서가'라고 해서 구미 시민 독자가 추천한 책을 전시하는 모양이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고 재미난 일이다.

삼일문고는 아늑하고 따뜻한 서점이다. 사실 개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와 보긴 했다. 그때는 그냥 서점이었는데 지금은 문화공간이 되어 있었다. 지방 소도시에서 참고서를 팔지 않는 단행본 서점은 그 자체로 존재가치가 대단하다.

더구나 삼일문고는 작은 동네 서점이 아니고 강연 공간까지 겸비한 중형 서점이다. 공단과 유흥으로 유명한 구미에 이런 서점이 생겼다는 자체로 놀랍고 뿌듯한 일인데 그간 삼일문고에서 진행한 행사와 초청 강연 저자의 면면을 보면 교보문고 광화문 지점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개인적으로 더욱 감탄한 것은 최근 내가 아껴가면서 읽은 <귀족의 시대 탐미의 발견>의 저자 이지은 선생의 강연이 삼일 문고에서 진행되었다는 것. 내가 알기로 이지은 선생은 현재 파리에서 일하고 있는 분이다. 누구의 안목인지 모르겠다. 저절로 리스펙트하게 된다. 단지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대형 출판사의 저자를 무작정 초청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는 인터넷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은 단지 책을 파는 장소만 다른 것으로 생각했는데 삼일문고를 보자니 새삼 오프라인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이라기보다는 복합문화공간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지하층의 강연장은 아예 책을 전시하지 않고 오로지 강연을 위한 공간으로 양보하고 있었고, 출판사의 요란한 광고 대신에 서점 자체에서 따로 책 소개를 하는 띠지를 선보인다. 고민을 적어내면 약(책)을 처방해준다. 
 
고민을 적어내면 약(책)을 처방해준다.
 고민을 적어내면 약(책)을 처방해준다.
ⓒ 박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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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방이자 놀이터가 바로 구미 삼일문고라는 생각을 한다. 내부 공간도 절묘하고 재미나게 배치하여 책장이 마치 숲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두막집 같은 느낌을 준다. 꼭 돋보기를 끼고 보지 않아도 삼일문고 책들은 또렷하게 보인다. 재미나고 따뜻한 곳이다. 구미 삼일문고.

태그:#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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