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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한 친구가 '백종원 게임'을 아느냐 물었다.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의 나를 면박하며 친구들은 백종원 게임을 시작했다. 내가 아는 한식의 종류가 적어서일까. 나는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다 집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취하고 말았다.

친구가 말한 백종원 게임은 구글로 한식 메뉴를 검색했을 때 백종원의 레시피가 1페이지에 뜨면 벌칙으로 술을 마시는 게임이다. 나는 이제야 알았는데 그날 친구들이 게임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니 국민 게임으로 등극했나 보다. 백종원의 손맛대로 길들여지는 대한민국이 나는 불편하다.

자고로 손맛은 엄마, 더 나아가 할머니의 손맛이 최고 아니던가. 어쩌다 SBS <골목식당>을 보면 백종원도 할머니의 손맛을 추켜세웠으니 말이다. 마침 할머니의 손맛을 제대로 알려주는 책이 나왔다. <할머니의 요리책>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90을 훌쩍 넘긴 최윤건 할머니다. 
 
 <할머니의 요리책> 표지
 <할머니의 요리책> 표지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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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건 할머니는 평생 자식을 위해 요리한 30가지 음식의 레시피를 이 책에 삐뚤빼뚤하지만 정성스럽게 써 내려 갔다. 음식들은 다 소박하다. 그러나 할머니의 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이를테면 '오늘은 뭘 해 먹일까' 고민하고 '김치가 제일'이며 '뜨끈한 국만큼 따뜻한 마음'이 담겼다.

굳이 따지자면 <할머니의 요리책>은 요리 비법을 담았다기보다 할머니와 손녀, 그리고 한 가족의 추억을 담은 에세이에 가깝다. 게다가 보통의 요리책이라면 비싼 스튜디오에서 찍은 전형적인 메뉴판 같은 사진으로 꽉 차 있을 텐데, 이 책의 요리들은 전부 손녀가 직접 펜으로 그렸다.

손녀의 그림은 소박하지만 할머니 음식의 담백함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저마다의 음식은 다 사연이 있다.

"생선을 먹을 때 할머니는 생선의 뼈만 쏙 엄청나게 잘 발라내셨다. 손으로 생선의 가시를 발라서 살코기만 내 숟가락 위에 얹어 주셨다. 그러고는 끝까지 '까시' 조심해서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시력이 좋지 않았음에도 작은 가시들까지 발라내는 생선 기름 묻은 할머니의 손끝이 생생하다. 할머니 없이 갈치조림을 먹을 때면 내가 아무리 가시를 잘 발라내도, 꼭 가시 하나씩 목에 걸리곤 했다."

성년이 된 손녀는 런던, 베를린 등지의 아트북페어를 다니며 본인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만든 이 책을 소개했단다. 한글도 모르는 외국인들이 <할머니의 요리책>을 사서, 레시피대로 직접 요리를 만들고 사진을 찍어 손녀에게 보냈다. 할머니의 요리는 만국 공동의 언어가 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얼마 전 재개봉한 <집으로…>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영화 <집으로...>의 한 장면
 영화 <집으로...>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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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달란 말이야! 누가 물에 빠뜨린 닭 달랬어?"

이제는 장성한 배우 유승호의 이 명대사를 아직도 기억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화의 세세한 부분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처럼 사라져 버렸는데, 저 장면만은 유독 뚜렷하다. 그것은 아마 유승호에게 나를 이입했기 때문일 게다(이 영화를 개봉한 17년 전엔 나도 초딩 입맛인지라). 

이제 나는 아재 입맛이 돼버린 걸까.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달라고 생떼 쓰던 꼬마 유승호가 그날 밤에 할머니 몰래 뜯어먹던 백숙의 맛이 그리워졌다. 전화를 걸 필요도 없이 앱만 켜면 세상 모든 먹거리를 한밤중에도 안방까지 모셔다 주는 세상에, 다른 건 필요 없고 방학 때마다 시골에 내려가면 할머니께서 만들어주셨던 토종닭 백숙이 먹고 싶어졌다. 

할머니들의 요리엔 특별한 힘이 있는 게 틀림없다. 세상 모든 악한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특별한 힘. 지금 당장 할머니의 닭백숙을 못 먹으면 삐뚤어질 것 같은 나를 만족시켜 준 것은 <할머니의 요리책>중 '백숙' 레시피다. 
 
 최윤건 할머니의 글씨
 최윤건 할머니의 글씨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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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건 할머니는 이 책에 담긴 레시피를 쓰기 위해 보통의 성인이라면 쓰는데 1분도 안 걸릴 분량을 꾹꾹 눌러 쓰는 바람에 한 시간 정도 걸리고, 어떤 경우에는 두 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하셨단다. 그러다 깜빡 졸기도 하셨다니, 비록 몇 줄 안 되는 글이지만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아 가슴이 뜨거워진다. 더군다나 할머니는 지난 7월 하늘나라로 떠나셨단다.

로켓배송, 새벽배송, 배달음식으로 혼밥을 즐기는 세상에서 <할머니의 요리책>은 새삼스러운 화두를 던진다. '집밥', '가족', '할머니의 손맛'이 그것이다. 이 책은 그저 단순한 요리책이 아니다. 우리 할머니들께 바치는 헌시다.

"한여름에 불 앞에서 뜨거운 국을 요리한다는 것은 정말 고마운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곰국을 만들 때면 삼사일 동안 몇 번이고 푹 고아야 하기 때문에 부엌의 열기는 정말 굉장했다.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가족들 곰국 먹고 힘내라는 할머니의 마음은 무엇보다 따뜻했다."

할머니의 요리책

최윤건, 박린 (지은이), 위즈덤하우스(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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