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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으로 청산해야 할 적폐가 있지만, 국민의 약 70%가 거주하는 아파트의 적폐도 만만치 않습니다. 경험해보니 국가 적폐보다 마을(아파트) 적폐의 청산이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4년간 아파트 회장을 하면서 겪었던 파란만장한 경험과 성취한 작은 성공의 이야기들을 시민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 기자말

회의 때마다 계속된 '회장 남기업 괴롭혀서 쫓아내기' 작전은 그 강도를 더해갔다. 회의 중 내 쪽으로 달려와서 멱살 잡기, 악담을 퍼부으며 회의자료 집어던지기, 등짝 후려갈기기, 조롱하며 비웃기, 때론 야한 농담을 하며 자기들끼리 낄낄거리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언어적·정신적 폭력에 시달린 나에게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고민하다가 입주민의 회의 참관이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입주민이 보고 있으면 저들의 만행이 수그러들지 않을까 한 것이다. 이미 아파트엔 회장 남기업이 회의 때마다 심한 수치와 모욕을 당한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에 평소 아는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회의 참관 요청을 했더니 바로 응했다. 회의 참관을 요청한 또 다른 이유는 50억 원이나 되는 우리 아파트의 1년 관리비의 용처를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는지 그들도 보게 해서 각성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입주민이 참관해도 수그러들지 않은 만행

회의 참관하는 입주민이 처음에는 3~4명 되더니 나중에는 20명으로 불어났다. 참관한 입주민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저들의 만행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참상을 보다 못한 입주민들은 정중하게 항의했다. '회장의 사회권을 존중해야 회의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겠느냐' '왜 회장에게 심한 인신공격성 발언을 하느냐' '발언을 하려면 자기 생각을 말하면 되지 왜 불필요한 말을 하느냐' '욕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며 항의성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들은 항의하고 질문하는 입주민들을 향해 삿대질을 해가며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었다. 이 과정에서 거친 몸싸움과 욕설이 오고 갔고,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핸드마이크를 들고 나타난 감사
  
 감사는 확성기가 달린 핸드마이크를 들고 나타나 회의를 방해했다.
 감사는 확성기가 달린 핸드마이크를 들고 나타나 회의를 방해했다.
ⓒ 남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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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행동대장인 감사가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핸드마이크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채소 팔 때 쓰는 핸드마이크 말이다. 난 처음에 '저 사람이 왜 저걸 들고 왔나' 했는데 발언할 때마다 핸드마이크를 켜는 게 아닌가. 너무 시끄러워서 감사에게 '끄고 발언해 달라' '감사의 발언이 다 들리니 제발 핸드마이크를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핸드마이크를 확성기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안건 토론을 할 때 나에게 논리가 밀리는 것 같으면 핸드마이크 사이렌을 '웽~' 하고 울렸다. 순식간에 회의 장소가 사이렌 소리로 가득 찼고 저들은 이 광경을 보고 낄낄대며 웃었다. 참관한 입주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기가 막힌 것이다.

입주민의 문자와 누나의 눈물

적폐세력들의 회장 괴롭히기를 지켜본 입주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입주민의 참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그것에 항의하면 욕하고 야유를 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참관인들의 숫자가 하나둘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참관을 포기한 입주민들은 내게 미안했는지 문자를 보내왔다.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하다" "너무나 화가 나서 도저히 참관할 수 없다" "미안하다" 등의 문자를.

내가 회의 때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 같은 극한 고통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들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누나가 하루는 대체 회의를 어떻게 하길래 동생이 저렇게 힘들어하나 하고 참관하러 왔다. 회의의 전 과정을 지켜본 누나는 회의가 끝나고 나를 붙들고 한참을 울었다.

이렇게 되니 회의 며칠 전부터 긴장되기 시작했고, 회의 당일엔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회장직을 사퇴하면 결국 이사를 가야 하는데 이사 갈 형편은 안 되고, 내가 그만두면 저들이 관리비를 어떻게 쓸지 뻔히 예상돼 사퇴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만두면 결국 악(惡)에게 패하는 것이어서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혹독했다.

감사에게 결투를 신청한 동대표

동대표 15명 중 나를 지지하는 동대표는 3명이었다. 점잖았던 그들은 저들의 만행을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어 회의 때마다 그냥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런데 그중 40대 초반의 동대표 한 명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나서기 시작했다.

그는 모욕을 당하는 나를 옹호하고 방어하는 발언을 했으나 저들은 그에게도 야유와 조롱을 퍼부었다. 어느 날 난장판인 회의가 끝난 후 그는 행동대장인 감사에게 다가가 결투를 신청했다. 놀이터에 가서 한 판 붙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건 싸우다가 다쳤을 경우 양쪽 모두 치료비를 물어내라거나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안 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붙자는 거였다. 그는 각서까지 준비해 왔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그가 각서 쓰고 한판 붙자고 하니까 감사는 겁을 먹었는지 그냥 가버렸다.

그런데 그가 얼마 있지 않아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가버렸다. 회의에서 그나마 내 편이 되어준, 논리적으로 방어를 해준 용맹한 그가 떠나버린 것이다. 조용했던 나머지 두 명의 동대표도 연이어 이사를 가면서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절망스러웠다.

효과적이었던 정회 및 산회 작전

입주민의 회의 참관도 도움이 되지 않아 고민하던 나에게 어느 입주민이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회의를 계속할 필요 없이 소란을 피우거나 공격을 하면 정회와 속개를 반복하다가 산회를 해버리라는 것이었다. 회장을 비난하는 말을 하면 중단을 요청하고 중단하지 않으면 정회를 하고, 속개해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면 "회장의 사회권이 유지될 수 없어서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친다"라고 선포 후 회의장을 빠져 나가라고 했다. 끝까지 앉아서 더러운 꼴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여 나는 근거 없는 비난 발언을 할 때마다, 사이렌을 울릴 때마다 정회를 선포하고 5분 후 회의를 속개했다가 같은 일이 반복되면 산회를 선포해버렸다. 어떤 때는 20분 만에 회의를 끝낸 적도 있었다. 이렇게 하니 적폐세력과 한 몸인 관리소장이 안달이 났다. '꼭 처리해야 할 안건이 있는데 이렇게 회의를 끝내면 어떻게 하냐'고 하소연하길래 "안건을 통과시키고 싶으면 당신이 회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라"고 해버렸다.

한 해에만 11번 고소를 당하다

저들은 내가 사퇴하지 않으니 이번에는 경찰과 검찰에 고소하는 방법을 썼다. 나의 회장 업무를 방해하는 저들은 '업무방해' 혐의로 나를 고소했고, 나의 명예를 밥 먹듯이 훼손하는 사람들이 '명예훼손' 혐의로 나를 고소했다. 저들에게 훼손당할 명예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2016년 한 해에만 11번이나 고소를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검찰청이나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2016년 3월 경찰서에 처음으로 조사받으러 갔던 날의 긴장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오마이뉴스 자료 사진)
 2016년 3월 경찰서에 처음으로 조사받으러 갔던 날의 긴장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오마이뉴스 자료 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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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경찰서에 처음으로 조사받으러 갔던 날의 긴장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조사받는 횟수가 더할수록 긴장감은 줄었지만, 피고소인 조사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나보다 한참 아래인 30대 초반의 경찰관 앞에서도 난 '을'일 수밖에 없었고, 반말 비슷하게 하는 경찰에게도 최대한 경어를 써야 했으니 말이다. 물론 저들이 나를 고소한 사건은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사실 저들은 무혐의 처분이 내려질 줄 알고 고소한 것이다.

버티는 힘을 공급해 준 '세월호'

저들은 회의 때마다 괴롭혔고 2016년 한 해동안 11번이나 고소를 했으나 나는 버텼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세월호 참사가 나를 버티게 하는 데 큰 힘을 공급해주는 것이 아닌가.

2014년 8월부터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는 날까지 매일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내용의 피켓을 목에 걸고 출퇴근을 했다. 일요일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과 전철역에서 세월호 피케팅도 했다(1주일에 한 번씩 하는 피케팅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피켓을 목에 걸거나 들고 있으면 죽어간 아이들과 유가족의 고통을 자연스럽게 헤아리게 된다.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어느새 아파트에서 당하는 나의 고통은 가벼워졌다. 신기하고 놀라운 체험이었다. 어떤 때는 내가 지금 아파트에서 당하는 고통이 사사롭게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수비만 하고 있지 않았다. 고난받는 과정 중에 나를 돕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겼고 나는 그들과 함께 주말마다 모여 작전을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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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자유연구소(landliberty.or.kr) 소장. 토지정의와 기본소득, 그리고 통일을 염두에 둔 대안 국가모델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운동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