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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고 수사상황을 발표하는 12.12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
▲ 전두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고 수사상황을 발표하는 12.12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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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시대에 청와대 경호실ㆍ보안사ㆍ수경사ㆍ특전단 등 수도권 핵심부서에서 독재자의 비호 아래 세력을 키워온 육사 11기 출신의 '정치군인'들은 10ㆍ26사태 이후 군부 일각에서 "차제에 정치군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곧바로 수도권지역 군부 주요지휘관을 자파세력으로 개편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모의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 출신인 이들 정치군인들은 4월 14일 전두환이 공석 중이던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취임하여 내각에 합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쿠데타를  모의하는 한편, 그 전 단계로 12월 12일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함으로써 군권을 장악했다.

12ㆍ12하극상을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13일 새벽부터 국방부ㆍ육군본부ㆍ수경사 등 국방중추부를 차례로 장악하고, 각 방송국ㆍ신문사ㆍ통신사를 점거하여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었다.

이들은 정승화를 비롯, 그의 추종세력인 3군사령관 이건영,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등을 80년 1월 20일자로 모두 예편시키고 정승화에게는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사진은 1980년 3월 11일 오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 구형 공판에서 검찰관의 논고가 계속되는 동안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경청하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모습.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사진은 1980년 3월 11일 오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 구형 공판에서 검찰관의 논고가 계속되는 동안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경청하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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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세력은 거칠 것이 없었다.

1980년 5월 17일 저녁 9시경 중앙청 국무회의실에는 비상국무회의 소집 연락을 받은 국무위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늦은 저녁에 갑자기 국무회의가 소집되는지, 무슨 안건을 심의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저녁 광화문 중앙청 일대에는 전에 없이 무장군인들의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고, 국무회의실 복도 양편에 착검한 소총을 든 살벌한 군인들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국무위원들은 외부와 자유롭게 전화통화 조차 할수 없었다.

신현확 총리는 9시 42분에 제42회 임시국무회의 개회를 선언하고 국방부에서 '의안 360호'로 제출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선포안을 의안으로 상정하여 의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옥길 문교장관이 의안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찬반토론은 전혀 없었다. 신 총리가 이 의안의 가결과 국무회의의 산회를 선언했을 때의 시간은 9시 50분이었다. 일체의 찬반토론도 없이 단 8분 만에 비상계엄 전국 확대선포안이 의결된 것이다. 실로 최규하 정부는 신군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렇게 토론 한마디 없이, 헌법기구인 국회를 쓸어버리고 민주화를 짓밟는, 그리하여 5ㆍ17쿠데타를 뒷받침하는 계엄포고령이 국무회의에서 어이없게도 처리된 것이다. 신군부의 이른바 '싹쓸이 작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임시국무회의가 계엄포고령을 의결한 것은 요식절차에 불과하고, 이보다 앞서 이날 오전 11시부터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소집되었다. 전군 지휘관회의는 최성택 합참정보국장의 정세보고와 현황설명 후 자유토론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육사 생도 시절의 전두환(왼쪽)과 노태우
 육사 생도 시절의 전두환(왼쪽)과 노태우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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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용 특전사령관과 노태우 수경사령관, 박준병 20사단장 등이 강경발언을 계속했으며, 일부 신중론이 있었지만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신군부는 회의가 끝날 무렵 백지를 돌려 참석자들의 연서명을 받았다.

회의를 마친 주영복 국방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국 주요 지휘관들의 연서명이 첨부된 신군부의 시국대책안을 들고 오후 5시경 신 국무총리를 찾아갔다. 신 총리는 국보위설치안에 대해서만 반대하고 나머지는 모두 받아들였다.

세 사람은 곧바로 청와대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군부의 시국대책방안을 설명했다. 최규하는 오후 7시경 이를 승인하고 신 총리에게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보다 앞선 16일 밤 10시 30분경, 최 대통령이 사우디 방문에서 앞당겨 귀국하자 전두환은 신 총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 국방, 김종환 내무장관과 청와대로 들어가 비상계엄 확대조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최규하는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청와대를 나온 전두환은 보안사의 권력장악 시나리오 준비팀인 권정달 정보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등 심복들을 가동하여 군지휘관회의에서 결정할 사항과 민주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시켰다.

신군부는 5월 초순부터 이른바 '충정작전'의 구실로 충정부대의 서울 인근 투입을 5월 17일 이전에 이미 완료했다. 특히 광주에는 공수부대의 핵심부대를 은밀히 파견키로 했다.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각 학교마다 교문을 뚫고 서울역으로 집결했다. 총집결한 그 날 ‘서울의 봄’ 시위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각 학교마다 교문을 뚫고 서울역으로 집결했다. 총집결한 그 날 ‘서울의 봄’ 시위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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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는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라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ㆍ시위의 금지 △언론ㆍ출판ㆍ보도 및 방송의 사전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을 내렸다.

이에 앞서 17일 밤에는 김대중ㆍ김상현ㆍ김종필ㆍ이후락 등 26명의 정치인들을 학원ㆍ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 등으로 합동수사본부에 연행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시키는 등 정치적 일대탄압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신군부는 5월 18일부터 전국계엄 확대와 함께 이미 소집공고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수도군단 30사단 101연대 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조차도 밟지 않은 채 사실상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국헌문란을 자행했다.

실제적인 군통수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정치사회 일반에 대한 모든 권력을 찬탈하고자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설치하고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에 취임했다. 국보위는 초법적인 권력기관으로 등장, 정권을 탈취해 5공정권 수립에 받침대 노릇을 했다. 이로써 유신체제보다 더 포악무도한 5공시대가 시작되었다.
  
박정희 일가와 권력 실세들 1977년 봄, 육사에 입교한 '박지만 생도' 면회를 간 박정희 대통령 일가와 대통령 비서실장, 경호실장, 육사 교장 등 당대의 권력 실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 박정희 일가와 권력 실세들 1977년 봄, 육사에 입교한 "박지만 생도" 면회를 간 박정희 대통령 일가와 대통령 비서실장, 경호실장, 육사 교장 등 당대의 권력 실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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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밑에서 권력의 단맛을 탐닉해온 독재자의 충견들은 10ㆍ26사태로 주군이 쓰러지자 국민적 염원인 민주화 대신 정권을 노렸다. 12ㆍ12 군사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하고, 무능한 최규하를 겁박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마침내 5ㆍ17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5ㆍ17 군사쿠데타는 박정희 18년 독재체제가 낳은 정치적 사생아였다.

4ㆍ19혁명 후 집권한 민주당이 분당과 무능으로 박정희에게 쿠데타의 기회를 제공한 측면이 있듯이, 10ㆍ26사태 후 야권의 일부 지도자들은 신군부의 움직임을 꿰뚫지 못한 채 각기 집권욕에 사로잡혀 분열ㆍ분당을 일삼은 측면도 없지 않았다. 역사에서 전혀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토방위에 전념하라고 국민의 세금으로 무장한 일부 군인들이 권력에 눈이 멀어 군사력을 동원하여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이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것은 어떤 명분ㆍ이유로서도 용납될 수 없다.

40여 년이 되는 지금 반란수괴의 후예들이 '이명박근혜순실' 정권의 적폐청산을 거부하면서 민주주의를 역류시키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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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