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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약용(1762~1836)은 4살 때 천자문을 뗐다고 한다. 7살부터 한시를 지었는데, 10살에 자신이 지은 한시들을 <삼미집>이란 시집으로 엮어 주변에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을 설계하는 한편 거중기를 발명해 화성 건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배다리 설계로 배로만 건너던 한강을 많은 사람이 짧은 시간에 건널 수 있도록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외에도 많다. 
 
이와 같은 행적들만으로도 미뤄 짐작, 타고난 천재 소년은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그런 총명한 청년으로 자랐을 것 같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약용이 과거시험(아래 과거)에 열아홉 번이나 낙방했다? 
 
 <다산의 열아홉 번> 책표지.
 <다산의 열아홉 번> 책표지.
ⓒ 생각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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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과거를 보기 시작한 것은 18세 때. 효종 승하 120주년 되는 해에 정조가 효종 왕릉을 참배,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북벌을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요절한 효종과, 자신의 왕릉 참배를 기리고자 시행한 별시였다고 한다. 그러나 첫 단계인 초시에도 급제하지 못한다.
 
오늘날 각종 경기나 대회에서 예선 통과를 해야만 준결승에 도전할 수 있고, 나아가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다. 과거시험도 마찬가지. 중간에 낙제하면 대과에 응시하지 못했다. 또한, 다음 과거에선 초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어떤 경우에도, 그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그러니 열아홉 번의 낙방 끝에 겨우 급제한 정약용이 10년이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시험을 치렀을 것인지, 그로 얼마나 좌절했으며 또한 마음 상했을지 짐작이 쉽다. 어쩌면 타고난 천재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기대 때문에 더더욱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10월 4일, 그해 마지막 과시가 열렸다. 국태안민, 세자 책봉, 풍년성대 등 다섯 가지 경사를 맞이하여 대과 전시를 치렀다. 이번에는 복시까지 간단히 급제하여 대과에 나섰으나, 다산의 이름은 방방의 급제자 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벌써 열두 번째 낙방이라니. 흐르는 눈물은 없었다 해도 어찌 가슴이야 젖지 않았겠느냐?. 아니 부끄럽고 한편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더구나. 무엇보다 마음의 분노를 삭이지 않으면 안 되었지. 벗들과 한적한 계곡을 찾아 시를 지으며 즐겁게 노는 시모임에도 나가 보았다. 꿩 사냥도 몇 차례나 나가보고는 했지. 그런데도 한동안은 자신을 제어하기가 어렵기만 하더구나. 아무 소용이 없었어. 여러 날을 방황해보았지만…. 폐허 같은 쓸쓸함과 공허 같은 허망함만이 남은 세밑이었다. - 209~211쪽
  
<다산의 열아홉 번>(생각 출판사 펴냄)은 비교적 많이 알려진 정약용의 업적이나 행적에 비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정약용의 열아홉 번의 과거 낙방'에 초점을 맞춘 역사소설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약용이 강진에서의 마지막 밤, 제자들의 간청으로 그동안 마음속에 꼭꼭 싸매어뒀던 자신의 과거시험을 고백하듯 들려준다. 소설 속 정약용은 거듭되는 낙방에 자책하거나 자신에게 분노한다. 세상을 탓하거나 원망하기도 한다. 다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가 농사나 지으며 살까? 포기하거나 방황하기도 한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그동안 주로 학자로서의 업적이나 정조와 더불어 개혁을 시도했던 강건한 역사 인물로 만났기 때문일까. 소설을 통해 만나는 이와 같은 정약용은 낯설다. 그런데 살갑게 와 닿는다. 훨씬 인간적으로, 그리고 바로 곁에서 들려주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했으며, 많은 저술이 이뤄진 다산초당 가는 길엔 뿌리들이 잔득 드러난 일명 '뿌리의 길'이 있다. 애초 푹신한 땅에 싹을 틔워 자랐을 나무들이 생명의 원천인 뿌리가 드러나는 시련을 극복하며 우람하게 자라며 독특한 길을 이룬 것이다. 다산초당을 향해 가며 정약용의 삶과 같단 생각을 하곤 했다. 이런 뿌리의 길을 떠올리며 삶의 용기를 얻곤 한다.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했으며, 많은 저술이 이뤄진 다산초당 가는 길엔 뿌리들이 잔득 드러난 일명 "뿌리의 길"이 있다. 애초 푹신한 땅에 싹을 틔워 자랐을 나무들이 생명의 원천인 뿌리가 드러나는 시련을 극복하며 우람하게 자라며 독특한 길을 이룬 것이다. 다산초당을 향해 가며 정약용의 삶과 같단 생각을 하곤 했다. 이런 뿌리의 길을 떠올리며 삶의 용기를 얻곤 한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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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돌아간 정약용은 집필을 계속,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평가된다. 500여 권의 저술 중 대부분의 저술이라 할 수 있을 400여 권이 유배 중에 이뤄졌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어쩌면 삶의 최대 고난이었을 시기 정약용은 분연히 타올랐던 것이다.
 
지난날 거듭되는 낙방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이겨낸 덕분에 갖추게 된 저력이 유배라는 큰 시련을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지레짐작은 지나친 비약일까?

정약용의 삶은 출사, 즉 벼슬을 받은 그 후부터 유배와 해배 그 후에 대해 많이 알려졌다. 소설은 첫 과거를 보는 18세부터 비로소 급제하는 28세까지의 정약용을 들려준다. 그동안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청년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것도 내면적인 이야기들을. 소설이지만 그때 당시의 과거 제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말할 것도 없이 과거제도의 명분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인재를 널리 선발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부정행위가 좀처럼 끊이지 않았다. 과시의 부정과 폐단은 근절될 줄 모르는 채 끊임없이 진화해가고 있었다. 선대왕조인 영조 연간 이후 노론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이전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고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유형만 보더라도 우선 열 손가락이 넘어갔다. 다른 이가 지은 문장을 자기 것인 양 무단 도용하거나 신분을 속인 채 과장 안으로 들어가 문장을 대신 써주는 행위, 시관을 매수하여 사전에 문제를 누설 받는 행위, 봉미를 슬쩍 엿보거나 고치는 행위, 사전에 필적을 짜 맞추어 등수 안에 들게 하는 행위, 자기들만의 표시를 따로 해두어 응답하는 행위, 사헌부의 대간을 매수하여 시권을 바꿔치기하는 행위…. 그야말로 천태만상이었다. - 53~54쪽
 

다산의 열아홉 번

박상하 (지은이), 생각출판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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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