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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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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신군부의 5ㆍ17쿠데타 당시 광주항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는 국민으로 의심받을 수 있고, 이후 민주화운동은 크게 지체되었을 지 모른다.

박정희의 5ㆍ16쿠데타와 유신정변을 겪은 한국민이 또다시 그의 후계자들에 의한 '예고된 쿠데타'를 당하고도 저항에 나서지 않았다면 국제사회에 부끄러움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예고된'이라는 표현은 1979년 신군부가 12ㆍ12사태로 군권을 탈취할 때부터 정권찬탈이 충분히 예고되었기 때문이다.

5ㆍ18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민저항권의 발동이었다.

박정희의 무소불위한 18년 독재가 그의 암살로 막을 내리고 국민은 '서울의 봄'을 맞이하였다. 독재자가 부하에게 암살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국민은 다시는 이 땅에 어떠한 형태의 독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조속한 민주정부 수립을 기대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화창한 5월에 일진광풍이 휘몰아치고 국민은 비상계엄령의 공포감에 숨을 죽여야 했다.

그때 광주ㆍ전남도민들이 떨치고 일어났다. 중무장한 계엄군에 맨손의 시민ㆍ학생들이 도전한다는 것은 여간해서 쉽지 않는 일이다. 국회가 해산되고 각급 언론사와 정부기관에 탱크가 포진하는 상황은 아무리 대범한 사람이라도 공포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1960~70년대 아시아ㆍ아프리카 제국에서 잇따라 발생한 군부쿠데타는 무장한 위력으로 국민을 겁주면서 진행되었다. 군부는 국민을 공포감에 떨게 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고 폭력으로 유지하였다. 저항자들은 목숨을 빼앗겼다.
  
 1980년 11월 3일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에 대한 사형을 확정한다.
 1980년 11월 3일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에 대한 사형을 확정한다.
ⓒ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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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일부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지역성으로 폄하하는 경우가 있다. 김대중의 구속에 저항한 지역주의 발로라는 것이다. 광주항쟁은 당시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주장도 포함되지만, 그것이 원인이거나 동기, 그리고 목표는 아니었다.

물론 그 지역 출신 정치인으로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고 간신히 살아남아 활동 중에 다시 신군부에 의해 체포된 사실에 지역민들이 분노하고 저항한 것은 당연지사이다.

하지만 광주항쟁이 추구한 가치와 큰 목표는 쿠데타의 주범 전두환 타도와 계엄령해제였다. 민주주의를 짓밟은 전두환을 타도하고 불법적인 계엄령을 해제하고, 민주화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집약하면 '민주화'였다. 민주주의는 3ㆍ1혁명으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이 추구해온 '민주공화'의 기제에 속한다.

광주항쟁은 이승만과 박정희가 훼손하고, 다시 전두환이 짓밟은 민주주의의 회복을 요구하는 국민저항권의 발로였다. 지역ㆍ정파성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가치였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군인들이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주권자에게 총질을 하자, 시민들은 마침내 시민군을 편성하고 무장을 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정당방위 차원이다.
  
 시민들과 대치중인 진압군
 시민들과 대치중인 진압군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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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연구에 해박한 연구가의 5ㆍ18에 관한 분석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가 보는 광주민중항쟁은 첫째, 우리의 근ㆍ현대사를 통해 꾸준히 이어져 온 피지배 민중층의 부당한 권력, 포학한 권력에 대한 항쟁의 연속선상이며 둘째, 그것은 역시 우리 근ㆍ현대사 위에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온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의 민주화운동의 폭발이며 셋째, 그것은 또 우리 근ㆍ현대사를 통해 반일운동에 한정되다시피 한 반외세운동의 하나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고 넷째, 그것은 또 이 시대 민족운동의 중요한 요소로서의 민족통일운동을, 특히 그 민간운동을 활성화시킨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다섯째, 이 항쟁은 또 이 시대의 종합적인 의미에서 민중민족운동의 하나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주석 1)

광주항쟁은 독재자 박정희의 암살이라는 사태에서도 군부 일각이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권력에 눈이 멀어 역사를 반동으로 몰아가는 반역에 저항하는 의거였다. 5ㆍ18이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5공정권을 비정통적ㆍ반동세력으로 규정함으로써 향후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지향점을 제시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그것이 실패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집단의 소위 5공을 비정통적 집단으로 규정하는 확고한 근거를 주었다는 데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치밀하게 집권을 준비해오던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의 참혹한 학살 이후 대통령에 취임한다. 만일 민주화운동 세력이 치열한 반유신투쟁 와중에도 박정희 이후의 대안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5월 광주의 학살도,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19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치밀하게 집권을 준비해오던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의 참혹한 학살 이후 대통령에 취임한다. 만일 민주화운동 세력이 치열한 반유신투쟁 와중에도 박정희 이후의 대안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5월 광주의 학살도,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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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수립을 위한 군부의 반동적 시도에 저항함으로써 역사에서 민족민중적 세력은 소위 5공의 비정통성을 규정하고 역사 앞에 이것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5공수립 이후 오늘에 이르는 민족민중운동의 저항논리의 근거는 광주민중항쟁에서 획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은 저항에 의해 군부정권의 비정통성을 규정함으로써 민족민중운동의 합법성을 쟁취했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억압당했던 민족민중적 요구는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역사의 정면에 제기되고 이것은 연이어지는 투쟁을 통해 광주민중항쟁의 정당성을 모두에게 인정케 함으로써 민족민중운동의 정당성을 확고히 한 것이다.

즉 이제 부당한 것에 대해서는 민중이 항쟁할 수 있다는, 또 항쟁해야 한다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의 공인은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석 2)


주석
1> 강만길, 「5ㆍ18광주민중항쟁의 민족사적 성격」, 『역사와 현장』1, 28쪽, 남풍, 1990.
2> 박현채, 「80년대 민족민주운동에서 5ㆍ18광주민중항쟁의 의의와 역할」, 앞의 책, 5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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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