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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시(市)라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 너른 터에 유교문화의 퇴적물이 두텁게 쌓였다. 발길 닿는 곳마다 보이는 게 오래된 동성마을의 고색창연한 고택과 종가다.

전주류씨의 무실마을, 광산김씨의 군자마을, 진성이씨의 하계와 부포마을, 안동김씨의 소산마을, 의성김씨의 내앞과 지례마을,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풍산김씨의 오미마을, 안동권씨의 가일마을, 고성이씨의 법흥마을, 예안이씨의 하리마을 등 오래된 동성마을이 너무나 많다.

모두 둘러볼라치면 숨이 가빠온다. 이 중 상당수 마을이 수몰돼 사라지거나 이전됐다. 이번에는 수몰의 수난을 용케 피한 오래된 마을 가운데 고택이나 종택이 보물이나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내앞, 하회, 오미, 가일마을을 둘러볼 참이다.
 
'쟁쟁한' 내앞마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반변천 향해 길게 늘어서 있어 마을은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은 치헌이 있는 동쪽 부분이다.
▲ 내앞마을 정경 서쪽에서 동쪽으로 반변천 향해 길게 늘어서 있어 마을은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은 치헌이 있는 동쪽 부분이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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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년 전 안동 반변천가에 '쟁쟁한' 마을이 들어섰다. 의성김씨 동성마을, 내앞마을이다. 사람이 가장 살기 좋다는 시냇가 근처(계거, 溪居)에 자리 잡았다. 영양 일월산에서 시작한 반변천은 하늘하늘 흐르는 냇가였다. 적어도 1992년 임하댐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랬다.

의성김씨가 내앞시대를 연 이는 김만근(1446~1500)이다. 관직을 사직하고 안동에 은거한 김한계(1414~1461)의 장자다. 김만근은 임하현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가진 해주오씨 오계동 집안에 장가들어 처갓집 재산을 물려받고 내앞마을에 정착했다.

김만근의 손자, 청계 김진(1500~1580) 이후 마을이 번성해 번영기를 맞았다. 김진의 아들 오형제, 약봉 극일, 귀봉 수일, 운암 명일, 학봉 성일, 남악 복일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이후 명문가 반열에 올랐다.
  
"천금쟁쟁(川金錚錚), 하류청청(河柳靑靑)"이라는 말이 있다. 내앞김씨(천금)가 쟁쟁하고 하회류씨(하류)가 싱싱하게 푸르다는 의미다. 이 말은 18세기 영남이 반역향(反逆鄕)으로 낙인찍힌 상황에서 노론집권세력이 안동유림의 동태를 조정에 보고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두 마을이 배출한 인물이나 근성이 너무나 쟁쟁하고 청청해 힘으로 제압하거나 말로 회유하기 쉽지 않다는 의미다. 아닌 게 아니라 조선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는 퇴계의 수제자로 내앞은 학봉 김성일(1538~1593)을, 하회는 서애 류성룡(1542~1607)을 배출했다. 각 문중의 후손들이나 영남남인에게 이들은 정신적 지주였고 자부심이었다.

내앞이 쟁쟁하다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더 어울리는 말이 되었다. 내앞이 배출한 독립유공자만 해도 20명, 내앞 출신자를 다 합하면 33명에 이른다. 내앞이 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리며 마을 앞에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을 세운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내앞마을의 옛집들

 
당당한 외형과 안채의 대청기능을 강조한 공간의 가변성면에서 대종가와 맥을 같이한다.
▲ 귀봉종택 당당한 외형과 안채의 대청기능을 강조한 공간의 가변성면에서 대종가와 맥을 같이한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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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집들은 마을 맨 왼쪽(서쪽)에 청계 김진의 대종가, 의성김씨종택을 시작으로 천변 따라 동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대종가 바로 옆에 추파고택이 있으며 김진의 둘째아들, 수일(1528~1583)의 작은 종가, 귀봉종택이 이웃해 있다. 귀봉종택은 사당에 아들 운천 김용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운천종택으로도 불린다. 그 옆에 김동삼생가가 붙어 있다.
    
마을 한가운데 천전새마을창고 북쪽 산기슭에 만송헌이 있고 바로 위에 운곡서당이 있다. 동쪽으로 골기와가 예쁜 백인재고택이, 옆으로 백하구려와 제산종택, 치헌이 연달아 있다. 치헌은 지례마을에 있던 집으로 수몰되는 바람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의성김씨종택은 높고 낮은 지붕이 물결을 이뤄 웅장하다. '一' 자 행랑채, 서고가 딸린 'T' 자형 사랑채와 사랑채 동쪽 옆으로 중후한 네모난 안채가 들어차, 여느 살림집 틀에서 벗어난 구조다. 완벽히 네모난 뜰집으로 안에는 '凸' 모양의 안뜰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대청 기능을 강조한 공간 활용이 돋보인다. 종가의 제일 덕목인 봉제사접빈객을 위한 것이다.
  
내앞마을 사람들

안동에는 "유가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말이 떠돌아다닌다. 그른 일에 굴하지 않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마을에 드나드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는 말이다. 내앞마을에도 금부도사가 3번 다녀간 적이 있다. 시쳇말로 내앞은 결기가 충천한 반골의 기질을 갖고 있었다.

이런 기질을 타고나서인지 귀봉 김수일의 맏아들, 운천 김용(1557~1620)은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다. 구한말에 이르러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마을사람들은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을 하고 나라를 빼앗기자 더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벌였다.
  
김동삼과 협동학교 교직원 사진(1907년)으로 사진 왼쪽 맨 위에 있는 분이 일송 김동삼이다.
▲ 일송 김동삼 김동삼과 협동학교 교직원 사진(1907년)으로 사진 왼쪽 맨 위에 있는 분이 일송 김동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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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봉의 후손 집답게 귀봉종택에 이웃해 있다. 내앞마을에 있는 집치고 평범하게 보이는 집이다.
▲ 김동삼생가  귀봉의 후손 집답게 귀봉종택에 이웃해 있다. 내앞마을에 있는 집치고 평범하게 보이는 집이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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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에 백하 김대락(1851~1905)과 일송 김동삼(1878~1937)이 있었다. 모두 귀봉의 후손들이다. 일송은 협동학교를 설립해 구국운동을 펼치다 만주로 넘어갔다. 안동유림의 문인이었지만 문약하지 않았다. 만주벌판을 누비며 무장항일투쟁을 벌여 만주벌 호랑이로 불렸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김동삼의 생은 말할 것도 없고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 겪은 가족의 수난은 딱하기 그지없다. 동생 김동만은 간도참변 때 일제에 의해 무참히 살해됐고 아들 정묵은 해방 후에 중국에서 죽도록 매 맞고 2년 뒤 사망했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김동삼에게 보내기 위해 마지막으로 찍은 가족사진. 뒤줄 왼쪽이 큰 아들 정묵, 오른쪽은 둘째아들 용묵이다. 앞줄 왼쪽부터 큰손자 장생, 큰며느리 이해동, 둘째손자 중생, 큰손녀 덕축, 아내 박순부다.
▲ 김동삼 가족사진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김동삼에게 보내기 위해 마지막으로 찍은 가족사진. 뒤줄 왼쪽이 큰 아들 정묵, 오른쪽은 둘째아들 용묵이다. 앞줄 왼쪽부터 큰손자 장생, 큰며느리 이해동, 둘째손자 중생, 큰손녀 덕축, 아내 박순부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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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묵의 큰딸, 덕축은 1950년 신의주에서 전쟁 때 폭격으로 사망했으며 정묵의 아들, 장생은 해방 다음해에 서울에서 실종됐다. 셋째아들은 정신이상으로 사망했고 며느리 이해동(1905~2003)은 1989년이 돼서야 겨우 둘째아들 김중생과 함께 77년 만에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시류에 편승하여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비극의 가족사를 안고 있다.

백하 김대락은 협동학교의 부지로 그의 사랑채를 선뜻 내놓았고 나라를 잃자 의성김씨일족 150명을 이끌고 만주행을 택했다. 백하 집안은 사람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의 삼 천석 부자라 소문이 자자했다. 이 중 사람 천석은 얽히고설킨 혼맥과 인맥, 혈연에서 나온다.
  
백하가 1885년에 지은 집이다. 사랑채에 근대식 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사랑채 4칸을 확장하여 협동학교의 임시교사로 사용하였다.
▲ 백하 김대락의 백하구려  백하가 1885년에 지은 집이다. 사랑채에 근대식 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사랑채 4칸을 확장하여 협동학교의 임시교사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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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의 아들, 김형식은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을 지냈다. 막내여동생 김락(1862-1929)은 57세에 예안에서 3.1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고문 끝에 두 눈이 실명되었다. 김락은 향산 이만도의 아들, 이중업 아내고 백하의 첫째 여동생 김우락(1854-1933)은 석주 이상룡의 아내다. 혼맥으로 얽힌 백하와 향산, 석주의 세 집안 근대가족사는 독립운동사가 될 만큼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만하다.

내앞마을 굴뚝

의성김씨종택은 대종가답게 소박미와 절제미를 발휘해 집안은 화려한 장식 없이 소박하게 꾸몄다. 그러나 안채 마당에 있는 굴뚝만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키가 큰 붉은 벽돌 굴뚝이다. 생긴 지 그리 오래돼 보이지 않는다. 봉제사접빈객에 시달리는 집안 여성을 조금이라도 배려한 걸까. 연기가 쑥쑥 잘 빠지는 키 큰 굴뚝이다.
   
귀봉의 후손, 김동삼과 김대락을 닮았는지 듬직하고 기개가 있어 보인다.
▲ 귀봉종택 굴뚝  귀봉의 후손, 김동삼과 김대락을 닮았는지 듬직하고 기개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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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봉종택의 굴뚝은 안동에 산재한 전탑(塼塔)을 닮았다. 안동사람들의 전탑사랑을 이 굴뚝으로 재현해 보려 한 것은 아닌지. 운천과 그의 후손, 김동삼과 김대락을 닮았는지 듬직하고 기개가 있어 보인다.

백하 김대락의 집, 백하구려(白下舊廬) 마당은 백하의 도량만큼이나 넓다. 마당 한가운데에 놓인 바위덩어리는 흔들리지 않은 백하의 묵직한 신념을 표상(表象)한다. 처마 밑 백하구려 편액이 세상에 떳떳함을 던진다.
  
마당한가운데 있는 바위는 백하의 묵직한 신념을 표상하고 처마밑 백하구려 편액은 백하의 떳떳한 뜻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 백하구려  마당한가운데 있는 바위는 백하의 묵직한 신념을 표상하고 처마밑 백하구려 편액은 백하의 떳떳한 뜻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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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지도, 키가 크지도 않으면서 가볍지 않다. 군더더기 없는 절제 예술품으로 보인다.
▲ 백하구려 굴뚝  화려하지도, 키가 크지도 않으면서 가볍지 않다. 군더더기 없는 절제 예술품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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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의 가치지향적인 의롭고 선한 행동은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정확히 꿰뚫고 양심에 따라 행동한 도덕적 행위다. 키 작고 소박한 백하의 굴뚝은 집 뒤 처마 밑에서 숨죽이고 있다. 의(義)와 선(善)을 본바탕으로 한 백하의 신념이 농축된 군더더기 없는 절제 예술품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름답게 보인다.

태그:#내앞마을, #내앞마을굴뚝, #김동삼, #김대락, #의성김씨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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