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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심심치 않게 들리는 '워라밸'이란 신조어가 있다. 'Work and Life Balance'의 줄임말인 이 단어는 주로 젊은 세대들이 직장과 분리된 사생활의 시간과 영역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느냐의 관점에서 사용된다. 하지만 내게는 이 단어가 지닌 함의에서 몹시 안타까운 현실이 읽힌다.

일단 문법상으로 'A와 B의 균형'이라고 하면 A는 B가 아니라는 뜻을 전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채식과 육식의 균형'이란 표현은 채식은 육식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말이고, '저축과 소비의 균형'도 저축은 소비가 아니기에 가능한 말이다. 마찬가지로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이 신조어 역시 '일은 삶이 아니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나는 지극히 기계적인 태도로 딱 지시받은 일만 하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일의 퍼포먼스를 중시하며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과시하려는 유형이다.
 하나는 지극히 기계적인 태도로 딱 지시받은 일만 하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일의 퍼포먼스를 중시하며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과시하려는 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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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삶이 아니라니? 일할 때도 살아 움직이기는 하는데, 삶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 아무튼 '일과 사생활의 균형'이나 '일과 휴식의 균형'이라는 표현 대신 굳이 '일과 삶의 균형'이란 말이 생겨났고 이 단어가 별 저항 없이 사용되고 있는 걸 보면, 적어도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일은 삶이 되지 못한다'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일에서 분리시켜 지켜낸 사생활의 영역만을 진짜 삶이라고 느끼게 되었으며, 그러면서도 가장 피하고 싶은 일에 하루 중 가장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게 '워라밸'이란 신조어에 비친 우리의 씁쓸한 현실이다.

그러니 일이란 참 얄궂다. 예전에 이도 저도 아닌 상태를 웃기게 묘사하면서 '이건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여'라는 유행어를 만든 개그가 있었는데, 일이야말로 그렇다. 원하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원하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일을 어떻게 하는 게 잘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일을 잘 해내기 위한 요령을 습득하고 나름의 방식을 터득한다. 열 명도 채 안 되는 우리 미화반 내에서도 일을 대하는 극과 극의 태도가 존재한다.

일을 잘 한다는 것

하나는 지극히 기계적인 태도로 딱 지시받은 일만 하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일의 퍼포먼스를 중시하며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과시하려는 유형이다. 이런 상반된 유형은 어느 직장에나 존재하며 누구든 이 양 극단 사이의 스펙트럼 어느 지점엔가 위치하고 있을 거라 생각된다.

기계적으로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은 일견 불성실하고 게으른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나름대로는 스트레스 덜 받으며 오랫동안 꾸준히 일해나가기 위한 방식을 터득한 것이다. 한편 일의 퍼포먼스를 중시하는 사람은 혼자 나서서 동료들을 힘들게 만드는 아니꼬운 사람일 수 있지만, 어쨌든 일을 잘한다고 보일 수 있다. 고용주 입장에서도 환영할 만한 사람이다.

나도 청소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땐 에너지가 넘쳐서 시키지도 않는 일을 찾아서 하고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오염을 제거하고 다니며 혼자 뿌듯해 했다. 그런데 여러 달이 지나면서 그런 열정은 사그라졌다.

무엇보다 몸 여기저기가 아파오며 피로가 쌓여갔고,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도 지루했으며, 어떤 긍정적인 피드백도 존재하지 않으니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시키는 일 외에 더 하려고 하지 마라, 몸 사려가며 최소한으로 일해야 오래 할 수 있다'는 주장에 귀가 솔깃했고, 그 말만으로도 왠지 위로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양 극단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 자신을 보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시키는 일만 하는 쪽과 능력과 결과를 과시하는 쪽이 극과 극인 것 같지만, 둘 다 자유가 없이 일한다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자유(自由)'란 내 행위의 이유가 스스로에게서 나온다는 뜻이다. 일하는 이유를 나 스스로에게서 찾을 수 있을 때, 자유로운 일이 된다. 그런데 한쪽은 타인이 시키기 때문에 일을 하고, 다른 한 쪽은 타인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해 일을 한다. 그러니 자유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의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을 하는 첫째 이유가 돈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일의 자유를 아예 포기해 버려야 할까?

일의 자유를 허하라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과 자긍심을 갖고 싶어 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과 자긍심을 갖고 싶어 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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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을 하기까지, 그리고 일터로 향하기까지는 돈 때문이라고 접어둔다 해도, 일단 일터에 당도하여 팔을 걷어붙인 순간부터는 내가 하는 일에서 자유를 찾고 싶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신념과 판단대로 내가 느끼는 책임만큼 일을 하고 싶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기가 힘든 걸까?

나는 그것이 '사용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노동자를 '사용'하는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통되지 않는 구조 때문이다.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지시하는 통로는 조직화되어 있지만, 노동자의 의견이 사용자에게 전달되는 통로는 없는 구조다.

사용자는 해당 업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직접 경험하는 일과 머리로만 생각하는 일은 다르다. 일의 본질과 속성과 과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사용자가 아니라 노동자다.

그런데도 특히 청소와 같이 단순노동으로 치부되는 일일 때, 사용자는 노동자에게서 의견을 들어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다. 여기를 치우라면 치우고 저기를 닦으라면 닦으면 될 일이지 별다른 의견이 생길 여지는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하지만 세상에 단순노동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다. 어떤 일이든 뛰어들어 하게 되면 일의 목적과 과정과 결과를 생각하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문제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발전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내가 지금까지 반년이 넘게 미화원으로 일하는 동안, 사용자와 노동자 간에 청소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의견을 교환할 기회가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팀장 이하 미화, 경비, 시설 부서의 인원이 모두 모여 첫 인사하는 자리에서 팀장이 일일이 명함을 돌리며 '언제든 하실 말씀이 있으면 편하게 찾아오시라'고 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내가, 우여곡절 끝에 팀장을 만나 재활용 쓰레기 수거 문제에 대해 개선방안을 제시했지만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노동자는 지시가 내려오면 그대로 따르기만 해야 한다. 실제로 일을 해보니 그 지시에 불합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도 관리자에게 의논할 수 없고, 시키지 않았지만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이 발견되어도 '이런 일을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생산적인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업장도 존재하겠지만, 나의 경우처럼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는 곳의 사용자는 이런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노동자가 입에서 나올 얘기는 십중팔구 임금인상이나 처우개선 같은 요구사항밖에는 없다고 말이다. 노동자 자신이 누구보다 일을 잘하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노동자야말로 일을 잘 하기 위한 가장 실질적인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빈둥거리며 월급만 타먹으려는 이도 간혹 있긴 하겠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과 자긍심을 갖고 싶어 한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일을 하는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아니, 어쩌면 밑바닥 일을 하는 노동자일수록 일을 통해 얻는 의미를 더 절실히 바랄 것이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정책에 내가 참여한다는 것은 내 일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는 뜻이다. 자기의 이유, 즉 자유(自由)를 갖고 일한다는 말이다. 시키는 일만 기계적으로 할 필요도, 남에게 보이기 위해 과시적으로 일할 필요도 없게 된다. 굳이 '워라밸'을 따질 필요도 없게 되지 않을까? 이 신조어의 맥락이 궁극적으로는 일도 사람답게 하고 싶다는 소망, 일하면서도 삶을 느끼고 싶다는 바람을 향하고 있다면 말이다.

태그:#워라밸, #미화원, #청소,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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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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