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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타인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과 가치관에 따라 다른 대응을 하게 된다. 탐색, 복종, 적대, 냉대 등 다양한 대응 방식 중에서 계급이 낮은 사람은 쓸 수 없어도 높은 사람만 쓸 수 있는 전략이 있다. 고압적으로 무시하는 방법이다. 무시하는 사람은 이를 통해 타인을 알게 되면서 얻는 피로를 겪지 않는다. 

대신 남을 무시하는 사람은 남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다. 관찰과 탐색은 인내와 세심함이 필요하다. 열린 자세로 타인을 살피고 관찰하는 사람은 타인의 행동 양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필요한 역지사지의 태도를 익힐 수 있다.

백년도 전 유럽에서, 자신의 계급에 따라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일은 일상적이었다. 노동자들은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에게 도덕적 지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던 어떤 영국인 작가는 자신이 탄 배에서 직접 사람을 관찰하고 남에 대해 생각하는 일에 자신의 정신을 쏟았다. 남을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메리카행이민선
 아메리카행이민선
ⓒ 스티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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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선악의 가치관이 전혀 다른 두 존재가 한 육체에서 공존하는 내용의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로 유명한 작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데다가, 작품 <보물섬> 등의 성공으로 스스로도 경제적 안정을 이룬 사람이었다.

스티븐슨은 1879년 8월, 아내가 될 미국인 패니 오스본을 만나기 위해 미국행 이민선에 탑승했다. 미국까지는 배에 타서 이동하고, 그 후에는 기차를 타고 미국을 횡단하게 된다. 여행 과정에서 그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만났고 이를 기록했다.

스티븐슨의 여행 기록에 따라, 이 책은 총 두 가지 종류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영국에서 배를 타고 미국에 가기까지의 여정인 '아메리카행 이민선'이고, 나머지 하나는 미국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미국 서부로 가는 여정인 '대평원을 가로지르며'이다. 앞부분에서는 배에서 만나는 다양한 삶이 주제가 되고, 뒷부분에서는 기차 여행에서 목격한 미국의 자연 환경과 사람들의 행동 묘사가 주로 언급된다.

놀랍게도, 이 책은 살아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고 한다. 스티븐슨이 노동 계급의 사람들과 만나 가까이 지낸 것이 중산층 계급인 친구들과 가족들의 정서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넉넉한 집안의 사람인데 노동자들과 어울려 여행을 하고 그 사람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쓰인 것이 당대 사람들에게 심적인 충격이 되었다. 스티븐슨의 아버지 역시 이 책의 내용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고 하니 그 충격의 정도가 몹시 심했던 모양이다.

스티븐슨은 배에 타는 과정에서, 책상이 필요했기에 3등실은 선택하지 않았고, 대신 돈을 많이 쓸 이유도 없으니 2등실을 선택한다. 2등실은 3등실과 책상의 유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것이 같았다. 그는 3등실 사람들과 어울리며 환기가 잘 되지 않아 불쾌하고 탁한 공기, 차와 커피 등을 마시며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이 관찰의 묘사가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스티븐슨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지를 살펴본다. 인물의 옷이나 외견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대신 인물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에 대한 패턴을 파악하고 타인의 모습을 살피고 기록했다. 선박은 경제적 여유에 따라 선실의 등급이 나뉘어 있었고, 1등실과 다른 선실의 차이는 극명했기에 어느 정도 계급 구조의 축소판으로 그려진다.
 
이렇듯 즐겁고 훈훈한 풍경 사이로 1등실 승객 세 명이 나타났다. 신사 한 명과 숙녀 둘이었다. 그들은 품위라곤 없이 오만하게 킥킥거리며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중략) 나는 사회문제에 있어 별로 급진적이지 않으며, 언제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만큼이나 선하다는 생각을 키워왔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당혹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려고 애쓰는 모욕적인 처사는 참으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55~56P
 
그가 배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노동 계급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생산적이지 못한 취미나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이에 대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해가 되는 습관을 제대로 고치지 못하면 국가를 바꾸어 이민해도 그저 하늘만 바뀌는 것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노동자가 굉장히 고된 삶을 살고 그들에게 거부하기 힘든 자극들이 인생에 걸쳐 계속해서 유혹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들이 성실한 삶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다.

또한 스티븐슨은 기차에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인에 대해 불쾌하고 더럽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스티븐슨이 만난 중국인들은 자신의 청결에 꽤 신경을 많이 썼기에 서양인들보다 자주 닦는 것으로 묘사된다.

스티븐슨은 19세기를 살다가 간 사람이고, 20세기는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 책에서 사람들을 발견하고 알게 된 사실에 대해 나름의 평을 하는데, 시대상을 감안할 때 탁월한 식견을 보인다. 그는 옛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만난 사람들의 가치를 직접 관찰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그동안 넉넉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예의와 인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계급과 상관없이 고유의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새기게 된다.

여행기인데 좁은 공간인 선박과 기차에서 사람을 관찰한 기록이 많다는 점에서 낯선 것에 대한 환호보다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가지는 특징에 대해 고찰하게 만드는 책이다.

아메리카행 이민선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은이), 윤사라 (옮긴이), 꾸리에(2019)


태그:#스티븐슨, #아메리카, #이민, #선박,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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