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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부터 다시 군산 한길문고 상주작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작가회의가 운영하는 '2019년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로 일합니다. 문학 코디네이터로 작은서점의 문학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자리를 만듭니다. 이 연재는 그 기록입니다. - 기자말
 
 글 쓰는 산악인 김준정씨
 글 쓰는 산악인 김준정씨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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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가볍고 잽싸다. 실체보다 먼저 사람들에게 스며든다. 무심한 사람들도 막 흔들어 본다. 실금이 간 사람들의 마음을 억지로 벌린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다. 이것의 정체는 소문. 반듯한 서가로 둘러싸인 한길문고에도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들었다.

"그 사람은 책을 아주 많이 읽어요."

호감을 주는 이 소문의 주인공은 김준정씨. 월요일 오전마다 책 읽는 친구들과'인문학 대피소'라는 독서모임을 한다고 했다. 밥벌이를 해야 하고, 운동할 시간을 따로 내야 하고, 책을 더 많이 읽고 싶은 준정씨는 아무리 늦게 자도 일찍 일어난다고 했다.

새벽에 러닝머신을 타며 <사피엔스>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었던 준정씨를 나는 지난해 11월에 알게 됐다. "글을 좀 잘 쓰고 싶어서 왔어요."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낮추는 것 같았다. 어떤 글을 써올까? 당연히 나는 기대를 품었다.

때로 소문이라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가. 준정씨가 숙제로 낸 글을 읽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되게 겸손하시네." 책을 많이 읽은 티가 안 났다. 필력은 안 늘어도 준정씨는 수업에 꼭 왔다. 쓸 데 없어 보여도,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을 웃기려는 드립은 매력 있었다. 무결석과 유머는 내가 추구하는 태도여서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정성을 들인 만큼 나아지지 않는 글쓰기. 열서너 명이서 시작한 '한길문고 에세이 쓰기 1기' 회원은 계절이 바뀌면서 절반으로 줄었다. 준정씨 글은 그때서야 사람들 마음에 가닿았다. 깡깡 언 땅을 뚫고 나온 새싹 같았다. 마침맞게 3월, 움츠리고 걷다보면 봄볕을 받은 등이 따스했다.

아파트 대출 이자 50만 원과 상가임대료 150만 원을 버거워하면서도 어떻게든 자기 일을 꾸려가던 준정씨는 영화 <소공녀>를 보았다. 좋아하는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월세방을 나온 주인공 '미소'에 대한 글을 썼다.

잘 곳이 필요한 미소는 달걀 한 판을 사들고 커다란 트렁크를 끌며 옛 친구들을 찾아간다. 궤도에 안착한 것처럼 보이는 미소의 친구들은 아파트에 살고, 대기업에 다니고, 가족이 있었다.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준정씨는 그 친구들에게서 자신을 보았다. 평생 남들 하는 대로 따라 살면서 한탄하기 싫으니까 결단했다.

"18년째 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해왔는데 글 쓰는 일을 '연습'하기 위해서 우선 '그만두기'부터 하려고 한다. 앞에 몇 줄 읽어봐서 눈치 챘겠지만 필력이라고 하면 우스운 이 솜씨로 말이다."
  
 글 쓰는 산악인 김준정씨
 글 쓰는 산악인 김준정씨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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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정씨가 밥벌이를 완전히 접은 건 올해 6월 1일이었다. 하필 나도 그날부터 백수가 됐다. "작가님, 산에 가요." 날마다 근육 운동을 하는 산악인 준정씨는 훅 치고 들어왔다. 히말라야에 끌고 갈 수도 있는 사람이 동네 뒷산에 가자고 했다. 마수를 피할 길이 없어서 내변산 남여치 산행에 따라나섰다.

나는 월명암으로 들어가기 전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짙어지는 나뭇잎들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게 청량했다. 준정씨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살랑살랑 이는 바람과 새 소리를 동영상으로 기록했다. 우리는 땀 흘린 뒤에 말개진 얼굴로 바위에 앉았다. 능선을 보며 차가운 캔 맥주를 나눠 마셨다.

"헐! 한글 타자 못 친다고요? 몇 달 동안 에세이 숙제는 어떻게 쓴 거예요? 78년생인데 학교 다닐 때 리포트를 손 글씨로 썼어요? 학원 업무 처리는 누가 대신 해준 거예요?"

젊은 사람에게 계속 질문을 퍼부으면 못나 보이는데 내가 준정씨한테 그러고 있었다. "디지털에 약하다"고(한글 자판 치는 건 디지털이 아닙니다만) 쿨하게 말하던 준정씨는 백수 된 김에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있다. 그녀 삶의 루틴인 근육 운동, 책 읽기, 글쓰기, 등산에 디지털 수련 활동이 추가되었다.

오랫동안 생업에 종사한 사람들은, 밥벌이가 빠진 일상에서 바로 균형을 잡지 못한다. 미뤄두었던 취미 생활을 하고 여행을 다니면서도 별안간 시무룩해진다. 주어진 자유를 손에 쥐고도 안절부절 못하다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순간이 온다. "놀면 뭐 하냐?" 새로운 일거리를 돌파구로 삼으면서 힘을 낸다. 준정씨도 그랬다.
   
 한길문고에서 '수학복근 키우는 공부법'이라는 강연을 한 김준정씨. 18년간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한길문고에서 "수학복근 키우는 공부법"이라는 강연을 한 김준정씨. 18년간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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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정씨는 '16년간 온갖 인맥을 쌓아온 쓸쓸 김병만 선생'보다 2년 더 수학을 가르쳤던 사람. 한길문고에서 젊은 엄마들에게 '수학 복근 키우는 공부법'이라는 강연을 했다. 수학 문제 풀어주는 앱을 알려주면서 아이들에게 숟가락으로 밥 떠먹이듯 가르치지 말라고, 모르는 문제는 풀이과정을 그대로 써보게 하라고 권했다.

내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저녁이 있는 삶'. 준정씨는 해 질 녘이면 슬리퍼를 끌고 동네를 거닐었다. 불과 몇 달 전 일이니까, 입시 학원에서 일하던 때도 생생했다. 학교 마치고 온 학생들과 문제지를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일했던 저녁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자신이 인생의 어느 시간대에 서 있는지 자주 가늠해 봤다.

"지금이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다. 18년간 해오던 일을 정리한 이 시간이 하루의 해가 지는 저녁같이 느껴진다. 아직 내일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에는 이르고 그저 하루를 잘 마무리 했다는 안도감을 가지는 데 집중해야 할 것 같은 시간."
 
 작가 강연회는 준정 씨에게 활력을 주는 것 중 하나. 한길문고와 우리문고, 예스트서점에서 진행하는 강연회에 꾸준하게 참석했다.
 작가 강연회는 준정 씨에게 활력을 주는 것 중 하나. 한길문고와 우리문고, 예스트서점에서 진행하는 강연회에 꾸준하게 참석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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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강연회는 저녁밥을 차려먹고, 읽던 책을 마저 읽고, 글을 쓰고, 잠자리에 드는 준정씨에게 활력을 주는 것 중 하나. 한길문고와 우리문고, 예스트서점에서 진행하는 강연회에 꾸준하게 참석했다. 앞자리에 앉아서 작가와 눈을 마주치고 메모를 했다. 강연회를 빛내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몰입했다.
  
<빈센트, 나의 빈센트>를 쓴 정여울 작가가 자기 내면의 희열을 따르라(follow your bliss)고 한 말을 되새기며 울먹였다. <체공녀 강주룡>을 쓴 박서련 작가가 '생활'은 사치이고 '생존'만이 필요했던 시절을 들려주자 목이 멘 채로 질문을 하다가는 눈물을 쏟았다.

"글을 쓴다는 것, 작가가 된다는 것. 그저 꿈으로만 남아있을 줄 알았다. 애초에 대단한 결심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이었을까? 한참을 울고 나니 머릿속이 맑게 갠다."

준정씨는 짧게라도 강연 후기를 남겼다. 노트북 자판도 완전히 익혀서 자유자재로 글을 쓴다. 자기관리가 철저한 것 같아도, 혼자 술을 자주 마시고, 잘 울고, 화도 잘 내는 사람이라는 것도 드러낸다. 글을 쓰고 나면, 질퍽거리는 감정에 빠지거나 끌려 다니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읽고 쓰며 다시 인생의 성장기에 들어선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뿌듯하다.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해도 경청한다. 그런 자세 때문에 준정씨의 계략에 걸려들고 말았다. 눈도 안 떠지는 새벽에 일어나서 지리산에 간 거다. 성삼재부터 일곱 시간을 걸어서 피아골로 오는 코스. 다리가 풀릴 뻔 했지만 무사히 내려왔다. 산행도 글쓰기처럼 자기 힘으로 끝마치는 거였다.
 
 지리산 피아골 대피소에서 먹은 늦은 점심. 김준정씨는 고기를 굽고, 찌개를 끓이고 커피까지 끓여주었다.
 지리산 피아골 대피소에서 먹은 늦은 점심. 김준정씨는 고기를 굽고, 찌개를 끓이고 커피까지 끓여주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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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대각산 월영봉에서 보는 달빛이 눈을 시리게 할 정도로 밝다네요(또 작업하는 중)."
 
   
지리산 다녀오고 사흘 뒤에 준정씨는 카톡을 보내왔다. 나는 온 삭신이 아파서 똥 싼 바지 입은 사람처럼 걷는 중이었다. "싫어요"라고 거절하면 되는데 그 말이 안 나왔다.

준정씨는 10월에 지적장애인들과 같이 히말라야에 간다. 여름 내내 격주로 훈련했고 그 과정을 글로 썼다. 멀고 웅장하고 높은 산에 갔다 와서는 더 유쾌하고 속 깊은 글을 쓰게 되겠지. 그러니 달빛 산행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히말라야 희망 원정기'를 읽은 뒤에 결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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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립청춘>, <소년의 레시피>, <서울을 떠나는 삶을 권하다>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