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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생가 내 시인이 거주하던 방. 생전 때 생가의 주소는 동남리였는데, 지금은 신동엽길 12로 바뀌었다.
▲ 시인의 방 복원된 생가 내 시인이 거주하던 방. 생전 때 생가의 주소는 동남리였는데, 지금은 신동엽길 12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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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 충남 부여 낙화암을 둘러본 다음 읍내 주택가에 자리 잡은 '신동엽문학관'을 찾았다. 위치를 헷갈려하다가 길가에 모여 있던 여고생들에게 물어보니 가 본 기억을 되살리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정겨운 느낌으로 복원된 생가가 먼저 필자를 맞이해주었다. 시인이 쓰던 방. 문학지와 노트, 밀짚모자가 놓인 앉은뱅이책상이 방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담백한 방 풍경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1962년 낙화암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오른쪽 윗부분에 "그렇다고 서둘고 싶진 않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 문학관 외벽에 걸린 시인 사진 1962년 낙화암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오른쪽 윗부분에 "그렇다고 서둘고 싶진 않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 박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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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옆 문학관 마당에 들어섰다. '신동엽문학관'은 부여가 자랑하는 건축물이다. 건축가 승효상이 시인의 시 <산에 언덕에>를 모티프로 설계했다고 한다. 정갈한 내부 전시관과 기묘한 형태의 옥상 정원이 다른 문학관과 차별성을 띠고 있다.

건물 외벽에 "그렇다고 서둘곤 싶지 않다"라는 문구가 적힌 시인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산문 <서둘고 싶지 않다>는 중간 부분에 "내 인생만은 (바삐 서둘지 않고) 조용히 다스려보고 싶다."라는 소망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내 인생을 시로 장식해 봤으면 / 내 인생을 사랑으로 채워 봤으면 / 내 인생을 혁명으로 불질러 봤으면 / 세월은 흐른다 / 그렇다고 서둘고 싶진 않다"로 끝난다.

<껍데기는 가라>와 같은 강한 어조의 시들이 시인의 시 세계 중심을 이룰 줄 알았는데, 시인은 차분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산문시 1>의 내용을 알기 쉽게 풀이해 놓은 글이다. 읽고 나면 시인이 시에서 추구한 세상을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 <산문시 1> 해설 글 <산문시 1>의 내용을 알기 쉽게 풀이해 놓은 글이다. 읽고 나면 시인이 시에서 추구한 세상을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 박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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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신동엽문학관'에서 감탄하며 보았던 것은 신동엽 시인이 1968년에 발표한 <산문시 1>이라는 시다. 좀 길더라도 크게 본인의 심금을 울린 시라 전부 옮겨 적어 소개한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거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스칸디나비아' 하면 보통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을 일컫는다. 그런데 덴마크는 오랫동안 잉글랜드, 노르웨이, 스웨덴을 지배한 호전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반면 노르웨이는 20세기 중반 자국에 외국군의 기지를 두지 않는 정책을 취했고 약자를 보호하는 복지 정책을 펼쳤다. 스웨덴 역시 제2차세계대전 때 매우 유연한 중립정책을 취했고 우수한 복지국가로 성장했다(『북유럽;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랜덤하우스) 참고). 이런 사실로 볼 때 신동엽이 말하는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노르웨이, 스웨덴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올해는 신동엽 시인이 별세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다양한 행사들이 '신동엽문학관' 등지에서 열리고 있다. 올해 나온 『신동엽 산문전집』에서 편자들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작년 '도보다리' 대화를 언급한다. 그리고 이런 평화를 위한 노력의 의미를 설명하며 신동엽 시인도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이라는 시에서 (비무장지대라 추측되는 곳을 가리켜) '중립지대'라는 표현을 썼음을 언급하고 있다. 바로 신동엽 시인이 바라고 바라던 스칸디나비아라는 곳의 유토피아적 모습을.

기사를 쓰고 나서 관련 자료를 검색하다 안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6월 스웨덴 스톡홀름 의회 연설에서 신동엽 시인의 바로 이 <산문시 1>을 언급했다는 점을.
 
전남 보길도 망끝전망대에서 찍은 석양 사진.
▲ 석양 풍경. 전남 보길도 망끝전망대에서 찍은 석양 사진.
ⓒ 박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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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대통령은 현재 우리가 가질 수 없는 대통령이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하고 악전고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겐 그런 시대를 꿈꾸는 대통령이 있다고 생각한다.

주제넘게 문학과 문학인으로서 신동엽을 소개하지는 못한다. 문학관을 관람하며 그가 남긴 글에서 꿈같은 세상을 보았고 그걸 같이 염원하는 마음을 가져볼 따름이다. 또한 많은 이들이 신동엽 시인처럼 그런 세상을 추구하되 서둘지는 않았으면 한다.

태그:#신동엽, #신동엽문학관, #산문시, #석양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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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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