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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옛날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유배 간 죄인 아닌 죄인들에게 진도 울돌목은 절대로 건널 수 없는 ‘상심의 바다’였을 것이다. 1984년 해남과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가 개통되어 진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연간 250만 명이 찾는 말 그대로 ‘보배의 섬’이 되었다.
 먼 옛날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유배 간 죄인 아닌 죄인들에게 진도 울돌목은 절대로 건널 수 없는 ‘상심의 바다’였을 것이다. 1984년 해남과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가 개통되어 진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연간 250만 명이 찾는 말 그대로 ‘보배의 섬’이 되었다.
ⓒ 진도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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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남도 땅 끝자락에 자리한 섬, 진도(珍島)는 '보배의 섬'이라는 그 이름과는 달리 정치범이나 왕족 출신의 죄인들이 귀양살이하는 '유배의 섬'이었다. 한양으로부터 천리 먼길 떨어져 있고 울돌목의 거센 물살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절해고도(絶海孤島), 진도는 눈엣가시 같은 정적들을 가둬두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천혜의 유배지'였다

왕실을 둘러싼 반란이나 당파 싸움으로 한바탕 피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뒤끝에 진도는 권력투쟁에서 패퇴한 '죄인 아닌 죄인'들로 넘쳐 났다. 오죽했으면 조선 영조 때 한 전라 감사는 "유배 온 죄인들 뒤치다꺼리하다가 진도사람들이 다 같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이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감(移監)시켜 달라"는 상소문을 올렸을까.

흔히들 진도를 일컬어 '유배문화'가 발달된 고장이라고 한다. 비록 권력 투쟁에서는 밀려났지만, 자신들의 철학과 학식을 갖춘 지체 높은 왕족과 선비들이 진도로 유배 와서 남도의 문화·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 상당 부분 공감이 가는 얘기다.

공감의 근거를 찾아 이야기는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잡은 북인들은 왕의 친형인 '임해군'에게 역모의 누명을 씌워 진도로 유배를 보낸다. 이때 임해군은 처조카였던 양천 허 씨(陽川 許氏), 허대(許垈 1586~1662)와 함께 진도로 내려온다. 훗날 임해군은 강화 교동도로 옮겨져 사약을 받게 되지만, 허대는 임해군을 따라가지 않고 그대로 진도에 눌러앉아 정착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후예, 허대의 진도 정착은 결과적으로 훗날 태어난 후손들의 면면을 봤을 때 탁월한 선택이었다. 진도에는 400여 년 전 정치적 희생양이 된 비운의 왕손, 임해군과 함께 내려왔다가 정착한 양천 허 씨 후손들이 자자손손 대대로 예술혼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있다.
 
 진도 양천 허씨 200년 예술혼의 결정체 ‘운림산방’은 한국 남종화의 산실이다. 소치 허련을 필두로 하여 일가 직계로 내리 5대째?걸출한 화가 들를 배출 하며 한국 최고의 화맥을 이어가고 있다. 무등산 기슭에서 예향 광주의 뿌리가 된 의재 허백련도 소치 허련의 방계 손이다. 대한민국 명승 제80호
 진도 양천 허씨 200년 예술혼의 결정체 ‘운림산방’은 한국 남종화의 산실이다. 소치 허련을 필두로 하여 일가 직계로 내리 5대째?걸출한 화가 들를 배출 하며 한국 최고의 화맥을 이어가고 있다. 무등산 기슭에서 예향 광주의 뿌리가 된 의재 허백련도 소치 허련의 방계 손이다. 대한민국 명승 제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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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국가 명승 제80호로 지정된 진도군 의신면에 있는 '운림산방 (雲林山房)'이 그곳이다. 진도 양천 허씨 200년 예술혼의 결정체 운림산방은 조선 말기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이 50세가 되던 1857년에 고향 진도로 돌아와서 지은 화실의 당호(堂號)다.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난 소치 허련은 32세가 되던 해에 해남 대둔사에 거처하던 초의선사의 천거로 운명의 스승,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만난다. 추사는 허련에게 중국 원나라 4대 화가 중 한 사람인 '대치(大癡) 황공망에 견줄만하다'고 해서 '소치(小癡)'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추사 김정희의 후원으로 왕실을 제집 드나들듯 하며 헌종의 총애를 받던 소치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 정약용의 아들 정학영, 민영익 등과 교유하면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다. 그러던 중 1856년 스승 추사가 세상을 뜨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와 은둔하며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여생을 그림에 몰두한다.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을 필두로 하여 일가 직계로 내리 5대째 걸출한 화가 들를 배출 하며 한국 최고의 화단을 이어가고 있다. 2대 미산 허형(米山 許瀅 1861∼1938), 3대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8∼1987), 4대 임전 허문(林田 許文 1941∼), 5대 남농의 손자인 허진(許塡 1962∼)으로 이어지며 30여 명의 화가를 양성했다.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자리한 ‘허백련 춘설헌’ 의재는 만년에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25시’의 저자 게오르규, 루이제 린저 등과 교유 했다. 인근에 의재 미술관과 문향정· 관풍대· 의재 묘소가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5호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자리한 ‘허백련 춘설헌’ 의재는 만년에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25시’의 저자 게오르규, 루이제 린저 등과 교유 했다. 인근에 의재 미술관과 문향정· 관풍대· 의재 묘소가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5호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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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기슭, 춘설헌(春雪軒)에 터를 잡은 의재 허백련

200여 년 동안 한국 최고의 예맥(藝脈)을 이어가고 있는 진도 양천 허씨 가문에 특별한 또 한 사람이 있다. 소치의 손자, 남농 허건과 함께 한국 남종화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이다.

진도 운림산방을 정점으로 소치 허련이 일생동안 추구했던 남종화의 맥은 이후 두 줄기로 갈라진다. 소치의 직계(直系) 손자, 남농 허건과 방계(傍系) 손자, 의재 허백련이다. 흔히들 전라도를 '예향(藝鄕)'이라고 하는데 그 중심에 '남농 허건'과 '의재 허백련'이 있다. 남농은 목포의 유달산 아래서, 의재는 광주의 무등산 기슭에서 자연과 일체 되어 남종 문인화의 맥을 이어갔다.
 
 2001년에 개관한 의재 미술관. 무등산 증심사 가는 길목 춘설헌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 자체가 예술 작품이다. 2001년 제10회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2001년에 개관한 의재 미술관. 무등산 증심사 가는 길목 춘설헌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 자체가 예술 작품이다. 2001년 제10회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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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서 태어난 소치 허련의 방계(傍系) 손자인 허백련은 구 한말 진도로 유배 온 무정 정만조(1858~1936)의 서당에서 한학과 글씨와 시문을 배웠다. 스승 정만조는 허백련에게 '떳떳하고 의연 하라'는 의미로 '의재(毅齋)'라는 호를 지어 준다.

이때 의재 허백련은 문인화가로서의 기본적 역량을 갖추게 된다. 묵화의 기본은 운림산방에서 문중 할아버지인 미산 허형에게서 배웠다. 20대에 신학문을 배우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그만두고 남종 산수화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화숙에서 그림을 배웠다.

귀국 후 31세가 되던 1922년에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출품한 <추경산수>가 1등이 없는 2등으로 입선한다. 이후 내리 5년간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입선한다. 1927년 제6회 선전에 사군자인 <매월도>를 출품해 특선을 차지한다.
 
 사군자합작팔곡병 종이에 먹 각 34cm?107cm
 사군자합작팔곡병 종이에 먹 각 34cm?107cm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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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매 종이에 먹 각 33cm?130cm
 묵매 종이에 먹 각 33cm?130cm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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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화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수묵 산수화를 고집하던 의재는 제6회 조선미전의 특선을 끝으로 더 이상 선전에 출품하지 않는다. 화단의 찬사와 대중의 인기를 뒤로 한 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온다. 1938년에 시·서·화가들의 모임인 '연진회(鍊眞會)'를 발족하며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한다.

해방이 된 1945년에 무등산에서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차밭을 인수해 그 밑에 화실을 짓고 당호를 '춘설헌(春雪軒)'이라 했다. 송나라 시인 나대경이 그의 시 '약다시(瀹茶詩)'에서 읊은 "한 사발 춘설차 우려 마시니 그 어떤 맛보다 좋구나"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묵국 종이에 먹 각 33cm?130cm
 묵국 종이에 먹 각 33cm?130cm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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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 향기로웠던가"

의재는 만년에 20여 년 간을 춘설헌에 머물며 불후의 명작들을 남기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내 그림은 무등산 물로 그리고, 내 차는 무등산 물로 달인다"라고 할 정도로 일생을 무등산과 함께 했다. 무등산 기슭의 춘설헌은 '예향 광주의 태실'과도 같은 곳이다.

의재는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화가를 넘어섰다. 무등산에서 재배한 차를 '춘설차'라 이름 붙이고 "국민의 머리가 맑아야 나라가 발전한다"면서 차문화 보급에 앞장섰다. 농업학교를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으며 애천(愛天), 애토(愛土), 애인(愛人)의 삼애 사상(三愛思想)을 역설한 철학자였다. 광주 YMCA 창립 초기에 많은 기여를 하며 지역사회의 발전에 앞장서기도 했다.
 
 생전의 의재와 제자들의 모습
 생전의 의재와 제자들의 모습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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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이자 철학자이며 교육자였던 의재 허백련, 1977년 86세를 일기로 그가 타계하기 몇 달 전에 춘설헌 병상에 누워 남긴 한 마디 말이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며 많은 이들의 가슴을 치고 있다.

"요 몇 해 동안은 줄곧 건강이 나빠져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나를 따르던 제자들은 철을 가리지 않고 무등산 그늘로 병든 나를  찾아와 준다. 그들은 춘설헌 남향 방에 누운 나를 보고, 나는 그들에게 춘설차 한잔을 권한다. 나는 차를 마시고 있는 그들을 보며 내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 향기로웠던가를 생각하고 얼굴을 붉히곤 한다···"
 
 산수를 그리다 산수에 누운 의재 허백련 묘소. 두 아들 광득, 진득과 함께 무등산 기슭 춘설헌 뒤편 언덕에서 예향 광주를 내려다보고 있다
 산수를 그리다 산수에 누운 의재 허백련 묘소. 두 아들 광득, 진득과 함께 무등산 기슭 춘설헌 뒤편 언덕에서 예향 광주를 내려다보고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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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재로 초입에서 무등산을 바라보고 있는 의재 허백련 상. 광주광역시 학동에서 의재 미술관 까지의 거리를 의재로라 부른다. 운림동 아트밸리로 불리는 이 거리에 있는 크고 작은 미술관들이 예향 광주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의재로 초입에서 무등산을 바라보고 있는 의재 허백련 상. 광주광역시 학동에서 의재 미술관 까지의 거리를 의재로라 부른다. 운림동 아트밸리로 불리는 이 거리에 있는 크고 작은 미술관들이 예향 광주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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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을 사랑하고 무등에 묻힌 의재 허백련.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호남의 정취가 잘 담겨있는 그림과 글씨를 남긴 남종 문인화의 대가. 그가 머물렀던 무등산 기슭 춘설헌의 묵향과 차향은 오늘까지도 진하게 남아 예향 광주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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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