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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느 바다에 가요?"

교단을 떠나 제주살이 한 지 어느덧 6년. 주말이면 이제 일곱 살이 된 남매둥이가 묻곤 했습니다. 특히 여름이면, 파도맛 단단히 든 아이들은 수영장은 파도도 모래도 없어 심심하다며 발가락까지 새까매지도록 이 바다 저 바다에서 그저 놀고 놀고 또 놀면서 자랐습니다. 그런 저희 아이들을 서울의 친구들이 걱정했습니다.

영어유치원 안보내면 사립초등학교 가서 적응이 어렵다고도 했고, 어느 레벨의 영어학원에 가려면 또 다른 어느 레벨의 영어학원을 거쳐야 한다는 알아듣기 어려운 복잡한 얘기들도 해주었습니다. 유치원 친구가 평생 간다며 하루 빨리 강남이나 목동으로 올라와 아이들의 친구라인을 정비할 것도 충고해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가는데 아직도 한글을 안 뗐냐고 혼을 냈습니다. 원래 우리 교육과정이 초등학교 1학년 때 한글 배우고 3학년 때부터 영어 배우는 거 아니냐고 하자 초등학교 교사인 한 친구는 "너 같은 학부모가 제일 싫어. 꼭 한 반에 한 두 명씩 내가 나머지 공부 시켜야 하잖아. 빨리 00교육 시켜"라는 농담도 했습니다.

겁이 납니다. 입시위주 수업을 하고 아이들의 스펙관리도 해봤던 이로써 대학 입학문에 들어서는 그 날을 위해 어려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 모르지 않아 그렇습니다. '제주바다의 해녀할머니'와 '내 친구 한라산' 그만 그리고 어서 한글을 쓰고 덧샘 뺄셈을 하도록 가르쳐야 하는지. 태권도장 끊고 영어학원을 보내야 하는지. '잘 나가는' 사립초등학교들을 물색해야 하는 것은 또 아닌지. 놀고 놀고 또 노는 아이들을 보며 고민이 됩니다.

고민은 아이들이 커갈수록 더 깊어지겠죠. 그러다 어느 순간 저는 '정신을 차렸다'며 싫다는 아이들의 등을 떠밀어 학원에 보내고 과외를 시키고, '목적에서 벗어나 사실상 입시명문고로 기능하고 있다'고 평가해놓고 그 특목고들 중 어느 한 곳에라도 내 아이들을 입학시키기 위해 열을 올리며 정보수집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어느날 아이들이 '엄마, 난 지금 행복하고 싶어요. 나중에 대학가서 말고 나 그냥 지금 행복하면 안되요?'하고 물으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만의 고민은 아닐 겁니다. 모든 부모님들께서 같은 고민과 같은 마음의 갈등을 겪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아이가 '지금 행복'하길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요. 사랑하는 아이들이 가장 예쁜 나이에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종아리가 퉁퉁 부어 집에 오는 모습, 빡빡한 학원시간에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씹지도 못하고 후루룩 마셔버리는 모습. 그 모습들에 부모님들 모두 가슴이 미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이들의 행복을 '유보'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모두 동시에 멈췄으면 좋겠어

행복 유보의 이유에 대해. 중학생 아이를 둔 한 친구의 이 말이 참 와닿았습니다. 중고등학생 자녀의 학부모님 대부분이 아이들에게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로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것에는, 옆집 아이도 뒷집 아이도 모두가 달려가는 이상 '어쩔 수 없이 함께' 뛰어가게 된 측면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이 소모적인 경쟁을 동시에 '스톱'하지 않는 이상, '소신'을 추구하며 이상적인 교육을 펼치는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려워도 너무 어려운 일인 것이겠죠.

바로 그 때문에 저는, '교육 개혁'이 정시나 학종 어느 한 편을 택하는 '처방'에만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치료'가 없다면 겉에 암만 후시딘을 발라 봐도 며칠 지나면 또 상처는 올라오고 덧납니다. 지금껏 아픔이 계속됐다면 이제라도 정밀검사를 해서 근본문제를 뿌리째 도려내는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해야만 합니다.

강준만 교수는 <대한민국 입시잔혹사>에서 언론인 출신답게 해방직후부터 현재까지의 관련 기사들을 일일이 제시하며 우리의 입시제도가 과도한 입시경쟁과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 문제를 극복하고 공교육 정상화를 이루고자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추적합니다. 그리고 결론내립니다. 모.두.실.패. 그에 따르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해도 끝없이 악용될 뿐 단 한 번 성공한 예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도입해도 '괴물'은 기어코 제도를 왜곡하며 편법의 여지를 주고 소득격차가 교육격차를 지배하게 만듭니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일련의 교육을 모두 지배하는 저 끝에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괴물. 그에 따르면, 그 괴물의 정체는 바로 '대학 서열화'입니다.

현재 대입의 70%가 수시전형이며 이를 보다 확대할 계획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교육정의'의 관점에서 저는 이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앞선 기사에서 말씀드렸듯 만일 지금도 대학들이 사실상 '외고전형'을 운용하고 있고 내부적 '고교등급'의 기준을 갖고 있다면, 만일 지금도 특목고, 자사고들이 편법적인 신입생 선발을 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교육정의 실현을 위한 수시전형의 확대가 오히려 '교육정의'에 정면으로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등급화 앞에서 비시험전형은 수능시험에 비해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과 자녀의 상급학교 진학 간 연결고리를 단단히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사회의 계층과 계급은 보다 공고해질 수 있습니다.
 
 23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에서 고려대 학생들이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자녀 ‘특혜 논란’ 진상규명 집회를 열고 있다. 학생들의 정치색 배제 요구에도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도 참석했다.
 8월 23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에서 고려대 학생들이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자녀 ‘특혜 논란’ 진상규명 집회를 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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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정시전형을 확대하자고요? 교육정의를 희생시켜 공정성이라도 담보하자는 정시의 논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가 적지 않지만 그래도 저는 이에 반대합니다. 외고전형, 고교등급제, 중학교등급제 등등 비시험전형에는 위험요소들이 있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대안이 존재하는 한 교육정의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안은 '정면승부', 즉 대학서열화라는 괴물과 정면으로 맞장을 뜨는 것입니다.

전국의 대학들이 모두 평평해져, '간판'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정말 특정 학과의 대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이들만이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면 위 비시험전형의 위험요소들이 일거에 해소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대학서열화 폐지 앞에서, 진정 필요한 공부가 아닌 시험만을 위한 공부, 비인간적인 경쟁적 교육과 청소년기의 과도한 학습노동, 각 가정의 사교육비 부담 등의 수많은 문제들도 함께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대학서열화 폐지가 있어야 특목고와 자사고의 교육도 진정 그 목적대로 실현될 수 있을 겁니다.

'니 말이 맞다 치자. 그러나 대안이란 모름직 현실성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게 대체 실현가능한 얘기냐.'고 하신다면, 저는 '대통령의 공약'을 돌아봐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공약 중엔 '한국대학'과 '특목고, 자사고 폐지'가 있었습니다. 한국대학이란,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 국공립대학을 통합한 대학의 이름입니다. 정부는 이를 잊지 않았으리라 믿습니다. 또 현재 이상민 의원과 김형태 전 서울시의원 등을 중심으로 비슷한 맥락이라 여겨지는 '서울대 폐지'에 관한 입법노력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전현직 선생님들, 학부모님들로 구성된 시민단체의 많은 노력이 있습니다. 이 노력들이 성공한다면, 정부가 약속을 지켜준다면, 촘촘한 계단의 수가 일단 한층 줄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한국대학'이 사립대학들을 점차 흡수해나간다면 결국 전국의 대학들이 모두 평평해질 수 있을 겁니다.

'목적 위반을 하는 한' 특목고, 자사고 폐지에 저는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대학서열화 폐지 앞에선 이들을 굳이 일반고로 전환할 이유조차 없게 됩니다. 일단 대학들이 그 학교들의 학생들을 실질적으로 우대하는 일 자체가 없을 테니 그렇습니다. 또 그 때에도 본래의 설립 목적대로 교육과정을 운용하지 않고 회화시간에 수능 과목 보충수업을 하는 등의 편파적 시간표 운영 등이 있다면 모르긴 몰라도 아이들 스스로 그 수업들을 거부할 겁니다. 명문대 개념 자체가 사라진 상황에서 '오로지 외국어 특성화 교육을 위해' 입학한 아이들로서는 시간표의 편법적 운용은 납득불가 자체일 테니까요. 또 자사고는 더 이상 국영수(언수외) 수업 중심의 교육이 자율적 교육이라고 포장할 이유도 없이, 처음 도입시의 그 취지 그대로 창의, 과학, 예술, 토론, 환경 등의 다양한 영역을 위한 자율성을 펼칠 수 있을 겁니다.

바보야, 문제는 '평등'이야

법무장관 후보자의 자녀가 고교 시절 의과대학 논문에 제1저자로 이름올렸단 소식에 청년들은 분노하며 촛불을 들었습니다. 촛불의 이면에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기회'를 활용했으니 '공정하지 못하다'는 분노가, 더 깊숙한 이면에는 '이곳은 그렇게 쉽게 들어오는 곳이 아니다, 나는 너무도 힘겨웠다'는 억울함과 아픔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무리 그가 논문작성에 참여했고 봉사활동을 한 바 있더라도 실체적 진실이 무엇이든 그 논문이 '제1저자'로서, 봉사가 '총장 표창장'으로서 보다 높이 점수화되어 누구나 가고 싶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명문대학과 전문전문대학원 입학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불공정하다는 청년들의 주장은 일응 이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관하여 멀리 노르웨이에서 들려오는 말들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왜들 그걸 갖고 다투는지 모르겠다. 나는 연구실에서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지만 청소노동을 하는 노동자보다 월급이 좀 많다.(소득세를 공제하고 나면 큰 차이는 없겠지만.) 그러나 그의 자녀도 나의 자녀도 동급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적어도 그 점에서 그는 나에 관하여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언론이나 페북에서 발견되는 그의 글들에선 이런 맥락이 읽혔습니다. 그리고 이는 간단한 한 문장으로 전환가능할 듯 합니다. '바보야, 문제는 '평등'이야'라는.

좁은 자리, 촘촘한 계단의 좀 더 높은 지점, 저급하게 말해 '밥그릇'을 두고 당신이 그곳에 있는 곳은 공정하다 아니다를 두고 싸우는 우리의 모습이, 자리가 넓고 평평해서 밥그릇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지구 반대편 나라의 그에게는 참으로 답답하게 보인 겁니다. 자리 자체를 넓히자고, 밥그릇을 모두에게 주자고, 그렇게 교육 자체를 사회 자체를 바꾸자고 도통 진짜 필요한 목소리들은 내지를 않고들 있으니.

북유럽의 나라들은 대학 진학이 '무시험전형'입니다. 대학의 서열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학과에 시험 없이 입학 가능합니다. 때로 지원자가 입학정원보다 많은 곳에선 부득이 시험을 보기도 하지만 네덜란드의 경우 이 때에도 추첨으로 결정합니다. 누군가의 시험 잘보는 기술은 그의 타고난 유전자, 사회경제적 배경과 같은 우연적 요소가 개입되었을 것이라고 여기기에 이곳에서는 추첨에 의한 입학자 결정은 전혀 공정한 방법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북유럽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우리와 다릅니다. 부자들은 높은 소득세율에 불만이 없고, 육체노동은 정신노동보다 고귀하게 평가됩니다. 직업에 귀천이 '정말' 없어 변호사가 교사보다 좁은 집에 살아도 희안한 일이 아니니 '사'자 직업은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 자체가 아닙니다. 딱딱한 법을 굳이 공부하겠다는 사람만 법조인이 되고, 수술실의 끔찍한 긴장과 끊임없이 마주쳐야 하는 아픈 얼굴들을 굳이 견디겠다는 사람만 의사가 됩니다.

우리에게 북유럽 이런 얘기들은 그야말로 딴 나라 얘기입니다. 충격적이기까지 한 북유럽의 '평등 제일주의'는 정말이지 겨울'동화'같기만 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선, 재벌들이 자녀에게 막대한 재산을 자회사인 놀이동산을 활용해 상속세 부담 없이 증여해도 그 불법성에 대해 대형로펌들이 '쉴드'쳐주면 판느님들은 그 쉴드가 옳다고 해주고, 이에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와 '공정하지 않다'며 울분을 터뜨리지 않습니다. 소수의 '사'자 직종의 종사자들이 일반인들에 비해 수입수준이 높다 해도 이는 그들의 '시험 잘보는 능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일뿐 부럽긴 해도 분노할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평범한 우리들로서는 피라미드 사회를 인정한 채 내 아이만이라도 사다리를 오르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내 아이가 나와 같은 비정규직은 아니고, 나와 같은 영세자영업자는 아니고, 나와 같이 직장에서 짤리지 않기를 바라고 전세값이 그만 오르길 바라며 마음졸이고 살지 않기만을 바라며.

그래서 우리에겐 먼 곳의 나라들이 '사'자 직업을 선망하지 않건 말건, 무시험전형을 하건 말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밥그릇이 한정되다 못해 아주 없어지게 생긴 지금, 우리로서는 누가 선점할지에 관한 '게임의 법칙' 그것만이 목숨을 건 관심사, 촛불을 들어야 할 이유일 뿐입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성공은 성적순이야!

촛불 속에서 노르웨이의 한국학 교수의 목소리만큼 의미심장하게 떠오른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의 어느 등교일이었습니다. 교문 앞에 육성회 엄마들이 모여 계셨고 교장선생님과 나이 많은 여러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빨리 들어가라고 제촉하고 계셨습니다. 무슨 일인지 당황하며 두리번거리는데 자세히 보니 엄마들 뒤에 또다른 모습의 우리학교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은 하나같이 벌개진 눈으로 그저 우리를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다.

1교시부터 '자습'이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선생님들이 수업에 들어오질 않으셨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가 좋아하는 선생님들'만. 그분들은 대부분 특이한 수업을 하는 젊은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총각 선생님'이 새로 온단 소식에 한껏 꿈에 부풀었던 우리 여중생들의 기대를 단번에 박살낸 촌스럽기 그지없던 국어 선생님은 더듬거리며 말할 때마다 입가에 하얀 거품까지 일어 별명이 '보글이'였습니다.

보글이 선생님은 멋지진 않았지만 보글이 선생님의 수업은 멋졌습니다. 각자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해보는 수업. 국어교과서 속 소설 '큰 바위 얼굴'을 배운 뒤 '나의 큰바위 얼굴은 누구인가'란 주제로 3분스피치를 하는 수업. 이렇게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때 제가 그렸던 그림, 몇몇 친구들의 발표 내용이 기억날 정도로 그 수업들은 저희에게 있어 처음 맛보는 강렬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사회 선생님은 소주제별 발표수업을, 도덕 선생님은 우리가 정한 다양한 주제들로 매시간 토론수업을 진행하셨습니다. 고입 연합고사가 있던 시절임에도 그분들은 시험대비 주입식 교육을 하질 않으셨습니다. 저희는 그 수업들이 좋았습니다. 점심시간에도 운동장에 모여앉아 '어린왕자가 뱀에게 물려 쓰러진 것이, 죽은 것인가 장미꽃이 기다리는 별로 돌아간 것인가'를 두고 토론을 벌일 정도로 그분들의 수업방식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들만 교실로 들어오질 못하게 되신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나이 많은 국어 선생님을 통해 우리는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아니,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고? 시장에서 콩나물 팔면서도 행복할거면 그래 공부하지 마! 양심이 있어야지. 성공은 성적순이고 성공해야 행복한 건데 무슨 놈의 참교육이란 거야?"

대충 이랬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성공은 성적순'이라거나 '콩나물'에 힘주신 것만은 또렷합니다. 그제야 우리는 알게 됐습니다. 보글이 선생님이 우리가 '노래해! 노래해!' 하고 조른 날 '솔아 솔아 푸른솔아'(대학에 들어와서야 그 노래 제목을 알게 됐습니다)를 부르신 뒤, 시험만을 위해 대학만을 위해 공부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당시 화제였던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엄마, 난 나중에 말고 지금 행복하고 싶은데. 왜 난 지금 행복하면 안되지? 나는 공부하는 기계가 아닌데.' 하며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게 하는 지금의 교육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며 긴 얘기들을 해주신 것이 '우리가 좋아하는' 선생님들을 닫힌 교문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게 한 이유라는 것을.

'아직 만나지 못한 세상, 교육평등 노동평등 세상'을 다시 한 번 꿈꿉니다

교단에서의 어느 날, 그러니까 수능기출문제집으로 진도를 나가고 아이들의 스펙쌓기를 도우며 그것이 나의 최선이라 믿으며 살던 어느 날에도 그 중학교 시절이 떠올렸습니다. 우리학교 고3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얼마 뒤 인근 다른 특목고의 고3 아이가 또 같은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기사 한 줄 나지 않아 세상이 알지 못했던 그 비극 속에서 학교장이 이례적인 아침 방송을 통해 그 아이는 '가정 문제로 비극적 선택을 한 것'이었다고 굳이 강조를 하고, 교무실에 와 교사들에게 '그러니 동요하지 말고 면학분위기를 조성할 것'을 단도리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교문 밖에서 벌개진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보글이 선생님. 노동의 가치를 비하까지 하며 성공은 성적순이라던 나이 많은 국어 선생님. 그 날 저는, 나는 그들 중 어느 쪽에 서있나 생각해보았습니다.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보글이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저는 보글이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

보글이 선생님은 벌써 정년퇴직을 하셨을 겁니다. 중학생이었던 저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적어도 '근본적'으로는.

중학교 시절 그 선생님들이 만들어주실 줄 알았던, 또 이후 사범대학 시절 제가 만들고 싶었던, '명문대학을 위해 모든 것을 참지 않아도 되는 세상', '만나보지 못한, 만나고 싶은, 또 다른 세상'을 저는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저는, 그런 기대를 품은 어린 시절이 또 같은 의지를 품은 초임 교사 시절이 있었는지 기억도 못할 만큼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게 청년들의 촛불은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반쯤 잊었고 반쯤 포기했던 꿈들을 떠올리게 해주었습니다. 촛불과 관련해 북유럽에서 들려온 한 한국학 교수의 목소리는, 오랜만에 떠오른 그 젊었던 선생님들의 모습은, 다시금 '만나보지 못한, 만나고 싶은, 또 다른 세상', 그러니까 교육과 노동에 있어 '평등'이 실현되는 세상에 대한 꿈을 꾸게 해주었습니다.

대학서열화 폐지. 과연 가능할까. 양극화가 극에 달한 우리사회에서 평등한 노동시장이 과연 실현가능할까. 또 노동시장이 불평등한데 어떻게 대학이 평등해질 수 있을까. 부족한 저로서는 주장을 펴면서도 세부적 쟁점들에 대한 탄탄한 논거들은 솔직히 미흡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저는 양자가 모두 실현가능하며 어느 편이 다른 편의 필수적 선행조건은 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닭이건 달걀이건 무엇이라도 먼저 적극추진된다면 다른 편도 함께 동력을 얻고 평평한 노동시장, 평평한 대학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니, 제대로 논쟁이라도 벌어지길 바랍니다. 촘촘한 계단이 불변의 진리인양 이는 문제 삼지 않고 공정성 논의만 할 것이 아니라, '한국대학'을 시작으로 전국의 대학들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그 앞에서 중고등학교 서열화가 더 이상 정당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 자체가 가능할 수는 없는지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왕에 터져나온 교육적 논의를 보다 확장시켜 국회의 시간, 검찰의 시간, 그리고 대통령의 시간을 지나 이제는 '교육의 시간'이 펼쳐지길 바랍니다. 검찰개혁은 반드시 이뤄야할 역사적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최근 그토록 뜨거웠던 이유는 바로 '교육'에 있었습니다. 지금껏 이렇게까지 입시문제에, 특목고나 자사고의 교육에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된 일은 없었습니다.

지금껏 열을 올린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논의는 계속되고 심화되어야 합니다. '대학서열화 폐지', '교육평등, 노동평등' 그에 대해서까지 논의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참으로 뜬구름 잡는 얘기로 들릴지 모릅니다. 그렇다해도 너도 나도 뜬구름 잡는 얘기들을 하며 정말 우리 아이들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주장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글을 마칠 때쯤 두 아이의 부모인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난 강화도로 갈래. 대도시에서 이 광기를 견딜 자신이 없어." 저는 답했습니다. "제주도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어. 대한민국에 사는 이상 우린 누구도 벗어날 수 없지. 북유럽으로 가거나 이곳을 북유럽으로 만들거나. 답은 그 둘 밖에 없어." 

어디서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스카이캐슬에 살지 않는 평범한 우리들로서는 '교육 광기'에 발맞춰 아이들의 행복을 유보시키고 값비싼 사교육비를 감내하고 견디는 것보다 차라리 평평한 교육, 평평한 세상을 만들어주고 물려주는 것이 보다 '남는 장사'가 아닐까요?

조악한 제 글이, 개인적 경험이란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열화된 우리 교육의 일그러진 모습들을 드러내는데 조금이나마 도움되길, 또 이에 혹 분노와 참담함을 느낀 분들이 계시다면 함께 '진짜 대안'을 추구해가길 바랍니다.   

아직은 부족한 저이지만 언제고 준비가 되면, 우리 아이들이 졸려도 학원에 가야 하는 '행복 유보'를 하지 않고 졸리면 당장 침대에 누워 그 뜬구름을 이불처럼 덮고 맘껏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노력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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