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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 작품도 수요와 공급의 경제법칙에 의거한 거래 대상의 예외 품목이 아니며 당연히 그 가치에 대한 가격이 형성된다. 특히 회화 작품은 희귀성으로 인해 가격 경쟁이 생겼을 경우 가격이 상상을 초월한 금액에 이르기도 한다.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비싸진 회화 작품을 남긴 고흐와 고갱은 생전에 큰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그들은 가난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싸우며 불굴의 열정과 의지로 무장한 채 그림을 그렸다.
 
고갱, 「언제 결혼하니」 1892년  스위스 바젤 미술관
▲ 고갱, 「언제 결혼하니」 1892년  스위스 바젤 미술관
ⓒ 스위스 바젤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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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사상 최고가로 그림이 거래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고갱의 '언제 결혼하니'가 약 3억 달러(3천272억 원)에 팔렸고 구매자는 카타르의 왕가였다. 한편 기록될만한 고가에 거래된 그림의 목록을 보면 고흐의 작품이 여럿이다. 죽기 전 거의 마지막 시기에 그렸던 '가세 박사의 초상'과 아를 체류 시절에 그렸던 '우체부 조셉 롤랭의 초상화'가 대표적이다.

고갱과 고흐는 개성이나 화가로서의 지향점과 화풍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달랐다. 고흐는 이상주의자이자 몽상가였다. 고갱은 냉혹하고 계산적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은 독창성이었다.

두 사람 모두 화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다. 둘 모두 화가의 직업이 아닌 일을 하다 뒤늦게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고전적인 회화의 전통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으며, 지배적인 유파에 몰입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거의 홀로 자신의 화법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기법들을 실험하고 습득하는 과정을 거쳐 자신만의 독창적 회화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인기 있는 화가로 성공하기보다는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독창적 화법을 모색하던 두 사람 모두에게 생존의 문제는 절박했다. 예술적 독창성을 추구하는 모든 예술가들이 예외 없이 겪는 가난과 좌절의 운명이 이들을 피해갈 가능성은 없었다. 어찌 보면 그림 그리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조건은 동생의 재정적 후원이 끊이지 않았던 고흐가 나아 보였다. 테오는 고갱에게도 가끔 돈을 붙였지만 고갱은 지속적으로 빛에 시달렸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고흐는 1869년 16살의 나이에 삼촌인 센트가 공동 소유자였던 파리의 화랑에서 미술 거래와 관련한 일을 시작했다. 나중에 해고당했지만 1876년까지 그 일을 했다. 반 고흐 집안은 미술상을 오랫동안 해왔고 빈센트라는 이름은 센트 삼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고흐는 예술적으로나 현실 생활에서 모두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하였음에도 첫 직업에서 습득한 교훈을 잊지 않았고, 항상 미술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고흐의 동생 테오 역시 16세의 나이에 화랑에서 일을 시작했고, 이후 파리에서 젊은 전위화가들의 작품을 거래하는 영향력 있는 미술상이 됐다. 테오는 고갱의 그림도 판매했다. 고흐가 아를에 도착한 후 노란 집을 임대하고 그곳을 젊은 화가들의 남부 스튜디오로 만들 생각을 한 후, 고갱을 끌어들이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테오의 재정적인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고갱은 자신의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미술은 나의 자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가 10년간 증권 거래로 큰돈을 벌었던 경험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미술 투자는 가치 있는 작품을 쌀 때 사두었다가 가격이 오르면 파는 것이 원칙으로 주식 거래와 다를 바 없었다. 고갱은 자신의 작품을 일정 가격 이상으로 유지하려 노력하며, 그 가치가 고양되는 시기를 기다렸다. 고갱과 고흐 모두 이러한 기본적인 거래 원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테오는 구필 화랑에서 새로운 경향의 미술을 취급하는 중요한 자리에 올랐다. 몽마르트의 구필 화랑에는 분리된 복층의 전시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 새로운 화풍의 그림들을 전시할 수 있었다. 이 공간을 활용해 테오는 전위적인 그림들을 거래하고 판매하는 데 성공했다. 테오는 모네와 드가의 그림에 투자해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 테오는 1887년 12월에 고갱의 그림과 도자기 전시회를 열었고, 다음 해 1월에 한 번 더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고갱의 그림을 팔았고, 자신도 구매했다.

1888년 5월에 고흐는 고갱에게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벗 고갱에게,

내가 얼마 전 아를에 방 네 개짜리 집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소. 남부에서 작업할 마음이 있고, 수도승처럼 살아갈 화가를 찾게 된다면... 아주 기쁠 겁니다. 내 동생이 한 달에 250프랑씩 보내 주는 돈을 우리는 나눠쓰게 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내 동생에게 한 달에 한 점씩 그림을 보내면 되오." (스티븐 네이페 외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 재인용)
 
고갱과 고흐는 1888년 10월 23일부터 12월 23일까지 두 달간 노란 집에서 동거한다. 고흐와 고갱이 공동생활을 하기로 하였지만 모든 면에서 달랐다. 고갱은 오만한 자부심으로 이미 악명이 높았다. 고흐는 불안정한 정신과 행동으로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독특한 개성과 불굴의 의지를 소유하였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서로 너무 몰랐다는 점이었다.

고갱과 고흐는 아를의 공동생활에 대해 애초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고갱은 몇 달 동안의 숙박 문제와 재정적 지원이 우선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의 여비와 초기 정착에 필요한 돈만 마련되면 열대 지방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반면에 고흐는 공동생활이 지속적인 것이며, '고갱이 우리와 함께 영원히 머물 것'이며 아를의 화가 공동체도 오래갈 것이라고 믿었다. 고흐는 아를에 와서 형제처럼 생활하며 작업할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 생각을 했고, 이를 발전시켜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창작과 관련한 예술적 전수까지도 꿈꾸었다. 이를 위해 고갱이 '수도원장'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리라고 고흐는 스스로 믿고 있었다.

테오는 고갱의 작품을 연달아 판매하는 데 성공했다. 테오는 고갱의 대작 '브르타뉴 소녀들의 모임'을 팔았는데, 고갱의 몫은 500프랑이었다. 1888년 11월 중순 고갱의 작품이 파리에 도착하자 테오는 화랑의 복층에 전시하고 홍보했다. 고갱의 그림과 도자기 모두 판매가 급증했고, 그의 작품에 대한 호평과 찬양이 높아졌다. 이러한 소식은 아를의 고갱을 우쭐하게 했고, 고흐와 고조돼 가는 갈등에 지친 고갱의 열대지방으로의 탈출을 가속화했다.

작품 판매는 고흐에게도 역시 민감한 문제였다.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거의 팔지 못하는 상황에, 동생인 테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고 앞으로도 자신의 그림이 팔릴 것인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수도사나 은둔자처럼 나를 지배하는 열정에 따라, 편안한 삶을 포기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 화가의 길을 계속가야 하는 자신의 운명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늙은 수도승처럼' 살겠다고 했다.

무서운 자화상을 교환하다

1888년 9월 11쯤 고흐는 퐁타방에서 함께 지내는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초상화 교환을 제안한다. 고갱이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고흐에게 보냈다. 고갱은 자화상에 '레 미제라블'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고갱의 자화상을 받고 난 후 고흐는 미리 그려 놓았던 자화상 '폴 고갱에게 헌정한 불교적 자화상'을 보냈다.
 
고흐, 「폴 고갱에게 헌정한 불교적 자화상」 1888년 매사추세츠 포그 미술관
▲ 고흐, 「폴 고갱에게 헌정한 불교적 자화상」 1888년 매사추세츠 포그 미술관
ⓒ 매사추세츠 포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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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해바라기 열네 송이'에 사용한 청록색의 배경에 짧은 머리의 자화상을 그렸다. 고흐는 자신을 일본의 승려처럼 그렸다고 편지에 썼다. 그리고 '일본인처럼 눈초리가 약간 올라가게' 그렸다고 했다. 고흐가 자화상 교환을 제안한 이유는 일본의 화가들이 판화를 교환하며 우정을 나누고 서로의 작업에 대해 이해를 도모하던 전통을 따라한 것이었다.

고흐는 화가의 생활을 수도승의 삶과 비유하며 '절제와 열정의 고양'을 추구했다. 더 나아가 아를의 노란 집을 수도원, 자신은 수도승, 고갱은 수도원장으로 삼아 화가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번창시켜 나갈 꿈을 꾸고 있었다. 고흐는 자화상을 통해 고갱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표현했다고 믿고 있었다.

고갱은 고흐보다 다섯 살 많았고, 인상파 전시회에 자신의 그림을 출품했고, 작품을 팔아 돈을 벌기도 하였다. 고흐는 고갱의 오만한 자신감을 불쾌해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능한 스승이 될 가능성을 확인시키는 매력이라고 보았다.
 
고갱, 「레 미제라블」1888년  반 고흐 미술관
▲ 고갱, 「레 미제라블」1888년  반 고흐 미술관
ⓒ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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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도가 명백하게 표출된 고흐의 자화상과 달리 고갱의 자화상은 뭔가 미심쩍어 하는 의심의 눈초리가 보인다. 전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얼굴은 돌린 채 눈만 돌려보고 있다. 고갱은 자신의 모습을 정성스럽게 그렸고, 모서리에 엉성한 선을 그어 베르나르를 그렸다. 고갱은 자신의 강력한 창조적 열정과 순수함, 그러나 박해 받는 현실적 여건에 대한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지만, 너무 '추상적'이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그 내용을 자세하게 편지에 썼다.
 
"내가 추구한 바를 설명해야겠네. 나는 장발장처럼 사회에서 추방당했지만 사실은 고귀하고 다정한 사람을 그리고 싶었네. 사회에 의해 억압당하고 법 바깥에 있으면서도 사랑과 힘을 가진 장발장은 오늘날의 비참한 인상주의 화가를 상징하고 있지 않는가?" (브래들리 콜린스 <반 고흐 vs. 폴 고갱> 재인용)
 
고갱과 고흐가 자화상을 그려 교환한 가장 중심적인 이유는 명백하다. 서로 자신을 이상적으로 표현해 상대방의 공감·호감을 얻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애초의 의도와 일치하였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두 개의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것은 팽팽한 긴장감이다. 의도와 다른 '밀고 당기기'의 복잡한 속내가 드러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파국의 결말을 감상자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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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학위 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문학, 미술, 영화, 미학, 철학, 사회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을 용해, 융합하여 사색한 결과를 글로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서양회화 분야에 집중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