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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학교에 보내주지 않아 글을 배우지 못했어요. 흔히 하는 말로 '까막눈'이었어요. 아이 둘을 낳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눈치껏 살았는데 아이들이 학교에 가니까 숙제를 내주잖아요. 아이들 숙제를 하려면 부모가 뭘 알아야 해요. 안 되겠다 싶어서 그때 한글을 배웠어요."

8월 1일과 6일, 두 차례에 걸쳐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밀집 지역의 한 카페에서 이미자(가명, 64)씨를 만났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동자동 인근 카페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김미자씨
 동자동 인근 카페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이미자씨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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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씨는 8남매 중에 여섯째로 태어났다. 8남매를 모두 학교에 보내기엔 집안 형편이 너무 안 좋았다. 큰오빠와 미자씨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바람을 피우느라 그나마 있던 논밭마저 다 팔아서 썼다. 아홉 살밖에 안 된 미자씨는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남의 집 식모살이로 돈을 벌어야 했다. 미자씨 밑으로 있던 두 동생마저 글을 모르게 될까봐 악착같이 일을 해 학비를 댔다. 

"부모님은 왜 나를 낳아서 이렇게 고생스러운 인생길을 살게 하나 싶었어요. 친구들이 학교에 다닐 때 나는 빨래하고 물 길어오고 아기 키우고 밥하고 그랬어요. 죽으려고 쥐약을 먹었는데 안 죽었어요. 그래서 화약을 먹었어요. 그걸 먹었는데도 안 죽고 입에서 석유 냄새만 나더라고요."

부모님이 있었지만 사랑을 못 받았다. 아홉 살 이후로는 고아처럼 살았다.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 미자씨는 모 심고 밭 매고 나락 베고 산에서 나무하고 쌀 도정공장을 다녔다. 행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학교에 보내지 않은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미자씨는 현재 서울역 인근 동자동의 조그만 반지하 방에서 재혼한 남편과 살고 있다. 쪽방이 밀집된 그곳에는 대부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나 몸이 아픈 분들이 산다. 이웃 중에는 앞을 보지 못하고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창수(가명)씨가 있다. 미자씨는 본인이 어렵게 살아왔기 때문인지 힘들게 사는 사람을 외면하지 못했다. 창수씨를 돌보는 요양보호사가 있지만 남자 요양보호사라서 요리를 잘하지 못했다. 미자씨는 종종 창수씨의 집에 들러 음식을 만들어줬다. 요양보호사가 쉬는 주말에는 청소와 빨래를 해주었다. 벌써 5년째다. 

"이 동네에 사는 아줌마들이 저보고 그래요. 미자씨는 왜 눈도 안 보이고 냄새 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일해주냐고요. 그래서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어요. 벌 받는다고요. 어떤 사람은 제가 돈 받고 그 일을 하는지 알아요. 돈은 전혀 받지 않아요. 저도 기초생활수급을 받고 있거든요. 어렵게 사는 사람의 심정은 겪어본 사람이 잘 안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냥 순수하게 봉사하는 것뿐이에요. 친형제들과도 잘 만나지 않아요. 하지만 창수씨한테는 누나 동생 하자고 했어요. 정이 가고 뭐라도 있으면 나눠 먹고 그래요."

본인 살기도 힘든데 남을 돌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남겨 준 재산을 전부 썼고 미자씨 형제는 가난하게 살았다. 자신이 일하지 않으면 동생들은 물론 부모님조차 먹고살기 힘들 정도였다. 남의 집 식모살이를 가장 오래 했다. 성년이 돼서도 글씨를 모르니까 회사 같은 곳은 엄두도 못 내고 다방이나 식당에서 서빙을 했다. 

결혼 후 찾아온 시댁의 간섭과 남편의 폭력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미자씨는 결혼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방의 주방에서 서른 살까지 일하며 커피를 타고 차 만드는 법을 배웠다. 사장이 좋게 보았는지 주방장으로 일하게 했다. 주방장으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던 어느 해, 미자씨가 일하는 다방에 한 남자가 손님으로 왔다. 미자씨를 몇 번 보더니 결혼을 하자고 했다. 미자씨는 애초부터 결혼할 마음이 없었기에 거절했다. 남자는 술을 좋아했다. 술 마시는 모습을 본 미자씨는 더욱더 그 남자가 미덥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미자씨가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며 1년을 매달렸다. 망설이던 그때 미자씨의 어머니가 "너도 이제 나이가 많고 건강도 좋지 않으니 웬만하면 그냥 결혼해"라고 했다. 미자씨는 고민 끝에 결혼을 결심했다. 그녀의 나이 31살이었다. 

남편은 실리콘 기술자였다. 수입이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생활비는 꼬박꼬박 주었다. 사람은 착했으나 술만 마시면 미자씨를 때렸다. 견디기 힘들었지만 연년생으로 낳은 아이들이 대학에 갈 때까지만 참고 살자면서 버텼다. 아이들이 어릴 때 이혼하면 돈 버느라 바빠서 제대로 교육하지 못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술을 안 마시는 날은 괜찮았어요. 그런데 술만 마시면 화를 내고 내가 조금만 바가지를 긁으면 시댁 식구에게 일러바쳤어요. 마마보이처럼요. 시부모님은 남편의 말만 믿고 저를 구박했어요. 심지어 강원도 원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6대1로 저를 때렸어요. 남편,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 시동생, 동서 등 이렇게 6명이서요. 한 달에 대여섯 번은 서울에 올라와서 때렸어요. 남편은 술 먹고 폭력을 쓰지 않으면 새벽 3시까지 잠을 못 자게 괴롭혔어요. 아이들까지 못 자게 하고. 힘들고 괴로웠지만 아이들이 어려서 참고 살았어요. 아이들이 크니까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이제는 아버지랑 이혼하라'고요. 그래서 애 아빠 몰래 법률사무소에 의뢰해서 이혼했어요. 

이혼 후 대구로 발령 난 딸이 떠나고 아들과 둘이 살았어요.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나오다 보니 박스 줍는 일을 하면서 근근이 살았어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도와주던 아들은 '이대로 못 살겠다'며 친구 집에 가겠다고 하고 나갔어요. 그때부터 소식이 끊겼어요. 대구로 발령 간 딸도 마찬가지고요.

31살에 결혼해서 아이들을 연년생으로 낳고 59살에 이혼했으니까 거의 30년을 산  거죠.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 정말 까마득해요. 아이들마저 떠나니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아이들 유치원 때 우울증이 왔어요. 시댁 식구들의 지나친 간섭과 남편의 폭력 때문에 우울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어요.

이혼 후 처음엔 월세로 살았어요. 근데 몸이 아파서 일을 못 하고 병원에만 다니다가 보증금을 다 까먹었어요. 살림도 다 버리고 빈 몸으로 나왔어요. 서대문 영천시장 근처의 폐 고시원에서 1년 6개월 정도 노숙을 했어요. 전기와 수도가 다 끊어진 곳이었죠. 밥은 서울역 근처의 무료급식소에서 하루 한 끼를 먹었어요. 잘 씻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니 사람 꼴이 말이 아니었죠.

어느 날 영천시장 근처 공원에 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저를 알아보고 '어쩌다 이렇게 됐냐'면서 놀라는 거예요. 자세히 보니 남편의 수입이 일정치 않을 때 일한 식당의 단골인 거예요. 그 손님이 저를 보고 안 됐다고 여관을 하나 잡아 깨끗이 씻겨서 노숙인을 위한 자선병원에 데리고 갔어요.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기초생활수급도 신청하고 저를 살려 놓았죠.

얼마 후 병원이 자기 집에서 가까우니까 노숙하지 말고 자기 집에서 병원에 다니라고 했어요. 마지 못해 따라갔어요. 이후 불쌍한 건지 정이 든 건지 저보고 같이 살자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거절했는데 자꾸 권하길래 뿌리치지 못하고 그 사람하고 살게 되었어요. 재혼한 거죠."


남편의 알코올중독 때문에 폭력에 시달렸다는 사례는 종종 들어보았다. 하지만 남편이 시댁 식구들까지 동원해 때렸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자기 자식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 법인데 아이들까지 낳고 사는 부부의 싸움에 끼어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일까. 

생명의 은인으로 불렀지만 이제는 원수보다 못한 사람

미자씨는 다시는 결혼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기에 자신이 재혼하게 될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두 번째 결혼은 노숙으로 다 죽어가는 미자씨를 살린 생명의 은인과 같은 사람과 했다.

하지만 두 번째 남편 역시 술을 좋아했다. 술을 마시면 폭력은 물론 꼭 사고를 쳤다. 남의 싸움에 끼어들어서 영업 방해로 벌금을 내야 했고, 술을 마시고 미용실에 갔다가 (술을 먹었기 때문에) 당장 오늘 머리를 자를 수 없다는 사장의 말에 화가 나서 싸움을 일으켰다. 경찰 조사를 받았고 사장은 피해가 만만찮다며 보상을 요구했다. 보상해 줄 돈이 없어서 남편은 징역을 살았다.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고 벌금이 자꾸 들어갔다. 미자씨는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저축을 해서 넓은 집으로 이사도 하고 나중에 아이들을 만나면 조금이라도 돈을 주고 싶었으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툭하면 사고를 치는 남편 때문에 모든 일이 수포가 되었다. 더는 함께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미자씨는 이혼을 준비하고 있다. 

"몇 달 전에 제가 무릎관절 수술을 했어요. 왼쪽에 이어서 오른쪽 무릎을 수술했는데 수술하고 입원해 있는 동안 남편이 또 사고를 친 거예요. 술 먹고 동네 사람하고 싸움이 붙어서 경찰이 왔는데 남편이 가해자라고 했대요. 벌금이 또 얼마가 나올지 몰라요. 정말 힘들어요."

노숙하던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라 생명의 은인으로 불렀지만 이제는 원수보다 못한 사람이 되었다. 미자씨의 인생은 왜 이렇게 풀리지 않는 것일까. 그래도 한 번쯤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다면 한글을 배워 읽고 쓰게 되었을 때다. 
 
 한글을 배운 후 그녀가 만난 세상은 참 신기하고 따뜻했다.
 한글을 배운 후 그녀가 만난 세상은 참 신기하고 따뜻했다.
ⓒ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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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깨우친 뒤 만난 세상

"글을 읽고 쓰지 못한 채 살다가 한글을 배웠어요. 아이들 보기 창피하고 아이들 숙제를 같이하기 위해서요. 예전 명절에 시댁 식구들이 모이면 노래방에 갔어요. 신나는 음악이 나오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었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르니 따라 부를 수가 없는 거예요. 창피한 것은 둘째치고 자막을 읽으며 노래를 부르고 싶었어요. 그때는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간 게 1995년도예요. 그때 한글을 배웠어요. 제 나이 39살이었어요.

이제는 노래방에 가서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 있어요. 얼마나 기쁘고 신이 났는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죠. 또 한 가지는 은행에 가서 송금할 때예요. 한글을 몰랐을 때는 청원 경찰에게 대신 써달라고 했어요.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물론 액수를 잘못 쓸까봐 손이 덜덜 떨리기도 하지만 내 손으로 금액을 써서 보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인생은 행복한 시간보다 고행의 시간이 더 많다. 그 고행길에 불행이 반복되는 것도 흔치 않다. 미자씨의 인생은 걸어도 걸어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기엔 답답한 구석이 많았다. 아버지의 무책임함, 남편의 알코올 중독과 폭력, 시댁 식구의 횡포,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한 이혼, 노숙, 두 번째 남편의 알코올 중독, 방관하는 사회 등 이러한 난관에 부닥쳤어도 주위를 둘러볼 줄 아는 혜량(惠諒)을 가졌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저는 크게 소원이 없어요.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관심 두고 사는 것, 그게 제가 바라는 거예요. 내 입에 밥 들어가는 것보다 남의 입에 따뜻한 국하고 밥 들어가는 게 더 좋아요."

이제는 다 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살고 싶다는 그녀, 아버지의 폭력으로 주눅 들어 살던 엄마를 보며 컸던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그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던 그녀. 그렇지만 여전히 따뜻한 가슴으로 나보다 힘든 사람을 품는다. 기적 같다. 존경스럽다. 남은 그녀의 인생은 뒤늦게 글을 알게 되어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던 그런 시간으로 채워지면 좋겠다. 인터뷰가 끝나자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단다.

"제가 사람을 만나면 쑥스럽고 조심스러워서 이름을 잘 안 물어보거든요. 좀 웃기는 얘기지만 첫 번째 남편과 두 번째 남편이 같은 성씨예요. 그래서 똑같이 저를 힘들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앞으로는 사람을 만나면 꼭 성과 이름을 물어봐야겠어요. 그렇지 않았다가 또 변을 당하면 어떡해요?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해요."

[기획/ '보이지 않는' 여성 홈리스의 이야기]
① 폭력 아빠와 새엄마 피해 거리로... 여성 홈리스의 고백 http://omn.kr/1jdsi
② "난 엄마의 아바타였다... 남편은 날 죽이려 했다" http://omn.kr/1juz7
③ 아빠의 폭력, 애인의 배신... 그녀가 악착같이 일한 이유 http://omn.kr/1k477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종교계노숙인지원민관협력네트워크>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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