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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옥중 자서전> 표지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가 3.1운동 백 년을 맞아 출간한 <안중근 옥중 자서전>, 그동안 나온 여러 <안중근 자서전>을 대조 검토해 오류를 바로 잡아 펴낸 책이다.
▲ <안중근 옥중 자서전> 표지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가 3.1운동 백 년을 맞아 출간한 <안중근 옥중 자서전>, 그동안 나온 여러 <안중근 자서전>을 대조 검토해 오류를 바로 잡아 펴낸 책이다.
ⓒ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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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책들을 살피다 '안중근 옥중 자서전'에 눈길이 머물렀다.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자서전을 남겼다니! 부끄럽게도 여태 그런 줄도 몰랐다. 책 표지는 아무런 디자인도 없고 펼쳐 보니 출간일은 2019년 3월 1일인데 옛날 책처럼 세로쓰기다. 왜일까.

머리말을 보니 이 책은 그동안 나온 여러 형태의 <안중근 자서전>을 비교 대조하며 오류를 바로잡고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복구해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재출간한 거였다.

안 의사가 옥중에서 써서 펴낸 책 <안응칠의 역사>('안중근'은 본명, '안응칠'은 자字)가 세로쓰기였으므로 그 체제를 살려 세로쓰기로 출간했단다. 세로쓰기지만 내용이 흥미진진하고 분량도 그리 많지 않아 불과 몇 시간 만에 읽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1909년 12월 13일부터 이듬해 3월 15일까지 서른두 해 자신의 생애를 기록하였다. 사형수가 엄동설한 감옥에서 차분히 자서전을 집필하였다니 놀랍다. 안 의사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후세가 교훈을 얻고 독립 의지를 키우기를 바라는 뜻이 강했을 것이다.

안 의사는 맨 마지막에 "이상이 안중근의 32년 간 역사의 줄거리"라 밝힌다. 하지만 자서전 완성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가령 안 의사는 누군가와 만나 나눈 대화, 연설한 내용, 스스로 읊조린 시 따위의 다양한 형식의 문체를 사용해 독자가 글에 흠뻑 빠져 들게 만든다. 생애 중에 중요한 사건 위주로 서술하면서도 단지 무미건조한 줄거리만 제시하진 않았다.

동학당 봉기는 일청러 전쟁의 병균

이 책에서 안중근은 동학혁명에 대해 줄곧 매우 탐탁지 않게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1894년(갑오년)에 부친 안태훈 진사가 동학당 토벌을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16세 나이로 참전해 정탐독립대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2만 명 규모 동학군 격파에 뚜렷한 공을 세운다. 안중근은 그 전투를 서술하면서 동학당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때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현 일진회의 뿌리이다)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구실로 군현을 횡행하면서 관리들을 살해하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었다(이때가 한국이 장차 위태롭게 된 기초로, 일본과 청나라와 러시아가 개전하게 된 원인을 만든 병균이었다)."(22쪽)

안중근은 동학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뒤, 일본 위관 스즈키가 군대를 이끌고 근처를 지나다가 서신을 보내 축하의 뜻을 전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불편한 기색이나 비판은 없다. 오히려 그는 "동학 도당(徒黨)이 전쟁 참패와 일본군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도망쳐 나라 안이 태평해졌다"고 말한다.

동학혁명에 대한 안중근의 부정적 인식은 생애 말년인 1910년 2월에 쓴 '동양평화론' 서두에도 나타난다. 그는 청일전쟁 발발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나간 해(갑오년) 일청전쟁을 논하더라도 그때 조선의 좀도둑떼와 같은 동학당의 소요로 인해서 청일 양국이 군사를 움직여 건너와 무단으로 전쟁을 시작하여 서로 충돌하였다."(107쪽)

안중근은 탐관오리들의 횡포, 쇠약한 국력을 한탄하면서도 당시 고종의 실정이나 민씨 일가의 전횡과 비리에 대해선 함구한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나라가 위급한 상태에 놓이자 상해에 망명한 민영익(민씨 세도정치의 핵심 인물)을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를 당하여 욕을 한껏 퍼부었노라고 밝히는 정도에 그친다.

'대대로 국록을 먹는 신하'로 살았으면서도 나라가 위중한 상태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안일만을 도모하며 동포와 만남조차 거부하는 민영익에 그는 크게 분개했다. 하지만 민중의 비참한 삶은 안중에 없이 오로지 자신들 권력의 안위만을 꾀하며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조선 왕실의 패착에 대해선 아무런 말이 없다.

대한독립의 그날까지

안중근은 부친과 달리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다. 대신 그는 "친구와 의를 맺는 것, 음주가무, 총으로 사냥하는 것, 말 타고 달리기를 평생 즐겨 하였다"고 스스로 밝힌다. 어지러운 나라 형편을 보며 학문 연마로 입신출세를 꿈꿀 때가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을사늑약 체결 직후인 1905년 12월, 그는 대한독립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그토록 좋아하던 술을 끊기로 맹세하였다.

일제는 "동양평화 유지와 대한독립을 공고히 하려 한다"는 명분으로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안중근은 일제가 내세운 대의명분을 지지한다. 일본이 서양 열강과 백인종의 침략에 맞서 동양평화와 대한독립을 이루리라고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허나 이토 히로부미가 건너와 을사늑약 체결하고 황제 폐위와 군대 해산, 철도·광산·산림 등의 약탈을 자행하자, 이를 "세계의 신의를 저버린 역천(逆天)"이라 보고 연해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였다. 그는 이토가 "위로 천황을 속이고 밖으로 열강을 얽어 농간을 부리며 못하는 일이 없다"며, "이 도적놈을 죽이지 않는다면 한국과 동양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보았다.

운명처럼 감행한 이토 처단

안중근은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의병들을 이끌고 함경북도까지 진입해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하지만 그의 부대는 일본군 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졌고 그를 비롯한 세 명만이 천신만고 끝에 연해주로 돌아온다.

여느 사람 같으면 할 만큼 했다며 더 이상의 무장 독립운동을 포기했을 법하다. 한데 안중근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1909년 정월, 동지 열두 명과 함께 러시아 안치헤 방면(노브키에프스크)에서 약지(藥指)를 잘라 대한독립을 위해 헌신하자며 단지동맹을 맺었다.

그해 9월 안중근은 돌연 안치헤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안치헤를 떠난 이유에 대해선 "갑자기 아무 까닭도 없이 분한 마음이 일어나 답답해지며 초조함을 이길 수 없고 스스로 진정하기 어려워서"라 밝힌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에야 이토가 그곳에 곧 온다는 사실을 신문을 읽고야 알았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한 게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감행한 거사라 할 수 있다. 물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덕순, 유동하 등과 함께 이토를 처단할 계획을 의논하긴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시간에 누가 이토를 저격할 것인지 결정하진 못하였다. 심지어 그들 중 이토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의 얼굴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안중근은 이침 일찍 하얼빈역에 나가 찻집에서 차를 두세 잔 마시며 이토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이토가 잠시 하차해 군악의 사열을 할 무렵, 그는 "분한 기운이 갑자기 일어나고 삼천 길 업화(業火)가 뇌리에서 치솟아" 찻집을 뛰쳐나가 이토에게 네 발을 쏘았다.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작은 늙은이"가 틀림없이 이토일 것이라 생각하고 쏜 것이다.

그래도 자신이 쏜 자가 이토가 아닐 수 있다는 의구심이 생겨 그 자리에 가장 위엄 있게 보이는 다른 자를 목표로 세 발을 쏜 뒤 '대한만세'를 삼창하고 헌병대에게 붙잡혔다.

이토를 처단한 이유

일제 검찰관 미조부치가 이토를 쏜 이유를 묻자, 안중근은 무려 열다섯 가지 죄목을 열거한다.

"첫째 한국 민 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한 죄, 셋째 오조약과 칠조약을 강제로 정한 죄, 넷째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다섯째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여섯째 철도와 광산 산림과 천책을 강제로 빼앗은 죄, 일곱째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여덟째 군대를 해산한 죄, 아홉째 교육을 방해한 죄, 열째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열한째 교과서를 압수해 불태운 죄, 열두째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으려 한다고 세계를 속인죄, 열셋째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싸움이 그치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열넷째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 열다섯째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90쪽)

이에 검찰관은 "과연 동양의 의사 義士"라며 "이제부터 의사이니까 반드시 사형 받을 법은 없으니 걱정말라"고 했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검찰관을 비롯한 교도관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썼다.

매 세끼 쌀밥과 과일, 내복 한 벌, 솜이불 네 채를 지급 받았다고 말한다. 교도관 중에는 그를 심히 존경하는 인물도 있었음을 볼 때 과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11월 어느 날부터 검찰관의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 안중근은 그것을 본심이 아니라 외압에 따른 것이라 본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안중근 옥중 자서전> 부록으로 실린 '동양평화론'
▲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안중근 옥중 자서전> 부록으로 실린 "동양평화론"
ⓒ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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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동양평화론'을 다 쓰기까지 한 달간 사형 집행을 미뤄달라고 일본 고등법원장에게 부탁해 "몇 달이라도 특별히 허가하겠다"는 약속을 얻었다. 일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안중근이 구상한 동양평화론 목차(전감, 현상, 복선, 문답) 중에 '전감(前鑑, 앞 사람이 한 일을 거울삼아 스스로를 경계함)'만을 겨우 완성하였을 뿐인데 일제는 서둘러 그의 사형을 집행하였다(1910. 3. 26). 안중근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는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나 보다.

자서전과 행적으로 미루어 안중근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대한독립과 동양평화를 간절히 열망하고 그 일에 몸을 던져 헌신한 애국지사임에 틀림없다. 다만 그는 태생과 시대적 한계이겠지만 유교사상에 기초한 근왕주의적 시각을 벗지는 못하였다.

이토가 천황을 속였고 조선 국권을 빼앗아 강도짓을 일삼기에 그를 처단하면 일본도 동양평화의 대의를 위해 돌이키리라는 일말의 기대를 한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일제는 이토가 죽은 뒤에도 동양평화를 해치는 침략전쟁과 강도떼 같은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역사를 돌아볼 때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지나친 이상론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백인종과 황인종을 구분해 황인종인 동양의 단결과 평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일부 인종주의적 시각의 한계도 있다. 하나 그가 꿈꾸던 '동양평화'는 열강들 틈바구니에 놓여 바람 잘날 없는 지금 한반도 현실을 생각할 때 아직 유효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싣습니다.


안중근 옥중 자서전 - 安應七歷史, 東洋平和論, 寄書

안중근 (지은이), 열화당(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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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이자 팟캐스트 '솔샘소리' 진행자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