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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7년여간 루게릭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신정금씨가 삶의 의욕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쓴 에세이입니다. 신정금씨는 온몸이 굳은 상태로 안구마우스를 이용해 눈을 움직여 글을 씁니다. 하루 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단 한 명에게라도 작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편집자말]
사랑이라는 추상명사 대신 "엄마"하고 가슴으로 당신을 불러봅니다. 평생 당신 손으론 고운 옷 한 벌 마음 편히 사본 적 없고 자신의 의지론 맛집 한 번 간 적 없을 당신께 작은 애 대학 보내고 나면 엄마와 여행도 다니며 맛있는 음식도 사드리겠다 선심쓰듯 한 약속은 공수표가 되어버렸습니다.

둘째 대학 가고 나면 봄이면 내려가서 함께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매화꽃 길도 걷고 지천으로 돋아나는 고사리도 꺾으며 밥 걱정 하지 말고 맛있는 남도의 맛집들다니자 약속했었지요. 가을엔 감도 따고 밤도 함께 줍겠다 약속했었지요.

광양에서 여수까지 이순신대교가 개통되어 집에서 30분이면 충분히 간다는데 건강했다면 지금쯤 여러 번 갔었겠지요. 살아생전 효도하겠노라 큰소리치며 했던 미뤄 둔 약속들은 모두 지키지 못할 공수표가 되어 버렸습니다.

봄이면 정성껏 말려 넘치게 보내주신 고사리, 취나물 등 갖가지 산나물로 이웃과 넘치게 인심 내며 살았습니다. 아픈 다리 끌며 꺾었을 게 뻔한데도 철부지 딸은 엄마는 다 그렇게 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양 무릎 연골이 닳아 인공관절로 버티고, 허리엔 철심을 박아도 다섯 자식 김장은 당연히 엄마가 해주는 거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이웃이나 벗들에게 맛있는 밥 해주는 게 취미라 말하면서 정작 엄마에겐 밥 한 끼 해드린 기억조차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엄마가 보내주신 남도의 갖가지 맛있는 김치와 나물들로 인심만 내고살았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더덕처럼 거칠고 두꺼워진 지문조차 닳아 없어진 당신의 거칠고 투박한 손을 보면서도 철없는 딸은 엄마는 원래 그런 거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불혹과 지천명을 넘겨서도 아직도 철이 덜 들었으면서 20대 두 아들에겐 부모 마음 몰라준다 타박하고 엄마·아빠는 너희처럼 편히 살지 않았다 큰소리 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자식된 도리는커녕 엄마의 든든했을 장녀에서 아픈 손가락이 되어 버렸으니 이 불효를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할수록 가슴 저며오고 먹먹해집니다.

어린시절 여름밤이면 화단 옆에 평상을 놓고 모기장을 치고 엄마와 누워서 함께 보았던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과 은하수, 소원을 빌던 별똥별과 반딧불이 그립습니다.
 
신정금씨가 눈으로 모니터를 보고 글을 입력하고 있다.
 신정금씨가 눈으로 모니터를 보고 글을 입력하고 있다.
ⓒ 이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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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감사하다 사랑한다 죄송하단 말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말문을 닫아버린 저의 처지가 오늘따라 더 아프게 느껴집니다.

가방끈의 길이가 지혜에 비례하지 않고, 정의로움과는 더욱 비례하지 않으며, 인간다움, 사람다움과는 더더욱 무관함을 부모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늘 남을 먼저 배려하고 작은 것도 나누며 순박하게 사시는, 사는 모습 자체가 겸손인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렇게 아플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공수표만 남발한 불효녀를 용서해주세요. 엄마,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처럼 인내하며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그러니 엄마, 제 걱정 조금만 하세요. 항상 제 곁에는 예수님, 성모님이 계시잖아요. 그리고 한결같이 사랑하는 특별한 남편과 잘 자라준 아이들이 있고, 자주 찾아주는 벗들과 교우들이 있잖아요. 

태그:#루게릭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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