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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 신규식 선생의 거처를 찾아갔다. 새로운 단장을 하느라 인부들의 분주함 속에 비까지 내린다. 예관의 거처 건너편에 중국 공산당의 토대를 마련한 쳔두시우(陳獨秀)의 집이 있다. 그는 <청년>이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민주와 과학의 기치를 널리 알리고 유교의 폐단을 맹렬히 공격하며 중국 근대사상을 이끌어간 인물이다. 예관선생은 유창한 중국어로 이미 쑨원(孫文)선생과 동지적 관계를 맺었고, 쳔두시우와도 각별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쳔두시우의 일생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상하이에는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쉰(魯迅, 본명 周樹人) 선생도 있었다. 그의 대표작인 <아Q 정전>은 우리말로 번역돼 오랫동안 사랑 받는 책이다. '아Q'라는 주인공의 정신 승리법을 내세워 중국인의 어리석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소설이다. 난 그의 산문집 <朝花夕拾>(조화석습 :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우리말 번역본)에 나오는 구절인 '물에 빠진 미친개는 몽둥이로 쳐라'가 늘 뇌리에 남겨져 있다. 홍커우 공원이 루쉰 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 이해가 된다.

루쉰은 원래 의학을 공부하러 일본 유학을 했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슬라이드를 보는데 일본군에 의해 중국인이 처형당하는 장면에 이를 구경하는 중국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중국인의 육체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먼저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고 한다.

또, 중국 현대문학의 거목 마오둔(矛盾, 본명 沈德鴻)선생도 있다. 바로 상하이를 무대로 민족자본가와 매판자본가가 펼치는 흥망성쇠와 중국의 사회적 현실을 잘 살피는 방대한 규모의 작품인 소설 <子夜>(자야)의 저자이다. 상하이 사변이 있어났던 1931년에 시작해서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는 1932년 12월에 탈고한 작품이다.

상하이는 당시 1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국제도시였다. '동양의 베니스'라는 이름이 붙은 주자지아오(朱家角)의 수향마을이 있어 지금도 찾는 이들이 많다. 그러니 그곳에 살았던 많은 외국인들의 묘소가 '만국공묘(萬國公墓)'이다. 이곳에 독립투사들이 아직도 잠들어 계시니 참배를 하러 간다. 이곳도 지금은 '쏭칭링 능원(宋庆龄 陵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쏭칭링이 누구인가? 중국의 국부 쑨원 대총통의 부인이다. 처음에 그의 비서 역할을 하다가 아버지뻘이 되는 그와 결혼했다. 그는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의 부패를 비난하며 루쉰 선생과 함께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위해 노력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 된 후에는 국가 부주석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녀의 여동생인 쏭메이링(宋美齡)이 바로 장개석이다. 그의 언니는 쏭아이링(宋靄齡)이다. 이들 세 자매의 이야기도 중국현대사의 재미있는 일화이다.

쏭칭링 능원에는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노백린(盧伯麟), 김인전(金仁全), 안태국(安泰國)"선생의 묘지석이 있고 아래에 대한민국으로 이장했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그곳에 묻혀 계시는 분들도 계신다. 영령(英靈)들께 헌화하며 뜨거운 가슴의 깊은 존중의 마음으로 묵념을 했다. 영어로 쓰인 많은 외국인들의 무덤도 있다. 묘소 들어가는 길에 세워진 중일 우호를 위해 힘쓴 일본인의 사진이 담긴 묘표(墓表)가 있어 기분이 상한다.

예관 신규식 선생은 앞에서 언급했고,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선생은 '나라는 멸할 수 있지만 역사는 멸할 수 없다'는 유명한 글이 담긴 <한국통사>(韓國痛史)라는 역사책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상하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내신 분이다.

노백린 선생은 장군이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오시고 무인으로서 임시정부 군부총장을 역임하시며 평생 항일 투쟁에 헌신하였다. 앞날을 예고하며 육군보다는 공군에 주력해야 한다며 미국에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김인전 선생은 목사시며 임시정부 임시 의정원 의장을 역임하신 분이다. 군사를 양성하고 군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하셨다.

안태국 선생은 대한제국에서 하급 관료 생활을 하신 분이다. 1909년 이완용 저격 사건인 이재명 사건에 연루되어 2년의 징역형을 받았으며,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5년의 징역형을 받고 만기 출소하시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내무총장 비서관을 역임하시고 병으로 작고하셨다.

저녁을 먹고 상하이에 왔으니 와이탄(外灘)의 야경을 감상해야 한다고 배를 타고 야경을 감상한다. 엄청난 사람들이 야경을 감상하러 몰려 있다. 중학교 땐가 읽었던 '인연'이라는 수필로 유명한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 선생의 수필 '황포탄의 추억'(원제 黃埔灘的仲秋)을 떠올려 본다. 외국에서 맞는 추석날 황포탄 주변의 정경을 차분하게 쓴 수필이다. 그는 상하이의 후쟝대학(沪江大学, 현재 상하이이공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현대의 건축 기술을 발휘한 최고의 마천루(摩天樓)가 강변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섰고 휘황찬란한 조명이 보는 이들의 눈을 현혹한다. 그런 화려한 광경을 감상하면서도, 강변의 옛 부두(당시에는 마터우(马头)라고 했음)가 있던 곳에서 1922년 의열단원인 김익상(金益相), 오성륜(吳成崙), 이종암(李鍾巖) 의사가 일본의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곳을 찾고 있다.

배가 한 바퀴 돌아내려오니 강변에 일본식 건물이 보인다. 김종훈 기자가 당시에 일본 영사관으로 두 의사가 갇혀 있던 곳이라고 알려준다. 저렇게 건물이 남아 있으니 그날의 거사 현장을 배를 타고 지나가면서라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김익상 의사는 1921년에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분이다.

그렇게 상항이에서의 답사가 끝나고 내일은 항주로 떠난다. 숙소에 들어와 차분한 마음으로 오늘을 회상하다가 <독서신문>에서 대담한 소설가 김성동 선생의 말을 떠올려 본다.

"역사를 바로 볼 줄 알아야 사람(史覽 : 역사 사, 볼 람)이다. 기념만 하면 뭐하나.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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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잘못된 것에 분노하고 옳은 일에 박수칠 줄 알며 세상의 어려운 사람에게 훈훈한 인정을 주고 싶은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중년 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