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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일 종족주의' 책표지.
 <반일 종족주의> 책 표지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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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쓸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 저자 이영훈 교수와 필자는 안병직 선생의 지도 아래 동문수학한 사이인데다, 책 출간 후 이 교수가 이런저런 언행으로 욕을 먹고 곤경에 빠져 있어서다.

필자는 2015년 10월 국정교과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오마이뉴스>에 <'국정화 진원' 이영훈 선배! 국민더러 아편 맞으란 소리오>라는 칼럼을 기고해 이영훈 교수와 안병직 선생을 맹렬히 비판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 또다시 비판글을 쓰기에는 마음의 부담이 컸다.

다시 이영훈 선배를 비판하는 이유

하지만 <반일 종족주의>를 읽어보니 여기저기 억측과 무리한 논리 전개가 들어 있어서 그냥 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이런 책이 주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고 하니, 지금 적절한 학문적 비판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경우 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때마침 이영훈 교수가 SBS TV와 지난 12일 가진 인터뷰에서 책 출간 후 학자들에게서 단 한 편의 서평도 나오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필자는 안심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반일 종족주의'라는 자극적인 신조어 속에 담긴 저자들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두 번째 글 말미에서 다루기로 하고, 먼저 책의 주요 내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책에서 다루는 주제가 워낙 다방면에 걸쳐 있는 만큼 글 한 편으로 충분히 검토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글을 두 번으로 나누어 게재하기로 했다.

첫 번째 글은 경제문제에, 두 번째 글은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단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등에 대해서는 필자가 직접 연구한 적이 없어서 연구 방법과 논리 전개를 중심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밝혀 둔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은 일제 강점기에 토지 수탈, 식량 수탈,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인의 토지를 대량으로 빼앗은 사실은 없다(이영훈), 일제는 쌀을 돈 주고 사 갔지 수탈하지 않았다(김낙년), 1944년 9월 이후의 단기간을 제외하고는 조선인 노동자를 강제동원하지도 않았고 노무자로 동원된 조선인이 강제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지도 않았다(이우연)는 것이다.

필자는 대학원에서 일제 강점기 농업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토지문제와 쌀 문제에 관해 이들의 주장을 판단할 수 있는 나름의 정보를 갖고 있다. 일제가 총칼로 조선 농민들의 토지와 쌀을 '약탈'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에 수탈이 없었다는 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은 수탈이 아닌가?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가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심재철 의원이 주최한 대한민국 건국 70주년 세미나에서 '건국 70주년 대한민국의 성취와 상실'에 대해 발제하고 있다.
▲ 이영훈 교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지난해 8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건국 70주년 세미나에서 발제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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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토지조사사업으로 구래(舊來)의 토지 관행을 모두 철폐하고 일물일권적 토지소유권을 법인하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일본인들이 안심하고 토지를 취득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을 마련했다. 이는 식민지 권력이 지세를 징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했다.

토지조사사업 이후 일본인들은 전북, 전남, 경남, 황해 등의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농지를 매집하여 지주경영을 확대했다. 그 이면에서 조선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일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예컨대 일제는 쌀 증산을 위해 수리조합이란 걸 활용했는데, 여기에 일본인들이 적극 참여하여 농지를 확대하고 개선했다. 일본인들은 강 주변 저습지나 상습 침수지를 대량 매입한 다음 주변 농지까지 편입시켜 수리조합을 설치하고는 수리시설 개선을 꾀했다. 이때 수리조합에 강제편입된 조선인 농민 중에는 과중한 수리조합비 부담으로 농지를 상실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반면 일본인들은 짧은 기간에 광대한 옥토를 가진 대지주로 변신했다. 1920년대에 일제가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 쌀을 대량 증산하여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할 때 그에 적극 부응한 것은 주로 일본인 대지주들이었다. 비슷한 행태를 보인 조선인 지주들도 있었지만 소수였다.

일본인 대지주들은 토지 매집으로 대규모 농장을 조성하고는 조선인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었는데, 소작료는 수확의 60퍼센트에 달하는 고율이었다. 일본인 대지주들은 소작료로 걷어 들인 조선 쌀을 군산, 목포 등지의 이출항을 통해 일본으로 이출했다.(일제는 일본과 조선의 거래를 다른 외국과의 거래와 구별하기 위해 수출과 수입 대신 이출과 이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소작농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소작료를 수탈하기 위해 종자 선택과 비료 사용의 강제, 경작 과정 전반에 대한 감독, 소작지·관개시설 관리 강제, 수확물 품질과 처분에 관한 규제, 자금 전대(前貸)를 통한 지배, 연대 소작인 제도 적용 등 물샐 틈 없는 지배체계를 구축했다. 그 과정에서 대지주는 자꾸 더 성장하고 소작농들은 빈곤에 빠졌다.

일제는 조선 농민에게 식민지 농업정책을 직접 강제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지주층을 매개로 하는 간접적인 방식을 택했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강제보다는 지주층을 매개로 한 간접적인 지배 방식이 쌀의 대량 증산에 효과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량 이출에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대지주의 발달과 농민 몰락, 그리고 대지주를 매개로 한 쌀 이출을 두고 '토지 수탈', '쌀 수탈'이라는 말 외에 뭐라 표현해야 할까?

게다가 일제 말기에 공출제도가 시행되면서부터는 일본 관헌이 가택을 수색하고 농민이 먹으려고 남겨둔 쌀까지 빼앗는 실질적인 쌀 수탈이 행해지기도 했다. 일제가 조선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하지 않았다고 해서 토지조사사업이 정당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또 쌀을 대가 없이 빼앗지 않았다고 해서 산미증식계획이 조선 농민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했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일제는 단지 약탈로 식민지를 지배하는 유치한 수준의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었을 뿐이다. 사람 몸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약탈은 피부에 상처를 내지만, 제도를 이용한 지배는 뼈를 손상하며 그만큼 영향도 오래갈 수밖에 없다.(오늘날 한국이 부동산 문제로 시달리게 된 역사적 기원은 바로 토지조사사업이다)

왜 스스로 비판하는 부조적(浮彫的) 방법을 사용하는가?

사실 현재 한국에 이영훈 교수 등이 비판하는 '약탈설'을 믿는 학자는 많지 않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이영훈 교수는 약탈설을 펼치는 대표적 인물로 소설가 조정래씨와 원로 사회학자 신용하 교수를 꼽는다. 조정래 작가가 토지조사사업에 반발하는 농민을 경찰이 즉결 총살하는 내용을 소설로 쓰고, 신용하 교수가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이란 말을 지어내서 토지조사사업의 폭력성을 주장하는 책을 저술한 것이 한국인들의 역사 인식을 좌우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필자가 위에서 소개한 내용으로 일제 수탈의 메커니즘을 분석한 학자도 많고 관련 연구 성과도 방대하게 축적되어 있음에도, 이영훈 교수는 그에 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조정래 작가와 신용하 교수가 학계를 대표한다고 믿는 것일까?

이영훈 교수는 부조적 방법을 썼다는 이유로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하는데, 이 교수의 방법이야말로 부조적이다. 부조적 방법이란 자기 가설에 유리한 사례만 취해서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을 가리키는데, 이 방법은 <반일 종족주의> 전체에서 활용되고 있다. 자본주의 맹아론과의 차이점은 맹아론자들이 자본주의 맹아의 증거를 찾을 때 이 방법을 썼다면, 이 교수 등은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을 때뿐만 아니라 비판 대상을 선택할 때에도 이 방법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이영훈 교수를 중심으로 한 뉴라이트 학자들은 주장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통계와 사료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평가를 받아 왔는데, <반일 종족주의>에서는 그들의 사료 활용 방식에 큰 문제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10만 명이 징용됐는데 강제동원이 허구라고?
 
 지난 4월 5일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에서 '반일-친일 프레임을 깨자: 일본을 이해하고 같이 발전해야'를 주제로 열린 자유경제포럼 주최 토론회에서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발표를 하고 있다.
▲ 이우연 연구위원 지난 4월 5일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에서 "반일-친일 프레임을 깨자: 일본을 이해하고 같이 발전해야"를 주제로 열린 자유경제포럼 주최 토론회에서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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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파트 집필을 담당한 이우연 박사는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가 관련 없는 사진으로 일제 강제동원의 참상을 알린 사실을 발견하고는 의기양양해진 모양이다. 마치 서 교수가 실수한 것이 강제동원이 없었다는 증거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우연 박사 스스로 인정하는 대로, 1944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8개월 동안 무려 10만 명 가까운 조선인 노동자가 징용, 즉 강제동원을 당했다. 그 전에 행해진 관 알선에서도 사실상의 강제동원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우연 박사에게는 10만 명이 별 것 아닌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강제동원이 허구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렇게 이 박사는 '강제'동원을 부정한 다음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과 임금이 일본인들에 비해 나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탄광에서 갱외보다 갱내, 갱내에서도 가장 어렵고 위험한 일에 조선인이 배치되었다는 학설을 채탄 기술의 변화를 들어서 반박한 후에, 에무카에(江迎)탄광의 <임금대장>을 소개하며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임금 차별은 없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현재 필자는 사료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우연 박사 글 자체에서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진술을 발견했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이 박사는 <반일 종족주의> 82~84쪽에서 조선인이 작업 배치에서 불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는 바로 뒤 85~86쪽에서는 위험한 작업을 맡은 조선인의 비율이 일본인보다 2배나 높았고 그 결과 사망률도 높았다고 말한다. 이건 자가당착 아닌가?

이우연 박사는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이 대단히 자유로웠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근거가 어처구니없다. 밤새워 화투 치고, 과음하고, 특별위안소에서 월급을 탕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노동자가 고된 노동에 찌들어서 범한 일탈로 봐야지 어떻게 그것을 자유로 이해할 수 있는가? 조선인 노동자를 사용한 탄광업주로서도 그런 '자유'쯤은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탄광에서 나온 사료 하나로 민족 간에 임금 차별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또 어떤가? 설사 그 사료가 일반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조선인이 일본인에 비해 위험한 작업을 맡았다면 양자 간에 임금이 비슷해지는 것은 당연하니 말이다. 그걸 가지고 조총련계 학자 박경식의 '민족적 임금차별론'을 격파한 듯 호들갑을 떠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김낙년 교수가 안타깝다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 김낙년 교수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가 지난 2015년 12월 서울 종로구 평창동 대화문화아카데미 사무실에서 열린 "잃어버린 개혁을 찾아서" 포럼에서 발제하고 있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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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김낙년, 이우연 세 사람 가운데 김낙년 교수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지주제의 문제를 지적하고 일제 강점기 극심한 소득 불평등의 증거를 제시하니 말이다. 그는 해방 전 소득 상위 1퍼센트가 차지하는 소득 비중이 20퍼센트 전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실로 놀라운 사실이다. 불평등 때문에 아우성이 나오는 요즈음 이 비율이 12퍼센트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제 강점기의 소득 불평등은 극심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 이렇게 불평등이 심해진 원인을 지주와 소작인 간 불평등에서 찾고 있기도 해서 제법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김 교수는 이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제정책과 연결하지 않고 일제 강점기의 조선 사회가 전통 사회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으로 해석한다. 이는 그 역시 뉴라이트 역사 인식에 갇혀 있음을 알려준다. 소득 불평등 분석에서 세계적 수준의 연구 성과를 내놓고 있는 김낙년 교수가 어째서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역사 인식에 머물러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왜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에 눈을 감는가?

<반일 종족주의>를 읽으면서 필자는, 이영훈 교수 등이 어째서 한국 사람의 오류에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부라리는 반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수탈과 악행에는 한없이 관대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성한 식민지 사관의 뿌리가 깊고 그 폐해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스탠스를 잡았을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옛날 그들이 제국주의와 강자의 지배와 수탈을 혐오하고 피지배 민중의 처지와 이해를 옹호하는 이론적 입장에서 출발했음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영훈 교수 등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약탈설을 극복하고자 했다면,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과 일본 제국주의의 제도적 폭력성을 분명히 강조하면서 했어야 한다. 그걸 누락한 채 제국주의 통치의 합리성만을 과도하게 부각했기 때문에 <반일 종족주의>가 친일적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된 것이고, 지금 한국 대중으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이영훈 교수 등은 억울해하지 마시라. 자업자득이다.

* <반일 종족주의>를 비판한다 ②편은 다음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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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톨릭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헨리 조지 포럼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