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 포스터

영화 <벌새> 포스터 ⓒ 엣나인필름


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 김새벽, 박지후는 모두 왼손잡이이며 또 여성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기획개발 단계의 프로젝트를 선정해 제작사, 투자사와의 연결을 주선해 제작될 수 있도록 돕는 여성 영화인 지원 프로젝트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피치&캐치 프로젝트' 지원작품이다. 영화 성 평등 지수를 보여주는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올해 몇 안 되는 여성 영화기도 하다.

최근 여성 관객들의 인식이 높아졌고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영화들이 나타나면서 생긴 변화다. 하지만 한국에서 여성 감독, 여성 서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여전히 흥행 면에서 모험이다. 벡델 테스트 통과하는 영화를 보기 힘든 상황에서 <벌새>는 특히나 반갑다.
 
 영화 <벌새>스틸컷

영화 <벌새>스틸컷 ⓒ 엣나인필름


전 세계를 돌며 25개 트로피를 수집한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중학교 2학년 은희의 개인적인 일화가 가족의 역사가 되고 나아가 국가의 역사가 되는 과정을 담담히 담는다. 김보라 감독의 기억과 감정을 반영해 만들어졌다.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집단의 공통의 기억으로 끝난다. 평범했던 일상이 훗날 비범한 역사가 되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보편적인 이야기에서 비범한 이야기로
 
 영화 <벌새> 스틸컷

영화 <벌새> 스틸컷 ⓒ 엣나인필름

 
14살 은희는 특별한 아이가 아니다. 공부도 그저 그렇고 평범한 아이다. 남자친구가 있고, 가끔 콜라텍에서 일탈을 꿈꾼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동성 후배가 있고, 친한 친구도 있다. 은희는 관계망을 서서히 넓히다가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다시 봉합하기도 한다. 벌새가 나뭇가지를 물어와 둥지를 만드는 과정처럼. 작은 세계를 구축하려는 실패와 성장 과정을 관객은 함께 응원하고 아파한다.

부모님은 떡집을 운영한다. 1990년대 중년의 여느 부부와 다를 바 없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와 자식 가방 끈만큼은 당신보다 길었으면 하는 엄마가 있다. 부모님이 싸울 때면 우리 집안은 왜 이리 콩가루일까 고민도 한다. 겉만 멀쩡한 우리 집 기둥 오빠, 대치동 아파트 살면서 강북 학교 다니는 골칫덩어리 언니, 그리고 사랑받고 싶은 아이 은희가 산다.

1994년 대한민국에는 여러 사건사고가 있었다.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 미국 월드컵 등.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을 즐겨듣고, 캘빈클라인, 베네통, 미치코런던, 리바이스처럼 유행하는 브랜드는 가짜라도 걸쳐야 했다. 삐삐를 치며 음성을 확인하고, 기념일에는 나만의 선곡을 담은 노래 테이프를 녹음해 선물했다. 참 순수했고 귀여웠던 잊지못할 상처도 함께한 그때가 그리워 진다.

마음을 나눌 한 사람만 있다면...
 
 영화 <벌새> 스틸컷

영화 <벌새> 스틸컷 ⓒ 엣나인필름


영화를 보면, 따스한 위로가 가슴에 스며든다. 내 마음을 알아주고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잘 산 인생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문 선생님 영지(김새벽)는 은희에게 그런 존재다.

은희는 다리 밑 재개발 반대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동정할 수 없다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고도 말한다. 영지는 은희를 중학생이 아닌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해 준다. 화가 나고 슬프더라도 다도(茶道)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려준다.

아마도 명문대를 다니지만 오랫동안 휴학한 영지는 은희가 감당하기엔 벅찬 세계를 왜곡 없이 설명해 줄 수 있는 어른이다. 선생님 책상에 보이던 책 <크눌프>와 은희가 선물한 책 <적과 흑>은 영지의 삶과 닮아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와 만남과 헤어짐, 사랑에 대한 이야기처럼 말이다.
 
 영화 <벌새> 스틸컷

영화 <벌새> 스틸컷 ⓒ 엣나인필름


영지는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을 칠판에 쓰며 묻는다.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능히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라는 명심보감 교우편에 나오는 말이다. 오늘 나와 마음을 나눌 사람이 있을까 문득 궁금하다.

자기를 좋아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나의 부족한 점까지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때마다 영지 선생님은 손가락을 움직여 보라고 한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벌새는 작은 날갯짓을 빠르게 놀리는 새다. <벌새>는 작고 어설펐던 은희가 세상을 알기 위해 퍼덕이는 날개짓이다. 삶과 죽음,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찾아가기까지. 우울할 땐, 한 손가락 손가락 움직여 보면서 극복해 볼까 한다. 과연 영지 선생님이 들여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가혹한 1994년 여름, 그 해 은희는 아프고 아름다운 세상과 만났다. 그렇게 은희 삶에도 빛이 한 움큼 들어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장혜령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벌새 김보라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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