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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특별하게 볼 일 없으면 나하고 같이 가자."

서울 사는 나는, 아무리 자주 찾자고 마음 먹어도 고향 제주 방문이 일 년에 겨우 두어 번이 전부다. 작년에는 벌초와 추석 때 두 번 왔다.

올해는 여름 휴가를 겸해 온 가족이 함께 왔다. 농사를 한창 지으실 때는 아들이 내려오면 시킬 일을 미리 빼곡히 준비해 두시던 어머니다. 하지만 요즘은 건강이 많이 안 좋아서 겨우 텃밭 정도나 일구고 있다. 때문에 휴가 온 아들에게 어디 가자고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어젯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과음으로 느지막하게(하긴 시골에서 느지막하다고 해야 아침 8시 즈음이니) 일어나는 차였다. 어머니는 벌써 마을 한 바퀴를 돌고 잔 일들을 일찍 챙겨두고 돌아오면서 거절하지 못할 부탁을 한다.

"그러시죠. 오늘 태풍 온다고 어디 놀러 가기도 애매한데 볼 일 있으면 보러 갑시다."

그제서야 서랍 깊숙이 있던 봉투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

4.3 희생자 및 유가족 결정 통지문

희생자 : 김ㅇㅇ 1948. 12. 11. 사망
신고자 : 희생자의 사실상 녀. 1949. 4. ㅇㅇ. 생

(중략)

위와 같이 희생자 및 유가족으로 결정됐음을 통보합니다.


이미 15년 전에 발행된 것이다. 이 통지문을 받기 앞서 어머니는 4.3 특별법 통과와 함께 피해자 접수를 받을 때 신청을 하신 바 있다. 

"이렇게 통지를 받았는데 남들에게는 무슨 혜택도 주고 한다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이 통지문 이후로 아무 연락이 오는 것도 없고 혜택도 없고 하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겠다."

어머니는 변씨다. 외삼촌들도 모두 변씨다. 하지만 4.3사건에 어머니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아주 나중에서야 알았다. 언제쯤인지 기억도 정확하진 않지만 중학생쯤 됐을 때 무심한 듯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해줬다. 더 물을 수도 없었다. 그때까지도 내 외할아버지는 변씨였다.

그리고 다시 수년이 지난 후에야 돌아가신 분은 김씨고 어머니는 유복녀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외할아버지의 이름 석자를 제대로 안 것은 그 통지문을 통해서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4.3평화재단이라는 곳이 있었다. 찾아가 보니 어머니는 이미 여러 번 다녀간 곳이었다. 매년 4.3 기념식이 열리는 4.3평화공원 내에 있었다. 어머니도 해마다 이곳을 찾았다. 직접 대통령의 목소리로 위로를 받기도 했다.

15년 만에 알게 된 사실에 허탈
 
4.3 평화공원 어머니가 희생자 비석에서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찾고 있다.
▲ 4.3 평화공원 어머니가 희생자 비석에서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찾고 있다.
ⓒ 강봉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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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게 조성된 공원 내에 깨끗한 시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우리의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새기는 장소가 되고 있었다.

하필 재단에 도착하니 낮 12시. 점심시간. 참 난감했다. 산골짜기에서 또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일단 들어가 보자고 들어갔는데 다행히 재단 직원들은 불평 하나 없이 맞아 주었다.

들어서자마자 15년 전 받은 통지문을 보여줬다. 우선 유족으로 등록돼 있는지 확인해보겠다며 전산을 확인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족으로 등록돼 있지 않은데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이건 유족이 없다고 통지된 통지문입니다."

그제서야 자세히 들여다보니 가운데에 '유족 없음'이란 글씨가 보였다. 제목이 유족 결정 통지문이고 마지막에 '유족으로 결정됐다'는 표현이 분명 있는데도 그 내용은 유족이 아니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알고보니 유족이다, 아니다를 통보하는 양식은 같고 중간 내용만 달랐다.

"희생자는 확인 됐습니다. 하지만 희생자에게는 유족이 없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혹시 희생자의 딸임을 밝힐 수 있는 문서가 있습니까?"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얼굴도 본 일이 없다. 외할아버지는 48년 12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다음해 4월에 태어났다. 당시에 세상에 있지도 않은 사람의 호적으로, 그것도 4.3에 연루돼 죽은 사람의 딸로 신고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편이 죽은 뒤 외할머니는 개가하셨고 어머니는 새아버지 호적에 등록됐다.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세상 어디에도 어머니와 희생자를 이어주는 기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족을 신고하고 등록하는 일은 도청 4.3지원과에서 합니다. 더 자세한 것은 거기에 물어보세요."

다시 도청으로 향했다. 그때만 해도 설마 했다. 그 난리 통에 태어난 사람이 단지 호적에 등록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유족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신고 기간이 아니고 연락처를 남겨 주시면 신고 기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마치 신고만 하면 등록될 것처럼 말했다. 그래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혹시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 있나요"하고 물었다.

"어쩌면 변호사를 만나서 물어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호적 등록을 하려면 아마 법원에 소송을 해야 할 겁니다."
"아니, 4.3 희생자 유족 등록을 하는데 소송까지 해야 합니까?"
"원칙적으로 호적에 등록돼 있지 않으면 유족 등록이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DNA 검사를 해야 할 겁니다."

특별법까지 만들었다면 당시 특별한 상황까지 인정해야

결국 국가의 폭력으로 희생됐는데 또 그걸 극복하는 방법은 소송밖에 없는 것인가. 이제 와서 무슨 수로 50여 년 전에 죽은 사람의 딸임을 밝힌단 말인가. 누군가의 무덤을 파헤쳐 DNA를 구한들 그게 당시 희생자임을 그들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외할아버지는 1남1녀였다. 이미 외할아버지의 누나도 돌아가시고 없다. 이제 와서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고종사촌들의 DNA를 구하러 다녀야 하는가.

사실 따져보자면 어차피 그날 그 자리에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어디에도 기록이 없고 어떻게도 검증할 방법이 없다. 다만 당시 주민들의 증언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도 당시 희생자의 아내가 누구였는지, 뱃속에 아이가 있었고 어떻게 태어났는지 증언해줄 사람이 많이 남아 있다. 아직도 희생자의 아내, 즉 외할머니는 정정하게 살아 계신다. 굳이 필요하다면 그들이 직접 찾아와 증언을 듣고 확인하면 되는 일이다.

법적으로 희생자의 상속녀로 인정해달라는 의미가 아니다. 일가 친척들이 팔아먹은 재산을 되돌리겠다는 의미는 더욱 아니다. 다만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사람의 자녀로서 그로 인한 피해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제는 국가가 그 왜곡된 삶을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다만 그 얼마의 보상금을 받자고 하는 일이 아니다. 만일 보상금을 받자고 했다면 15년 전 통지문을 지금까지 간직하고만 있었겠는가.

국가가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특별법까지 만들었다면 당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상황까지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사법부 판단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무슨 화해를 하고 무슨 용서를 하는가.

"어쩌면 진아영 할머니가 가장 확실히 보상을 받았네요."

돌아오는 길에 내가 이야기를 꺼냈다. 진아영 할머니는 바로 우리 동네 출신이다. 4.3때 날아온 총알에 턱을 잃었다. 평생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모습이 흉하다며 광목 천으로 가리고 다녔다. 나도 그분의 비참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맞다. 평생 고생하면서 살았지만 그래도 그 할머니는 살아 생전에 다 인정 받았다. 4.3 하면 가장 먼저 소개되고 모든 사람이 위로해 줬다. 사실 제일 불쌍한 사람은 피해를 보고도 피해자라고 말도 못하는..."

어머니는 말을 채 못 잇는다.

아흔아홉의 우리 외할머니는 아직도 4.3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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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저보고 이선균 닮았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