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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작가회의에서는 '2019 대전방문의 해'를 기념하여 연속기고를 시작합니다. 대전의 볼거리와 즐길거리, 추억담을 독자들과 나누고 대전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 등으로 나눈다.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내 인생의 소년기는 불운했다.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불운은 청년기까지 계속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72년, 대학입시에 실패해 재수를 하기 시작했다. 1973년, 재수를 하고나서도 다시 또 가고 싶은 대학에 가지 못했다. 공부를 하지 않고 빈둥거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1973년 3월 대전에 있는 후기대학에 입학을 했다. 신입생 시절 내내 불운을 탓하며 허랑방탕한 시간을 살았다. 신입생으로 대학에 다니면서도 3수를 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1973년 10월쯤이 되어서야 내 운명이 지금의 이 대학을 졸업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깨달음을 갖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문학, 그 중에서도 시였다. 학내 문학서클 '여명'에 발걸음을 하면서였다. 시인이 되는 데는, 시를 쓰는 데는 꼭 서울의 명문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되지 않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박용남이라는 선배

때마침 이 대학에서는 김현승 시인이 강의를 했다. 그때의 여명문학회에는 여러 선배들이 모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선배가 있었는데, 박용남이었다. 시를 쓰는 한 해 선배이지만 나는 이내 그가 좋아졌다. 기회를 보아 그냥 말을 놓아버렸다. 나 혼자서만 그를 친구로 삼은 것이었다. 그도 내 반말을 습지처럼 받아들였다. 그런 뒤부터 나는 줄곧 그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말은 친구지만 제자나 다름이 없었다. 

박용남은 매우 까다롭고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당시의 대학생들이 보여주는 상식적인 모습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이 그였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여기저기 술집에 모여 많은 얘기를 시끄럽게 지껄여댔다. 하지만 그는 술집에 몰려가 떠들어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예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이 그였다.

술 대신 그는 차를 즐겼다. 술보다는 차를 좋아하는 것이 그였다. 차 중에서도 그는 직접 체를 받쳐 내리는 원두커피를 좋아했다. 나는 자주 인동의 그의 집 다락방에 쳐들어가 원두커피를 얻어 마셨다. 마실 때마다 이 쓴 커피를 무슨 맛으로 마시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커피를 좋아하는 만큼 박용남에게는 당연히 단골 다방이 있었다. 대전역 앞 이층의 대성다방이 그곳이었다. 그를 따라 나도 이내 대성다방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나만 단골손님이 된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삶의문학>의 동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열댓 명의 친구들이 아지트로 삼은 곳도 대성다방이었다. 대전역 앞 이층의 대성다방에 가면 쉽게 박용남을 비롯한 김영호, 이은식, 김종관, 조만형, 윤중호, 전인순, 조기호, 전무용, 강병철, 김미영 등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들 심심하고 외로우면 대성다방에 죽치고 앉아 친구들을 기다리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대성다방
 
다방 사진. 본문 내용과는 관련 없는 자료사진.
 다방 사진. 본문 내용과는 관련 없는 자료사진.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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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다방의 사장님은 키는 작달막하지만 마음은 크고 넓은 아주머니였다. 살집이 통통한 대성다방 사장님은 박용남을 비롯한 우리 모두를 애틋해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대성다방에는 우리 같은 대전지역의 문학 지망생들은 물론 기존의 시인들까지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대성다방이 이가림 시인도, 윤삼하 시인도, 김종철 평론가도 자주 찾고는 하는 대전 지방의 명소가 되었다.

계절은 늘 빠르고 쉽게 흘러갔다. 가을이 되어 대전역 앞의 큰 길을 걷다보면 가게마다 내다놓은 국화꽃 향기가 후각을 깊이 자극하고는 했다. 더러는 지하다방에서 기어 올라오는 커피향도 코끝을 유쾌하게 했다. 유신정권의 말기라 젊은 학생들은 모든 행동에 규제를 받아야 했다. 수시로 여기저기서 검문을 당했는데, 그런 때는 어떤 절망이 불러일으키는 알싸한 쾌감을 맛보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을 견디다가 보면 금세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대전역 앞의 거리를 걷다가 보면 두 손과 두 발이 꽁꽁 얼어붙기 일쑤였다. 그런 날 대성다방 안에서는 톱밥난로가 활활 타오르고는 했다. 대성다방에 들러 펄펄 끓는 엽차 몇 잔을 마시면 어느덧 온몸이 따듯해졌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활기가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대성다방에 오고갈 무렵 나는 늘 옆구리에 비닐카버의 낡은 노트를 끼고 다녔다. 더러는 완성된 시들도 적혀 있었지만 대부분은 쓰다만 시들로 가득한 공책이었다. 비닐카버의 낡은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친구들 모두 시창작을 위한 노트 한 권씩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그 무렵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보이던 친구는 나를 비롯해 박용남, 윤중호, 전인순 등이었다. 그러니까 대성다방은 앞에서 말한 친구들이 모여 자작시를 내놓고 합평을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내 시의 선배인 박용남은 그 무렵 ROTC 장교로 입대를 했다. 나 혼자 쓸쓸하게 역전통의 거리를 헤매다닐 무렵, 그러니까 1970년대 말 어느 날 대성다방은 문을 닫았다. 갈곳이 없어 한동안 막막했다. 잠시 쉬던 대성다방은 오래잖아 장소를 바꿔 신장개업을 했다. 사장님은 역시 통통한 몸매의 후덕한 아주머니였다. 새로운 대성다방은 역전에서 좀 떨어진 동양백화점 뒤쪽에 있었다. 근처에 두부두루치기로 유명한 청양식당이 있어 주머니가 가벼운 나와 친구들로서는 훨씬 좋았다. 다방의 크기도 훨씬 컸다.

<삶의문학> 친구들의 아지트도 당연히 동양백화점 근처의 이 대성다방으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우리는 전두환의 문화탄압에 대항하는 종합문예무크지 <삶의문학>을 기획했다. 대성다방이 없었어도 <삶의문학>이 태어났을까. 대답하기 어렵다.

1980년대가 막 시작되는 때 <삶의문학> 친구들은 이 새로운 대성다방에 모여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삶의문학> 친구들이 김현장이 썼다는 '광주 살육작전'이라는 유인물을 청주에 가서 뿌리고 대전으로 돌아와 다시 모인 곳도 이 대성다방이었다. 대성다방의 추억을 생각하면 역전 근처의 옛 모습이 먼저 떠오르지만 <삶의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정작 많은 일은 도모하던 곳은 이곳 대성다방이었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 <삶의문학> 친구들에게는 더없는 추억의 장소인 대성다방! 이곳에 모이던 친구들 중에는 벌써 불귀의 객이 된 사람도 없지 않다. 윤중호 시인, 정영상 시인, 이규황 시인…….

다들 문학을 통해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넉넉한 세상,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다가 먼저 저승을 간 친구들이다. 1985년 여름에는 이른바 '민중교육'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던 친구들……. 이제는 다 망고희(望古稀)의 나이가 되어 있다. 대성다방과 이들 친구, 어찌 그립지 않으랴.

대성다방을 추억하는 필자의 시 한 편을 인용하며 여기서 글을 맺는다.
 
싸락싸락 싸락눈이 내려 쌓이던 겨울, 털모자도 가죽장갑도 없었지 양 볼에서는 차가운 솜털들이 보숭거렸고

스물한 살, 곤색 점퍼 위로 나뒹굴던 싸락눈만으로도, 가슴은 쩍쩍 금이 갔지 붉게 아팠지

아픈 마음으로 역전 대성다방의 낡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고는 했지 멈칫멈칫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톱밥난로 푸스스 타오르던 왼쪽 구석, 하얀 손들 번쩍번쩍 들려지고는 했지

옆구리에는 비닐커버의 노트 한 권씩이 끼어 있었지 두툼한 노트 속에는 토닥거리다 만 화장기 가득한 언어들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오늘이며 내일의 역사를 지껄여대다가는 더러 노트를 바꿔 읽으며 침을 튀기기도 했지

조국이니 민중이니 하는 말들은 언제나 가슴을 쳤고, 급기야는 반유신의 불화살로 날아가고 싶어 온몸이 뾰쪽뾰쪽 날이 서기도 했지

다방이 문을 닫는 밤, 역전 통으로 걸어 나가면 금방과 양복점이 가득한 거리에서는 자주 길이 끊겼지 

기다릴 수도 없이 멈출 수도 없이 내려 쌓이는 눈 더미, 함박눈 더미, 눈알 부라리며 내려다보는 가로등 불빛만으로도 가슴의 상처는 쉽게 덧났지

터덜거리는 구두코를 따라 무심코 걷다 보면 성탄을 알리는 대흥동 성당의 종소리, 아기예수를 경배하는 마음이 절로 솟았지

이제 대성다방은 없어졌지 싸락눈 내리는 겨울, 모자도 장갑도 없이 두 손 호호 불며 키우던 꿈도 미래도 너풀거리는 은발이 다 덮어버렸지 너풀거리는 은발 너머로 또 세월은 가고 오고.

- 이은봉, '싸락눈, 대성다방' 전문

이은봉

시인, 1983년 <삶의 문학> 제5집을 통해 평론가로, 1984년에는 <창작과비평>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한성기문학상, 유심작품상 송수권 시 문학상등을 수상했으며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시집 <좋은 세상><봄 여름 가을 겨울><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무엇이 너를 키우니><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길은 당나귀를 타고> 등 다수 평론집 <실사구시의 시학><시와 리얼리즘><진실의 시학><시와 생태적 상상력> 연구서 및 시론집 <한국현대시와 현실인식><화두 또는 호기심> 등을 출간했다. 현재 대전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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