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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포진 통증으로 불편함을 겪던 차에 게랄트 휘터 교수가 쓴 <존엄하게 산다는 것>(박여명 옮김, 2019)을 읽었다. 그나마 나이 들어 아파도 존엄을 잃지 않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휘터 교수는 21세기 '모멸의 시대'를 헤쳐가기 위한 내면의 나침반으로 '존엄'을 말했다. 여기 '존엄'은 <세계인권선언>에서 천명하듯 천부적 인권으로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당대 우리가 그 의미를 지켜내기 위해 성찰하는 오랜 과정 속에 형성되는 사고방식이자 삶의 태도다.

모멸과 위기(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의 삶을 강인하게 버텨내게 하는 힘, 그것은 인간다운 삶의 '존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는 게 이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메시지다.
 
<존엄하게 산다는 것> 책 표지 게랄트 휘터 교수의 최신작 <존엄하게 산다는 것>(2019)은 독일 아마존 톱10에서 26주 연속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다.
▲ <존엄하게 산다는 것> 책 표지 게랄트 휘터 교수의 최신작 <존엄하게 산다는 것>(2019)은 독일 아마존 톱10에서 26주 연속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다.
ⓒ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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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존엄한 죽음을 말하면서도 막상 존엄한 삶을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존엄을 '삶의 형식(방식)'으로 제안하는 휘터 교수의 관점은 매우 독창적이다. 그는 뇌 과학자로서 뇌 과학의 지식에 기초해서 '존엄'한 삶을 다룸으로써, 인문학과 과학이 어떻게 접합(소통)될 수 있는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필자가 보기에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존엄'한 삶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이타적'(自利利他的) 삶의 전형이자, <중용>에서 하늘이 명하는 본래성(즉, 天命之謂性)에 따라 그 성(誠)을 다하는(즉, 盡性) 삶 그 자체다.

이 책은 보다 빨리 혹은 보다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비법이나 공식을 알려주는 흔한 '자기계발서'(효율성이나 성공을 위한 가이드)가 아니다. 저자는 이런 질문에서 이 책을 기필했다.

•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스스로가 설정한 내면의 나침반에 따라 어떤 생각을 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
• 우리를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해줄 '다른'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지식폭발 시대에 주입된 지식이 아니라 스스로 선별해 수용한 지식일지라도 종종 그 영향력은 생각보다 미미할 수 있다. 우리에게 실제로 활용되는 지식은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그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다.

신영복 교수는 마지막 강의 <담론>(2015)에서 머리에서 가슴, 그리고 가슴에서 다리까지의 거리는 참으로 멀다면 멀다고 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행동에 변화가 일어날 리 만무하다. 어쩐지 당대 우리의 삶은 방향을 잃은 듯하다.

하지만 인간은 뇌구조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길을 잃게 되어 있다. 여타 동물과 달리 인간의 뇌는 생각과 감정, 행동을 유발하는 뉴런의 연결패턴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 모든 인간에게는 한 개인으로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를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개인적 경험을 통해 뇌에 뿌리를 내린 뉴런의 연결 패턴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데 매우 중요하다. 뉴런의 연결 패턴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한 사람이 관계를 맺는 '유의미한 상대'가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 중에는 각자의 인생에서 타인과의 공존에서 형성되는 패턴도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특별한 패턴과 가치, 신념과 태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함께 찾고 싶은 것은 '내면의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 외적 요구로부터 자신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나침반, 관습적 태도로부터 본래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지켜 줄 나침반. 세상의 모든 유혹과 약속, 상품들보다 더 강인하고 확고하게 뿌리를 내릴 내면의 힘, 그게 '내면의 나침반'이다.

저자는 신경생물학적 측면에서 이것을 '내적 표상'이라 했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적 표상. 그것은 우리 뇌를 무질서의 상태로부터 지켜주고, 그것을 통해 장기적으로 에너지 소비량을 줄여주는 표상이다. 그 표상을 일컫는 아름다운 단어가 바로 '존엄'이다.

'존엄'은 내면에 확신으로 깊게 뿌리 박혀 인간으로서 한 사람의 특성을 부여(규정)하고, 그 고유의 인간됨이 행동으로 표출되도록 만드는 관념, 즉 내적 기준이자 초실천(meta-praxis)의 기준이다. 해서 "자신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된 인간은 결코 외적인 것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게 저자의 핵심 논지다.

우리에게 존엄하지 않는 삶이란 무엇일까?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나 생명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저자는 존엄하게 산다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단다. '방랑'에 빠져 놀던 소년 시절 숲속에서 길을 잃은 식물 채집 노신사를 만난 경험. 그것은 여태까지 해온 소년의 방랑보다 한 차원 높은 경험이었다. 저자는 어릴 적 경험을 이렇게 회상한다.
 
숲길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기 전에 아무것도 아니었을 모든 것에서 감동을 이끌어 냈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특별하게 느껴진 이유는 신사의 설명 덕분이었다. 지금까지 내게 인생을 가르쳐 주었던 다른 어른들과의 그것과 달랐으니까. 대체 무엇이 달랐을까? 다른 어른들 역시 그 동식물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해주었다. 다만 그들은 주로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중략) 하지만 이 신사는 달랐다. 그는 똑같은 동식물을 가리키며 우리가 보고 듣는 이 모든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단지 그 아름다움만을 강조했던 것이다. 우리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더 집중해서 귀를 기울일수록 신사는 흥이 더 올랐다. (박여명 옮김, 2019, pp.31-32).
 

그 후로부터 소년에게는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는 태양이 내리쬐는 날이면 자연 속으로 갔다. 그렇게 걷고, 돌아다니고, 보고, 감탄하는 경험을 즐겼던 게다.

그 노신사를 만난 지도 50년이 지나 저자에게는 신경생물학자로서 인생이라는 마법과 세상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그에게 큰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가 읽은 책 가운데 마음에 가장 남는 책으로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 Carson)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1962)을 꼽는다.

이 책은 DDT라는 살충제 사용이 지구의 생명을 파괴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개발의 연대(1960〜1970연대)에 우리가 외면하는 사이 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DDT 사용이 금지된 지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더 지독한 살충제는 오늘날까지 남아 지구를 죽이고 있다.

저자는 괴팅겐 인근 어느 시골 정원에 앉아 왜 이렇게 고요한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바람이 살랑거리고 햇살이 비추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 하지만 보리수에서 윙윙거리던 벌떼의 소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2017년 마지막 남은 양봉업자마저 일을 접으면서 괴팅겐 지역의 양봉업도 끝이 났다.

1960년대 초만 해도 환경운동가들은 인류가 필요로 하는 생태자원 가운데 지구상에 남아 있는 양이 고작 3분의 2에 불과하다고 했으나, 지금 상태라면 생태자원이 모두 소진되어 2030년에 이르면 인류의 식량과 그에 필요한 자원의 수요를 감당하는 데에만 두 개의 지구가 필요하게 될 것이란다.

2050년에는 세 개의 지구로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지구가 한 해 동안 재생할 수 있는 생태자원을 모두 써버린 날을 '지구 생태용량 초과의 날'(Earth Overshoot Day)로 잡았을 때, 2년 전 지구 생태용량 초과의 날은 8월 13일이었고, 1년 뒤에는 이로부터 11일이나 앞당겨졌고, 금년은 7월로 당겨졌다.

효율성과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체제는 불평등의 심화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와 환경자원 고갈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익창출과 삶의 편의를 끝없이 추구하는 동안 인간의 존엄한 삶은 계속 훼손되고 있다.

우리가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동안 지구 한 편에는 전쟁과 기아 속에 당장 내일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문제, 아이들을 살려야 하는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하지만, 이들에게는 '국적을 가진 사람'만이 존엄하다. 모름지기 나라선택과 부모선택을 신중히 하라! 현대인에게 뼈저린 격언으로 다가온다.

인터넷은 분별력 잃은 초연결사회로 사람들을 바빠지게 한다. 체험해 볼 것을 끊임없이 제안하고, 기분 전환을 하라고 끝없이 유혹한다. 넘쳐나는 정보들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은 늘 생기를 잃은 채 모니터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스마트폰 역시 단 1초도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우리와 관련 있는 듯 여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두뇌의 처리 능력을 넘어선 정보를 폭식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과 관계 없는 일로 지나치게 분주하며, 정작 자신을 돌볼 시간이 없다.

환경과 교육, 의학과 과학기술이 만든 현대인의 삶이 우리를 어떤 결과로 몰아가고 있는가? 경제성장이 우리에게 축복인가 재앙인가? 지금까지의 방법이나 방향설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할까? 저자는 자기 집 정원 나무 그늘에서 스스로에게 자문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자신은 물론 타인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내면의 나침반. 바로 존엄이 그 답이었다. 인간 내면의 다양성, 즉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잠재력을 억누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찌해야 할까. 그 사람에게는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자신이 생각하는 존엄이라는 가치에 부합하는지를 돌아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생각과 행동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에서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행동이 스스로의 존엄에 대한 인식에 모순될 경우 내면에서 일어나는 동요를 느껴봐야 한다는 말이다. 존엄한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이 책, p.60).
 

각각 다른 수원지에서 흘러나온 시내와 강이 마침내 만나 하나의 거대한 대양을 이루듯, 인류역사는 서로 다른 사회 속에서 형성된 자아상과 세계관이 서로 만나 확장되는 과정으로 이어져 왔다. 21세기에 이르러 인류를 하나로 엮어주는 것(인류공동체/지구공동체)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로도, 윤리 혹은 도덕적 가치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각자의 경험만이 서로 다른 개인을 하나로 엮어주는 공통의 관념이 될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지극히 인간다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가장 시급한 과제다.(이 책, p.107).
 
 
영장류는 특정 구성원을 주시하고 있다가 그가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시범을 보이면, 그 게 흥미롭고 유익할 뿐만 아니라 매력적일 경우 이내 그것을 따라한다. 인간에게 사회적 학습은 바로 이렇게 진행된다.

과거에 개인이 겪은 경험들은 앞으로 개인적․사회적 경험들을 통해 끊임없이 재현된다. 그 과정에서 더 이상 활성화 되지 않는 신경망들은 위축되고, 자주 활성화시킨 경험과 행동패턴은 점점 강해지면서 신경망 패턴의 형태로 뇌 안에 구조적으로 저장된다. 만약 그 과정에서 개인의 창의력과 자율성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이라면 자기 존엄성을 인식할 가능성 역시 더 높아진다.

존엄이라는 관념은 인간 뇌의 조직과 기능방식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하나의 '표상'으로서, 분명하게 의식할 수 있는 성향인 것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존엄과 타인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삶과 공존에서 이토록 무능하단 말인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흔들고 위협하는 사건을 당하면 해결책을 찾기 마련이다. 근데 해결이 시급한 위기상황에서는 급한 불을 먼저 끄는 것이 장기적 해결책보다 더 효율적인 것처럼 여긴다.

인간이 존엄한 인생에 대한 신념, 표상을 형성하고, 그것을 토대로 인생과 삶의 태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열역학 제2법칙'과 관련이 있다. 이 법칙은 에너지가 자연의 모든 현상에 고르게 분배된다는 논리다. 해서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내는 자기조직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열역학 제2법칙'을 통해 우리는 인간 뇌가 기능하는 방식과 구조를 결정하는 기본 원리를 도출할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내부적 질서를 세워 해당 시스템의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 기본적 원리 때문에 인간의 뇌에 때로 과부하가 발생한다.

우리 뇌는 휴면 상태에서도 가용 에너지의 20%나 사용한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 상황에 처하거나 새로운 뭔가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비량은 급격하게 치솟는다. 이때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게 '감정의 변화'다. 이런 감정변화는 결과적으로 몸에까지 영향을 주어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해서 우리 뇌는 스스로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 이것은 뇌기능의 원리이기도 한 '단순화' 작업이다.

어른의 뇌와 마찬가지로 모든 아이들의 뇌에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을 경우 자동으로 활성화되는 반응기제가 존재한다. 이는 지식이나 신념 같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일종의 감각이나 불쾌한 감정으로 나타날 뿐이다. 뇌의 기능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세탁기의 디스플레이에 오류 발생을 알리는 빨간 램프와도 같은 것이다.

아이들은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이를 직감하며 빨간 램프에 불이 들어온다. 아이들은 이 감각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감각은 미세한 감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아이들이 마주하는 것은 어른들이 임의의 목적과 목표를 위해 만들어낸 세상이다.

이 무렵 아이들이 자신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결정적으로 내뱉는 말이 "엄마는 나빠!"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본보기가 되는 어른과의 관계를 존엄하지 않는 방식으로 바꿔놓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자신의 존엄성까지도 해치고 만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갈수록 더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목적과 평가, 전략을 위한 대상이 되고 만다. 가정에서도 아이가 존재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으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도 여전히 사랑받는 것을 아이가 느끼고 경험하도록 이끄는 부모는 많지 않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인식할 수 있도록 서로를 깨치게 할 수 있을까? 어디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것인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아이들에게 존엄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최초의 교육기관은 바로 유치원이다. 하지만 이제 유치원은 '어린이 정원'이 아니라 '어린이 주간보호소'에 불과하다. 아이들은 가지시렁이 아니다. 열매를 많이 맺도록 잘라낸다거나 철사로 고정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긍정적 자아상은 일방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과의 유익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자아 성찰과 자아형성의 과정에 급행은 없다. 아이가 보호받는 가운데 필요로 하는 만큼의 여유가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 공부라는 것은 원래 여유로움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자기결정과 자기발견을 위해 아이들에게 필요한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 아이들은 수업을 듣고, 지도를 받고, 통제 당하며, 감시되고 평가 받는다. 어른들의 기준에 맞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당하는 것이다. 저자는 유치원과 초중등학교, 직업학교와 대학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존엄한 삶을 중요한 문제로 인지하고 있기나 한지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한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인식은 존재 그 자체로 스스로의 존엄함을 드러내고 있는 부모와 동료 혹은 선배, 그리고 교사들의 존엄한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 학습 가능할 뿐이다.

저자는 한 사회에 존엄을 인식한 이들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확실한 사례로 바로 동유럽 국가들의 몰락을 든다. 더 이상은 국가압력의 수단이 되는 걸 거부한 시민들이 "우리가 주권자다!"는 구호를 외치는 데 동참했다. 마침내 억압의 체제가 힘을 잃고 붕괴하기에 이른 것이다.

주체성과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요구를 무참히 짓밟는 관계는, 지금까지 인간과 사회가 축적한 잠재력을 억누르는 단 한 가지 원인이었다. 시스템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에 드는 에너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그 시스템은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대형교회나 대형병원이 그 좋은 예다. 마치 인간들이 떠나버린 황무지처럼.

저자는 1장에서 점을 찍었던 원이 완성되는 지점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여전히 나는 괴팅겐 인근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다. 나비, 도마뱀과 멧새, 제비꽃이 왜 보이지 않는지를 자문하며'.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누구나 매순간 다르게 살아갈 것을 결정할 수는 있다. 조금 더 스스로에게 또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존중하며 살아가겠다고. 자기 자신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조금은 호기심 넘치는 삶을 살겠다고. 에너지가 충전된 것 같은 기분을 몸으로 느끼자. 그러면 움직이고 싶고, 때로 경이로워질 게다. 이렇게 당신은 존엄한 존재가 되어 스스로를 사랑(自愛/自尊/自利)하게 될 게다.

소로(H. D. Thoreau)는 <월든>에서 "나에게 살아 있다는 건 너무나 소중하다. 나는 깊게 살며 인생의 정수를 모조리 빨아들이고 싶었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스스로 존엄한 삶을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존엄하게 산다는 것 - 모멸의 시대를 건너는 인간다운 삶의 원칙

게랄트 휘터 (지은이), 박여명 (옮긴이), 울리 하우저 (정리), 인플루엔셜(주)(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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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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