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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6월 22  전북두레풍물축제는 수백년된 노거수 9그루가 줄지어 서있는 정읍시 송산동 일원에서 열렸다.
▲ 마을 입구부터 수 백년된 노가수가 우뚝 서있어 유래깊은 마을임을 나타냈다.  2018년 6월 22 전북두레풍물축제는 수백년된 노거수 9그루가 줄지어 서있는 정읍시 송산동 일원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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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유지화(74, 정읍농악 전수자)를 처음 만난 것은 2018년 6월 22일(금요일)로 전주기접놀이가 주관하는 전라북도 두레 풍물축제의 일환으로 (사)정읍농악보존회와 정읍시 송산동 일원에서 가졌던 합동 공연에서였다. 이날 공연은 수백 년 수령의 정자나무 9그루가 버티고 있는 마을을 방문하는 기접놀이 농악대를 정읍농악대가 영접 하는 것으로 시작해 종산, 송령 마을을 거쳐 송학의 마을회관인 송정회관에서 두 농악대가 어우러지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공연의 이모저모를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던 필자의 눈에 상쇠로 정읍 농악대를 이끌던 그녀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행렬의 맨 앞에서 상쇠가 농악대를 이끌기에 어느 공연에서든지 상쇠가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날 그녀가 필자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상쇠여서가 아니라 손짓, 몸짓, 꽹과리나 채의 움직임만으로 농악대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아서였다.  

예사롭지 않은 솜씨
 
 120여명의 두 농악대를 혼연일체로 이끌고 있는 유지화
▲ 능수능란하게 농악대를 이끄는 유지화(74,. 정읍농악 쇠보유자)  120여명의 두 농악대를 혼연일체로 이끌고 있는 유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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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농악대는 물론이려니와 이날 현장에서 처음 만나는 기접놀이 농악대까지 하나로 이끄는 유지화(74, 정읍농악 쇠 보유자)
▲ 두 농악대를 일사분란하게 이끄는 유지화(74, 정읍농악 쇠 보유자)  정읍농악대는 물론이려니와 이날 현장에서 처음 만나는 기접놀이 농악대까지 하나로 이끄는 유지화(74, 정읍농악 쇠 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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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고 격정적인 휘모리에서는 치열한 전투를 이끄는 장수의 눈빛으로, 느리고 평화로운 굿거리에서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시선으로 농악대의 숨소리까지 능수능란하게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이끌고 있는 정읍농악대는 그렇다 하더라도 현장에서 처음 어우러진 기접놀이 농악대까지 그녀의 가락에 끌려들고 있었다. 120여명의 두 농악대가 그녀와 한 호흡으로 어우러진 그날의 공연은 감동 그 자체였다.    
공연에 참여하지 않고 홍보를 담당한 필자는 늘 사진을 찍으며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러다 보니 공연이 끝나고 공연자나 관객들의 표정이나 몸짓만으로도 그 공연의 열기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그날 공연은 어쩌면 이 시대에 대할 수 있는 마지막 문화재의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남우도 농악은 평야지대에서 발달한 농악으로 이날,  화려하며 다양한 가락과 다양한 개인놀이의 역종적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 호남우도농악으로 화려한 정읍농악의 모습  호남우도 농악은 평야지대에서 발달한 농악으로 이날, 화려하며 다양한 가락과 다양한 개인놀이의 역종적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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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농악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농경사회의 필요에 의해 생활의 일부로 행해지던 농악이기에 자연스럽게 몸에 익는 과정을 통해 전승되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전승되던 농악을 강의식으로 가르치고 배우다보니 서양음악처럼 정형화되고 규격화 되어 그 본질을 잃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필자가 일상 속에서 농악을 온전히 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마지막 세대의 공연을 직접 본 것이어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필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그녀를 취재하기 위해 지난달 31일 전라북도 정읍시 정읍사로에 위치한 정읍농악전수회관을 찾았다. 다음은 전수회관 사무실에서 나눈 대화를 요약한 글로,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있었던 쇠와 장구수업을 참관하며 온전히 하루 일정을 함께했음을 밝혀둔다.

구전심수(口傳心授,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을 통하여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도록 가르침을 이름)라는 말이 그녀가 농악을 배운 과정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라 생각한다. 호남 우도 농악은 가락이 다양하고 화려한 게 특징이다. 거기에 개인놀이가 다양하게 발달했는데 상쇠는 백로나 오리의 깃털로 만든 부포놀이를 한다. 당대에 부포놀이는 부안농악의 나금추(1938~2019)와 정읍 농악의 유지화(1945~)를 드는 데 누구나 이견이 없다.  

그 중 유지화의 부포놀이는 '거들먹거림조차 흥이 되고 아름다움이 된다'는 평을 받는다. 거들먹거림조차 아름다워 흥이 되고 아름다울 수 있는 짓은 마음으로 배워 일상에서 몸에 배도록 익혔기에 이를 수 있는 경지일 것이다.

10살 심부름 길에 만난 농악
 
 이날 정읍농악전수회관에서는 쇠 수업 중 개인놀이로 보포놀아를 가르치치고 있었다.자신이 배운것처럼  말로 전하고 몸으로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
▲ 부포놀이 강습에 여념이 없는 유지화(74, 정읍농악 쇠보유자)  이날 정읍농악전수회관에서는 쇠 수업 중 개인놀이로 보포놀아를 가르치치고 있었다.자신이 배운것처럼 말로 전하고 몸으로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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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10살 소녀 때 심부름을 가는 길에 농악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어느 집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끌려 무심코 들어간 자리에서 배우기 시작해 몇 개월 만에 이를 알아챈 어머니에게 죽도록 맞아 물 한잔도 마시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집안의 모진 반대에 가출을 감행해 본격 예인의 길에 접어든 그녀는 26살에 여성 농악단을 창단해 이끄는 등 의욕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전국을 유랑하며 공연을 하다보면 객석이 좁을 정도로 잘되는 지역도 있지만 손님이 귀해 손해를 보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거기에 많은 인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함께 생활하다 보면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 종종 환자가 발생해 전북여성농악단, 아리랑여성농악단, 새마을농악단 등 여성 농악단 활동은 처참한 실패를 하고 만다. 이때의 활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우도농악의 명맥을 유지하는 역할은 톡톡히 한 것으로 훗날 평가 받는다. 
 
 서울부터 목포까지 여러대학을 다니며 후진 양성에 여념이 없는 유지화씨는 아 이날도 쇠, 장구를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 후진 양성에 여념이 없는 유지화(74, 정읍농악 쇠 보유자)  서울부터 목포까지 여러대학을 다니며 후진 양성에 여념이 없는 유지화씨는 아 이날도 쇠, 장구를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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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것은 낡고 후진 문화로 치부하며 근대화를 국가발전의 기치로 삼던 시대에 농악을 하는 예인으로 사는 일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운 길이어서 때려치우고 싶은 것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 이었지만 호남 우도 농악의 내로라하는 스승들(박성근, 김재옥, 김성낙 이상 쇠, 이명식, 김오채, 이상 장고 등)의 가르침을 받은 그녀인지라 쇠, 장구, 부포놀이 등 여러 분야의 재능이 워낙 출중해 중앙무대에서 활동을 하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한다.

정읍으로 농악을 배우러 다니던 때부터 거래하던 정읍의 악기상과의 인연은 그때도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가 어느 날 정색을 하고는 "인자 정읍 농악은 다 죽어 버렸소. 난다 긴다 하던 분들도 나이 들어 돌아가시거나 농악을 하는 사람이 없어진 게 그만둬 불고 정읍을 떠버렸소. 그래서 사람들이 뜻을 모아 한번 배워볼라고 하는디 가르칠 선생을 구할 수가 없어요. 정읍 와서 우덜 좀 갈켜 주소. 무너진 정읍 농악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어요"하더란다.

그때도 이미 '유지화 속에 정읍 농악이 있다'는 세간의 평이 있었던 지라 평생을 악기장사로 농악판을 누빈 그의 안목은 정확했던 것이다. 간청에 못 이겨 농악을 가르치러 정읍에 와보니 배우려는 사람들 300여 명을 모아놨더라는 것이다. 왕성했던 정읍농악에 대한 향수를 가진 노년층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모인 것을 보고 서울에서 정읍을 오가며 열심히 가르쳤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다보니 '정읍농악을 살리자'는 지역 여론이 일면서 정읍 국악원에 정식으로 강좌가 개설되어 그녀는 1993년에 정읍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러면서 '호남우도농악보존회'가 설립되고 그녀의 명성으로 인해 우도 농악을 배우려는 수강생들이 경향 각지에서 줄을 잇게 되었다. 전수관이 없어 타 지역에서 온 수강생들이 묵을 숙박시설이 마땅치 않아 지인들을 동원해 민박을 시켜가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정적으로 농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녀의 그런 각고의 노력과 지역에 모처럼 일어난 농악에 대한 열풍에 힘입어 1996년에 정읍농악은 전라북도무형문화재 7-1호에 지정되고 그녀가 쇠 전수자로 등재되니 정읍으로 거처를 옮긴지 3년 만에 이룬 쾌거인 것이다. 문화재가 되면서 정치권에서도 발 벗고 나서 외지에서 오는 전수생들의 숙박시설을 완비한 지상3층의 정읍우도농악전수회관을 짓게 되고 시립농악단 창단까지 이어져 호남우도농악의 본산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정읍농악의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쇠 장구 등을 배운 유지화는 "유지화속에 정읍농악이 있ㄷ자"는 ㅍ쳥을 받는다.
▲ 장구를 가르치는 유지화(74, 정읍농악 쇠 보유자)  정읍농악의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쇠 장구 등을 배운 유지화는 "유지화속에 정읍농악이 있ㄷ자"는 ㅍ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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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10대 소녀의 설레는 마음으로 농악을 만나 호남우도농악의 내로라하는 스승들에게 마음으로 쇠, 장구, 부포놀이 등을 배우고 몸으로 익혀 무너진 정읍농악을 일으켜 문화재로 만드는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74세로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대불대학교(세한대학교), 중앙대학교, 정읍호남우도농악전수회관 등에서 왕성하게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여기 정읍부터 목포, 당진, 서울까지 댕기며 갈치다보니 제자덜이 많은데 그 제자들에게 내 스승들이 그랬던 것처럼 큰 나무가 돼주고 싶은 게 내 마지막 바램이여. 사람마다 먹고사는 문제가 젤로 중한데 이는 농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라 돈이 얽히면 본질을 잃고 문제가 복잡해져.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최고로 경계해야 돼. 그라고 요즘 사람들은 농악을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뎀비는데 농악은 글케 하문 안 되는 거여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혀야 하는 거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2호 유지화(74, 정읍농악전수자)의 말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덧붙이는 글 | 계간지 사람과 언론(19. 가을호)에도 게재합니다


태그:#정읍농악, #유지화, #서치식, #전주기접놀이, #전통민속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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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2급 장애를 가진 전주시 공무원으로 하프마라톤 완주를 재활의 목표로 만18년째 가열찬 재활 중. 이번 휠체어 사이클 국토종단애 이어 장애를 얻고 '무섭고 외로워'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휠체어에서 마라톤까지"시즌Ⅱ로 필자의 마라톤을 마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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