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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2월, 우리 가족이 일주일 동안 머문 네덜란드 인상기다. 짧은 여행이라 영혼을 깨우는 깊은 통찰은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무뎌진 감각을 꼬집어 잠자는 감성 정도는 일깨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씁니다. - 기자말

점점 엷어지는 빛의 농도 속 마르크트 광장 앞에 우람하게 서 있는 신교회(Nieuwe Kerk)를 눈으로 맞았다. 관람 시간을 놓친지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외관이라도 뚫어지게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신교회
 신교회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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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09미터의 신교회는 델프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1496년에 지은 건물이 500년이 지나도록 최고 높이를 유지하며 랜드마크를 담당하고 있다니.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지난 세대를 다 때려부수는 우리 사회와 비교가 되었다.

신교회에는 네덜란드 독립의 아버지 오라네 공 빌렘 1세가 안장돼 있다. 그는 1584년 델프트의 자택에서 광신자에게 암살당했다. 암살범은 화승총으로 빌렘 1세를 쓰러뜨렸는데 이는 총으로 정치인을 암살한 최초의 사례다. 수많은 정치인들을 쓰러뜨린 암살 무기의 첫 신호탄이 발사된 것이다.

멀리서도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가 발명되면서 역사의 변동성은 훨씬 커졌다. 역사책의 페이지를 장식하는 암살 사건은 이때부터 뚜렷하게 증가한다.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상대 진영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무기가 개개인에게 주어지자 손 안에 쥔 가공할 폭력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방아쇠만 당기면 되었다. 개인의 살상력 증대로 역사의 물꼬는 종종 바뀌었다. 인류 역사의 부스럼, 테러의 시작은 이때부터였다.

교회 앞에는 휴고 그로티우스의 동상이 근엄하게 서있다. 그로티우스만큼 롤러코스터 인생을 산 사람이 있을까? 소설보다 더 극적인, 스토리로 만들면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허구의 세계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그의 인생 역정을 들여다보자.

국왕이 감탄한 천재, 그로티우스의 인생역정
 
신교회 앞에 있는 그로티우스 동상
 신교회 앞에 있는 그로티우스 동상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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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티우스는 아버지가 델프트 시장을 역임하고 레이덴 대학교 이사인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동으로 소문난 그는 7살 때 라틴어로 된 시를 지었고, 11살에 레이덴 대학교에 입학했다. 15살 때 네덜란드 대사를 따라 프랑스를 방문하여 국왕 앙리4세를 만났다. 앙리4세는 이 똘똘한 천재에 감탄해 '네덜란드의 기적'이라 불렀다.

그로티우스는 오를레앙에 머물며 법을 공부했고, 오를레앙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6세에 변호사 개업을 하고, 18세(1601년)에 라틴어 비극 <추방된 아담> 썼다. 20살에는 저명한 학자들을 제치고 네덜란드 사료편찬관에 임명되고 24살에 검찰총장격에 해당하는 법무감찰관에 임명된다.

29살(1613년)에는 로테르담의 펜시오나리스(Pensionary, 주의회 의장)가 된다. 자치 도시의 법률자문관에서 출발한 펜시오나리스는 점점 영향력이 강해져 나중에는 도시의 대표자가 된다. 특히 홀란드와 질란드 지역 펜시오나리스의 권력이 막강했다. 여기까지가 그로티우스의 화려한 인생 전반부이다. 이후부터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처럼 내리막을 달린다.
    
펜시오나리스에 재직하면서 그로티우스는 네달란드 역사상 가장 위험한 권력투쟁에 뛰어든다. 처음엔 인간의 자유의지와 예정설에 관련한 신학 논쟁으로 촉발되었는데 나중엔 네덜란드 국회파와 홀란드 의회파의 대립 양상으로 번졌다. 그로티우스가 지지하던 홀란드 의회파가 내란도 불사하겠다는 식으로 내비치는 바람에 반대파에게 역공의 빌미를 주게 되었다.

정통 칼뱅주의에 입각한 다수의 국회파가 홀란드 의회파를 내란죄로 기소하면서 의회파의 중심에 선 그로티우스는 특별재판소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그는 수형 생활을 하면서도 저술활동에 몰두해 학술적 가치가 높고 대중적 인기도 누리게 되는 두 권의 책을 집필한다.

그러던 중 아내의 아이디어로 탈옥을 결심한다. 살을 빼고 요가 동작 같은 수련을 하면서 유연성을 키운 그는 라면상자보다 조금 큰 책 상자에 들어가 탈출에 성공한다. 석공으로 변장하여 프랑스로 도주한 그를 국왕 루이13세는 환영했다. 그는 프랑스에 머물며 법학 역사에서 길이 남을 명저 <전쟁과 평화의 법에 관해>(De jure beli ac pacis)를 집필해 루이13세에게 헌정했다.

네덜란드 정치 상황이 바뀌어 귀국을 시도하려고 프랑스를 떠났으나 정작 네덜란드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난민 신세로 독일로 유랑하였다. 그러던 중 1634년 스웨덴 수상이 파리 주재 스웨덴 대사로 임명함으로써 기사회생하였다. 그때부터 그로티우스는 십년 동안 스웨덴 대사로 재직한다.

당시 유럽은 30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어 발언이나 처신에 신중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주 논쟁에 휘말려드는 바람에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나중에는 스웨덴 본국에서 특별사절을 보내 그를 대신하게 할 정도 신망을 잃게 된다. 무늬만 대사인 채로 몇 년을 지내다가 결국 스웨덴으로 소환 당한다. 그는 대사로 있으면서 많은 책을 썼지만 젊은 시절에 집필한 저서보다 질적인 수준에서 많이 떨어져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스웨덴에서 아무런 공직도 맡지 못하고 왕따 당하자 그는 충동적이고 과격한 결정을 한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조그만 배를 타고 돌연 떠난 것이다. 배가 난바다에서 조난당해 독일 북부 해안까지 떠밀려와 겨우 구조되었다. 그는 수레를 타고 함부르크로 가려고 했으나 쇠약해진 몸을 회복할 수가 없었다. 그가 누군지 아무도 모른 채 자그마한 도시 로스토크에서 62세의 생을 마감한다.

그로티우스는 조숙한 천재였으나 40대 이후 20년 동안은 창조력이 급격히 쇠퇴했다. 말년의 지적 생산물은 수준 이하여서 젊은 시절의 명성을 갉아먹고 말았다. 젊었을 때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는 교수직을 제시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당시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는 그로티우스의 법사상을 연구하는 학과까지 개설할 정도였다.

그로티우스는 학문적ㆍ문학적 재능은 뛰어났으나 정치적 감각이나 종합적 판단력은 둔한 편이었다. 정치적 야망과 권력에의 갈망은 있었으나 현실에 대한 진단은 어긋났고 처방은 헛다리짚었다.

특히 외교나 대인관계에서는 삽질과 뻘짓의 대가였다. 그로티우스의 인생 역정을 재밌는 에피소드로 희화화할 수 있지만, 그의 학문적 업적과 그가 인류에게 남긴 소중한 유산만큼은 따로 기억해야 한다.

그로티우스가 개념화 시킨 자연법과 국제법
    
그로티우스 초상(1631년 Michiel Jansz van Mierevelt 작품) <위키피디아>
 그로티우스 초상(1631년 Michiel Jansz van Mierevelt 작품) <위키피디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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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개념화시킨 자연법과 국제법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확립된 주권국가들이 상호 관계를 합리적, 이성적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30년 전쟁의 혼란을 마무리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출발한 새로운 국민국가 체제는 상호 간의 관계를 규제할 법률이 절실히 필요하던 때였다. 그로티우스의 저서는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 그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법과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국제관계에서, 비록 전쟁 중이라도 준수되어야 할 공통의 법이 있고 국가 간일지라도 최소한의 자연법을 지켜야한다는 그의 이론은 국가를 법인격화 함으로써 인류의 이성을 한 걸음 전진시켰다. 인간 사이의 야만 상태를 극복한 것이 자연법이라면 국가 간의 야만성을 제어한 것이 그로티우스가 제창한 국제법이다.

서구에서는 그로티우스를 근대법의 이념을 새롭게 제시한 법철학자로 인식하지만 유럽 밖의 세계에서는 그가 무법천지의 각축 공간인 바다에 질서의 틀을 제공하고 이용 원칙을 세운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정교한 논증으로 해양의 자유를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로티우스는 18살(1601년)에 소송 사건을 통해 국제법과 처음 접했다. 당시 동인도회사(VOC)의 배가 적대국인 포르투갈(당시엔 스페인 식민지) 선박 한 척을 나포해 귀향했다. 회사는 정당한 전리품이라는 근거로 배에 있던 화물을 매각했다. 그러나 주주들은 기독교도들이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과 그 밖의 다른 원칙을 이유로 이 조치에 반대했다.
 
델프트 구시청을 바라보고 있는 그로티우스 동상
 델프트 구시청을 바라보고 있는 그로티우스 동상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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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들은 젊고 명민한 그로티우스에게 이 문제에 관해 자문을 구했다. 그가 회사의 조치를 옹호하면서 주창한 이론이 나중에 '자유로운 바다(The Free Seas)'로 정립된다. 그로티우스는 무주공산인 해양 이용권에 대해 법이성적 관점을 제시해 야만적 관계에서 법적 관계로 인식을 전환시켰다.

물론 그로티우스가 국가 간의 법적 관계를 정립한 그때나 400년이 지난 지금이나 국제관계가 법 논리나 규범으로 작동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국제법이라는 잣대가 생김으로써 강자는 법규범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약자는 법조항을 근거로 항의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적어도 근대 이전처럼 상대방을 말살하는 극단적인 형태로까지 치닫지는 않는다. 이것이 그로티우스가 인류 지성을 한 단계 높이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이라고 국제관계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작동되는 건 아니다.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중국의 부상, 유럽연합의 혼란, 아베 정권의 막무가내 등 국제사회는 다시 요동치고 있다.

그로티우스가 활동하던, 30년 전쟁이 막 끝나고 새로운 질서를 태동시켜야 하는 격변기와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후대 사람들이 '그로티우스의 시기Grotian Moment'라고 부르던 그 시절의 재등장이 우려되고 있는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로티우스의 정신Grotian Spirit'의 부활'일 것이다.

다음은 델프트하면 떠오르는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태그:#PERDIX, #홀란드 인문산책, #델프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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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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