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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10일 러일 외무장관 공동기자회견에 참석한 고노 다로 외무상.
 지난 5월 10일 러일 외무장관 공동기자회견에 참석한 고노 다로 외무상.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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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부근 영공을 침범하자 한국 공군이 경고 사격한 일을 두고 일본 정부가 한·러 양쪽에 항의를 표시했다. 러시아를 상대로는 '일본 영공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한국을 상대로는 '남의 영공에서 벌어진 일에 끼어들었다'는 이유로 이의를 제기했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따르면, 23일 오후 5시 기자회견에서 고노 다로 외무대신은 "러시아에 의한 우리나라 영공 침범에 관해 항의를 했습니다"라고 한 뒤 "한국 측이 취한 조치와 관련해서는, 우리나라(일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어서 한국 측에도 그런 뜻의 항의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며 국제분쟁에 끼어드는 일본의 행태는 148년 전에도 있었다. 이번 사건과 똑같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유사한 일이었다. 그 일은 오늘의 일본을 있게 한 대형 사건이었다. 아시아의 변방이었던 일본이 아시아 최강에 이어 세계 정상급으로 도약하는 데 발판이 됐던 일이다.

148년 전인 1871년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전반적으로 어려울 때였다. 청나라는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패배에 이어 1856년 제2차 아편전쟁 패배 뒤로 양무운동이라는 내부 개혁에 집중하고 있었고, 조선은 1866년 프랑스 침공(병인양요)과 1871년 미국 침공(신미양요)으로 인해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두 나라는 밖으로 눈 돌릴 겨를 없이 내부 단속에 집중해야 했다.

상대적으로 일본은 싱싱한 편이었다. 1868년에 하급 무사(사무라이)들이 일으킨 메이지유신이 성공하면서 막부 정권(군사 정권)이 종식되고 일왕(천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가동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이웃나라들과 달리 일본에서만큼은 대외팽창 기운이 들끓을 수 있었다.

그런 시기였던 1871년 11월 27일, 동아시아 해역에서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69명의 유구왕국 백성이 탑승한 선박이 풍랑을 맞아 타이완(대만) 동남해안에 표착했다. 지금의 오키나와 땅에 살던 유구 백성들이 유구 남서쪽 타이완 해안에 떠내려간 것이다.

타이완은 청나라 푸졘성(복건성) 소속이었다. 이곳에 표착한 유구인 69명 중 3명은 익사했다. 그런데 나머지 66명 중 54명이 현지인들에게 살해됐다. 머지않아 동아시아를 일대 파국으로 몰고 갈 대형 악재였다. '악재'란 표현은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한테 해당한다.

유구왕국은 어떻게 '오키나와현'이 됐나
 
 오키나와의 위치.
 오키나와의 위치.
ⓒ 구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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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류큐왕국이라 불렀던 유구왕국은 이 당시에는 독립국이었다. 동아시아해역의 중간쯤인 이 나라는 동아시아의 남과 북을 잇는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다. 조선 전기만 해도 '동아시아판 싱가포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호카마 슈젠이 집필하고 심우성이 번역한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는 조선시대 전기나 중기인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에 관해 설명하는 대목에서 "류큐왕국이 성대하게 번영하여 무역국가로서 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유구왕국의 대외관계는 독특했다. 청나라와 일본 양쪽에 사대(事大)를 했다. 일본 영토로 편입되기 전인 1869년까지의 대마도(쓰시마)가 조선과 일본 양쪽을 황제국 혹은 상국(上國)으로 떠받든 것과 같았다. 강대국 틈바구니에 낀 섬나라에서 나타나기 쉬운 외교 형태였다. 이렇게 양쪽에 동시에 사대하는 것을 역사학계 용어로는 양속(兩屬)이라 한다.

유구가 청나라와 일본에 양속했다지만, 엄밀히 말하면 청나라 중앙정부와 일본 지방정부에 양속하는 것이었다. 일본 쪽 당사자가 중앙정부가 아니라 사츠마번이었던 것이다.

사대관계의 핵심은 황제국이 신하국 군주를 책봉하는 것과, 신하국이 조공하면 황제국이 회사(回賜, 답례)하는 것이었다. 이런 책봉 및 조공·회사가 유구왕국과 청나라 및 사츠마번 사이에 존재했다. 중국 대학 교재인 장웨이화(장유화)의 <중국 고대 대외관계사>는 "유구에서 새로운 왕이 계승할 때마다 청나라 사신이 가서 책봉과 축하를 해주었다"고 말한다.

일본 교과서에도 비슷한 설명이 있다. 야마가와 출판사가 2007년에 펴낸 고교용 <세계의 역사>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아래의 '나하'는 유구왕국의 중심지였다.

"15세기에 츄우잔왕이 통일한 유구왕국은 명나라에 조공을 함과 동시에 일본과도 국교를 맺고, 중국·일본·조선·동남아시아를 묶는 남중국해 무역을 중계하면서 번영을 누렸다. 나하는 동아시아의 주요 무역시장의 하나였지만, 얼마 안 있어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진출로 인해 쇠퇴했다. 17세기에는 처음으로 사츠마번에 복속했는데, 중국과의 조공무역은 계속했다."

조선은 중국에 사대했지만, 엄연한 독립국이었다. 중국 송나라(남송)도 여진족의 금나라에 사대했지만, 그 역시 독립국이었다. 유구 역시 청나라와 사츠마번에 사대했지만, 이 역시 독립국이었다. 사대관계는 약한 나라와 강한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였다. 국제관계였지 국내관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사대관계를 명분 삼아 1871년 사건에 개입했다. '유구 땅은 우리 땅이므로, 우리가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 유구를 상대한 주체는 중앙정부인 데 반해 일본에서 유구를 상대한 주체는 지방정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구와 일본의 사대관계보다는 유구와 청나라의 사대관계가 더 긴밀했다. 하지만 일본은 개의치 않았다. 서양의 침략으로 동아시아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유구 문제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한-러 군용기 영공침범 사건에 끼어든 것처럼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군용기 영공침범 사건에 끼어드는 오늘날의 일본 정부처럼, 1871년 당시의 일본 정부도 유사한 행동을 보였다. 메이지유신의 여세를 몰아, 이참에 유구를 확실한 우리 것으로 만들자는 욕망이 그 내에서 일어났다. 강상규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논문 '일본의 유구 병합과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은 이렇게 설명한다.

"메이지정부 내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유구의 중·일 양국에 대한 양속 상태를 해소하고 일본에 전적으로 귀속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 역사문화학회가 2007년 발행한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0권 제1호.


유구인들이 타이완 주민들에게 살해된 사건을 명분으로 유구와 청나라의 관계를 끊고 유구를 자국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본 내에서 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구를 빼앗겠다는 목표 하에 일본은 일차적으로 유구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는 조치에 착수했다. 유구를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유구를 일본 행정구역인 유구번으로 편입하는 동시에 유구 정부의 외교권과 인사권을 장악했다. 1871년 사건 뒤에 일본군을 유구에 주둔시켰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유구번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유구왕국이 곧바로 없어진 것은 아니다. 유구왕이 유구번왕으로 개칭되고 일본의 내정간섭이 강화됐을 뿐이다. 일종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렇게 유구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한 상태에서 일본은 청나라에 손해배상과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청나라가 책임을 회피할 목적으로 '타이완은 청나라 황제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지역'이라고 표명하자, 일본은 '일본 국민들(유구인들 지칭)'의 한을 풀어주고 타이완인들을 응징하다는 명분 하에 1874년 타이완에 군대를 파견했다(대만 출병). 유구인들에게 벌어진 재난을 명분으로 청나라 영토를 침범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청나라가 굴복하는 것으로 끝났다. 청나라는 배상금 50만 량을 지불하는 동시에, 유구 백성들이 일본 국민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유구는 일본 땅'이라는 일본 측 주장에 동조해준 것이다.

'국민 보호한다'며 끼어드는 일본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
 
독도 영공 침범, 러시아 대사대리 초치 윤순구 외교부 차관보가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우리 영공을 침범한 것과 관련해 막심 볼코프 주한 러시아 대사대리를 초치하고 있다.
▲ 독도 영공 침범, 러시아 대사대리 초치 윤순구 외교부 차관보가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우리 영공을 침범한 것과 관련해 막심 볼코프 주한 러시아 대사대리를 초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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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동아시아 세계에 도미노 효과를 일으켰다. 이를 발판으로 일본은 1879년에 유구를 정식 강점하고 오키나와현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일본이 1895년에 타이완을 강점하는 발판이 되고, 나아가 1910년에 조선을 강점하는 디딤돌이 됐다. 유구 강점으로 배가된 힘이 타이완 강점에 도움이 되고, 타이완 강점으로 배가된 힘이 조선 강점에 도움이 되는 연쇄 작용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는 동안에 일본은 세계적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동양이 서양에 밀리던 그 시기에 일본만큼은 서양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성장했던 것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1871년 사건이다. 유구 백성을 '내 것'이라 주장하며 유구 문제에 끼어든 일본의 행동이 유구·타이완·조선의 연쇄적 멸망을 초래하고 동아시아 및 세계 역사를 바꾸는 시발점이 됐던 것이다. '찻잔 속의 미풍'처럼 처음엔 억지스러워 대수롭지 않게 들릴 수 있었던 주장이 나중에는 그처럼 엄청난 초강력 태풍으로 발전해버렸다.

하지만 유구인들은 순진했다. 1871년 당시의 유구왕국은 그런 억지 주장이 가져올 엄청난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 일본이 '유구는 우리 땅'이라면서 청나라에 항의도 해주고 유구에 대한 경제 지원도 해주었기 때문에, 유구인들은 일본의 의도를 그다지 의심하지 않았다. 위 강상규 논문은 "의외로 유구는 사태의 심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사츠마번에서 빌린 돈에 대한 변제가 면제되었는가 하면, 메이지정부로부터 지원금도 유구로 들어왔다. 그리고 청국과의 조공무역에 대한 사츠마번의 간섭이 없어져 유구 당국은 과거와는 달리 이익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낙관적인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구인들은 일본이 자국을 멸망시킬 의도를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본의 경제 지원에 좀 더 주목했을 뿐이다. 그래서 '유구는 우리 땅'이라는 주장에 담긴 일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 유구인들의 안일한 인식이 사태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1871년 사건이 이번 러시아 군용기 사건을 그대로 빼닮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1871년 사건에 나타난 패턴은 그 후 일본의 대외침략에서 단골처럼 되풀이됐다. 언제나 일본은 '우리 국민을 보호한다'면서 외국 문제에 끼어들곤 했다. 임오군란과 동학혁명 때도 그랬다. 이번 사건을 둘러싼 외무대신의 발언을 '억지스럽다'며 웃어넘길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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