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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책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출판 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가 궁금해집니다. 이번에는 메디치미디어 김현종 대표가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출판과 관련한 내용을 보내와 싣습니다.[편집자말]
1970년대에 <뿌리깊은나무>라는 잡지가 있었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샘이깊은물>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발행인인 고 한창기 사장의 문화적 취향을 듬뿍 담은 두 잡지는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획기적인 글과 사진, 새로운 편집 스타일로 시대를 앞서간 잡지로 꼽혔다.

1980년대 중반 <샘이깊은물> 편집실에서 일했던 사람 10명이 지난 17일 저녁에 모였다. 글 기자였던 고 김인선씨가 쓴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의 출간을 기념하고, 무엇보다 그의 1주기를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책 출간을 축하하고 1주기를 기리는 자리, '김인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열렸다.
 그의 책 출간을 축하하고 1주기를 기리는 자리, "김인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열렸다.
ⓒ 김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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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선씨는 2018년 암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편집부 동료였던 나는 그의 생전에 출판 계약을 맺었고, 유언에 따라 그의 책을 펴냈고, 책을 펴낸 이로서 예전 동료들에게 출간을 신고해야 한다는 마음의 의무가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책을 출간한 후 출판 담당 기자들에게 편지도 남겼다. 아래는 그 글의 일부다.

'출판사를 차리고 나서 신간 발행과 관련하여 담당 기자분들께 메일을 쓰기는 처음입니다. 이번 책에 얽힌 사연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유명 저자의 책은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나 자기 이름으로는 통장 하나, 집 하나, 혼인 하나 없이 떠난 '친구'의 책입니다...(중략) 1980년대 후반 언론 창·복간 열풍 속에 그도 저도 다른 직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저는 신문사로, 그는 잡지사로 갔습니다. 어쩌다 듣는 소식은 그리 잘 풀리지 않아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014년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경기도 장흥 어딘가로 찾아가 만난 그는 농가의 헛간에서, 그 헛간에 어울리는 '동물'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몸에서 건초 냄새가 풀풀 났습니다. 오페라나 신규 클래식 음반의 해설을 번역 정리하는 것으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 달 수입 60만 원. 이 정도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철학과 음악, 글쓰기 말고 그에게서 후천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가난입니다. 형의 사업 실패를 고스란히 연대보증인으로 떠안았고, 신용불량자가 됐고, 그 신용불량을 풀 수 있는 시기가 왔음에도 신청하고 심사받는 게 귀찮아 방치한 사람입니다...(중략)

몇 년 전 페이스북에서 조우했을 때, 그의 능력과 품성을 알기에 세상에 다시 불러내고 싶었습니다. 출판사 사장의 업이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선비를 발굴해 글을 쓰도록 해 세상에 알리는 게 으뜸이죠.

양주시 장흥의 농가 헛간에서 만나 일정 기간 생활비와 취재비를 보조할 테니 글을 써보도록 했고, 그는 며칠 고민하다 응했습니다. 의욕도 보였습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몇몇 기담을 비롯해 여러 형태의 글을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6개월, 1년, 2년이 지나도 그의 특기인 '마감 못 지킴 병'으로 원고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잊었습니다. 한참 연락이 없다가 어느날 새벽에 이런 메시지가 왔습니다.

"참 대단한 김현종씨. 단 한마디도 내게 싫은 소리 안 허시네. 내가 울 엄마 빼고 누구한테 이렇게 미안해본 적이 없지. 내 필히 부채와 신세 갚아요. 아주 오래 안 걸려요. 그렇게만 알고 계슈."

부음을 전해 듣고 달려갔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김대현 선생이 홀로 맞이해주었습니다. '인선이' 만큼 독특한 분 같았습니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 메디치에서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이 책 말미에 '내 친구 김인선'을 쓴 김대현 선생이 곳곳에 흩어져 있던 글을 모아줬습니다."


이 책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는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젊은 날 함께 일했던 그 회사를 하나둘 떠난 뒤로 자주 만나지는 못했는데, 책을 핑계로 모임이 만들어진 거다.
 
고 김인선의 책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겉표지.
 고 김인선의 책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겉표지.
ⓒ 메디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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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메디치미디어 강의실에서의 1부가 김인선에 대한 기억을 불러내는 행사였다면, 인근 서울경찰청 옆 김치찌개집으로 이어진 2부 식사 모임은 예전 직장 상사, 동료들이 모처럼 모인, 이를테면 홈커밍데이였다.

2차 식사 자리에서도 대화는 김인선이라는 중간 정거장을 거치곤 했다. 박영신씨는 김인선씨가 미술부와 자리가 가까워 편집부와 미술부 징검다리가 돼주었던 얘기, 하지만 성향은 그때도 여전해서 현실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기 세계에 몰두했다는 느낌, 의뢰받은 프로젝트로 근 1년 이안디자인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기도 했는데 오전 삼청동 사무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올 때의 그 근질근질한 입가의 씩 웃는 웃음... 쉰 듯 끄는 듯한 억양으로 진지하게 동학, 강증산 얘기, 그러곤 어느새 주역에 몰두해 괘를 풀고, 그런가 하면 또 어느 날은 중국 무협 영화를 꿰고 와서는 괴성 섞인 음성지원으로 중국말 시연을 했던 얘기를 실감나게 들려줬다.

박영신씨가 17일 행사 전날 밤 페이스북에 올린 포스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앞 줄임) 샘 때부터, 그러니까 1984년. 인연의 시작이네. 그러곤 간간이 소식을 알다가, 오 년전 여러 샘(샘이깊은물) 식구들과 함께 페북에서 만났다. 쑥부쟁이, 개쑥부쟁이, 미국쑥부쟁이, 개미취, 벌개미취, 까실쑥부쟁이 구분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고, 민달팽이, 비밀의 문에 입성하는 잠자리, 똥싸개 떡팔이, 꽃들이 등장하는 장대한 판타지 구상을 얘기했다.

방 안에서 새앙쥐랑 눈 마주친 얘기며, 하루살이 윤무, 작디작은 꽃마리 쇠별꽃도 얘기했다. 감흥이 판타지가 되어 솟아올라오는 걸 얘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글보다, 스토리보다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기도 하고, 살아있는 이미지 디테일을 챙기는 데서 시각적 포부가 큰 게 느껴졌다.(뒤 줄임)"


사실 김인선씨의 책이 열흘 만에 2쇄에 들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김인선이 죽기 십여년 전 즈음부터 온라인에서 교유하던 분들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아래 야사사)이 특히 그랬다.

꽃과 풀, 나무와 동물에 대한 그의 관심과 지식은 야사사 분들을 매료시켰으며, 그의 급작스런 죽음과 출간은 온라인 친우들에게 결코 작은 뉴스가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주고 알아보는 지인지감(知人之鑑)에서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통과할 때에는 질풍, 노도(Strum und Drang)였지만 돌아서서 바라보면 대체로 아름답다. 그럼 오늘, 2019년은 어떨까? 어느날 날아든 김인선의 부음은 한순간 '나'를 돌아보게 했다. '같은 뿌리'의 사망 소식이 주는 효용은 그런 거다.
 
1980년대 중반 <샘이깊은물> 편집실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1980년대 중반 <샘이깊은물> 편집실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 김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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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자리에서 한때 한국의 뛰어난 잡지를 만들던 사람들의 아쉬운 듯 그리운 듯한 얘기가 짧은 시간 화산의 분출처럼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듣지 못한 얘기가 훨씬 많다. 모임은 삼십분쯤 지나자 2원방송을 넘어 3원, 4원방송으로 흘러갔다. 술의 힘은 그중 10%정도라고 나는 단언한다.

김인선씨와 <샘이깊은물> 입사 동기로 한겨레 신문 기자를 하다가 구례로 낙향한 정상영씨가 며칠 전 출판사로 찾아와 책을 건네줬다고 전하자 모두들 보고 싶어 했다. 정상영씨는 회사 다닐 때나 지금이나 나보다 팬이 한 명 더 많다.

마광수 교수로부터 조순 시장에 이르는 편집부 김주일씨의 인생 역정은 한 편의 어드벤처 스토리를 듣는 듯했고, <샘이깊은물>의 중간 리더로서 마감 엄수, 정확한 문장, 균형잡힌 시각에서 늘 숨은 교사였던 김연옥씨는 저녁 밥값을 턱 하니 계산해 선배란 무엇인가를 한번 더 보여주었다.

밤 늦게 귀가하다가 <샘이깊은물> 편집장이었던 '설호정 카리스마'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잘 마쳤습니다.(불라불라)" "제가 점심 한번 살게요. 가을에. 애쓰셨어요." 세 문장을 17자로 구성할 줄 아는 간명함 아래서 수업한 1980년대가 장명등처럼 휙 지나갔다.

덧붙이는 글 | * 글을 다 써놓고 보니 호칭이 오락가락하다. <샘이깊은물>에서는 5-6년 나이 차이 정도는 그냥 모두 씨로 호칭했다. 부담없이, 거리낌없이.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김인선 (지은이), 메디치미디어(2019)


태그:#김인선, #메디치미디어,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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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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