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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에서 이어집니다.)

만주 지역에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하 '만철')은 남만주철도의 중요 기착지였던 다롄과 펑톈, 하얼빈에 도서관을 개관하고 만주 지배와 철도 운영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해서 업무에 활용했다. 만철이 주요 철도 기지마다 세운 도서관은 1935년 말 23개 관 6개 분관에 달했고, 장서 총수는 52만 9321책으로 도서관당 평균 2만 3014책의 장서를 갖추고 있었다. 만철 계열 도서관이 보유한 장서가 조선에 있는 모든 도서관의 장서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만철이 경성에 도서관을 세운 목적도 다르지 않다. 용산에 세운 철도도서관은 대륙 침략과 조선 통치의 핵심 인프라인 철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전문도서관'이면서 '공공도서관'이었던 철도도서관
 
지금의 용산역 모습 일제 강점기 용산역은 지금보다 훨씬 중요한 역이었다. 경의선과 경원선의 출발역이자 경인선, 경부선이 모두 용산역을 경유했다. 조선 철도의 핵심 인프라가 용산역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지금의 용산역 모습 일제 강점기 용산역은 지금보다 훨씬 중요한 역이었다. 경의선과 경원선의 출발역이자 경인선, 경부선이 모두 용산역을 경유했다. 조선 철도의 핵심 인프라가 용산역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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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명칭은 계속 바뀌었지만 개관 당시부터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철도도서관의 인적 구성을 일본인 위주로 하고 조선인은 배제했다는 점이다. 철도도서관 직원 수는 20명 내외에서 태평양전쟁 막바지에는 60명까지 늘어나는데, 직원은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했다. 조선인은 5~6명 정도만 고용원으로 채용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 직원의 상당수가 조선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철도도서관의 인적 구성은 특기할 만하다. 일제가 철도뿐 아니라 철도도서관 역시 식민 지배의 핵심기구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전문도서관'이자 '특수도서관'으로 문을 연 철도도서관이 나중에는 일반에게 자료를 공개하고 순회문고를 운영하는 등 '공공도서관'의 기능을 확대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교통과 공학 분야 책(17%)뿐 아니라 일반 이용자를 위한 문학과 어학 책(30%)도 상당량을 입수해서 비치했다. 

철도도서관은 아침 10시부터 밤 9시까지 매일 11시간 개관했고, 공휴일과 기념일, 연말연시를 제외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을 포함, 일 년에 320일 이상 문을 열었다. 철도국 직원은 무료, 일반 이용자는 유료였는데, 1회 입장권은 3전으로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2전)보다 비싸고 조선총독부도서관(4전)보다는 쌌다. 도서관 안에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고 레코드 음반을 감상할 수 있는 '오락실'을 따로 갖췄다. 1920년 개관 당시 하루 평균 이용자는 972명이었지만 1941년에는 5883명으로 크게 늘었다. 

철도가 바꾼 '독서 문화'
 
여행 동료(The Traveling Companions) 1862년 아우구스투스 레오폴드 에그(Augustus Leopold Egg)가 그린 작품으로 기차 여행 중에 책 읽는 풍광을 담은 그림이다. 당시 기차는 속도가 느려서 긴 열차 여행의 무료함을 달랠 ‘무언가’가 필요했다. 승객들은 작품 속 여인처럼 잠을 자거나 책이나 신문, 잡지를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열차 여행의 지루함을 달랬다. 버밍엄박물관&미술관이 소장한 작품.
▲ 여행 동료(The Traveling Companions) 1862년 아우구스투스 레오폴드 에그(Augustus Leopold Egg)가 그린 작품으로 기차 여행 중에 책 읽는 풍광을 담은 그림이다. 당시 기차는 속도가 느려서 긴 열차 여행의 무료함을 달랠 ‘무언가’가 필요했다. 승객들은 작품 속 여인처럼 잠을 자거나 책이나 신문, 잡지를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열차 여행의 지루함을 달랬다. 버밍엄박물관&미술관이 소장한 작품.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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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도서관은 열차에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철도문고'도 운영했다. 부산에서 만주 신징에 이르는 구간과 경성과 나진, 청진, 목포를 달리는 열차에 42상자에 달하는 '열차문고'를 운영했다. 

아카스키(曉)와 히카리 같은 특급열차의 '전망차'에는 독서를 위한 안락의자와 함께 대중적인 책 40종과 잡지 24종, 팸플릿 10종을 비치했다. 열차 안에 별도의 '도서관' 공간을 마련한 셈이다. 보통열차에도 종수는 적지만 책과 잡지, 팸플릿을 비치했고 일정 기간마다 책과 잡지를 교체했다. 1935년 시점에 4만 6087명의 승객이 '철도문고'를 통해 5만 507권의 책을 빌려 읽었다. 

독서 공간은 교통수단인 열차뿐 아니라 숙박시설인 호텔에도 출현했다. 1913년 일제는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던 환구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의 '조선호텔'을 세웠다. 조선호텔은 경복궁에 세운 조선총독부 청사의 원안 설계자인 독일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가 설계한 호텔로 1914년 10월 10일 문을 열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운영해서 초기엔 '철도호텔'로 알려지기도 했다. 

대지 6700평에 건평 583평 규모였던 조선호텔은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이 내외빈을 영접하는 연회장으로 자주 이용했다. 탁상 전화, 세면소, 난방, 소방시설을 갖춘 호화 객실 69개와 각종 부대시설을 갖춘 조선호텔은 '수직 열차'라는 이름의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최초의 건물이었다. 조선호텔이 갖춘 부대시설 중에는 콘서트홀, 300명까지 수용 가능한 식당, 연회실 외에 '독서실'(reading room)이 있었다. 책을 읽으며 담배도 함께 피울 수 있는 '흡연 독서실'이었다. 경성뿐 아니라 부산과 평양, 신의주철도호텔에도 투숙객을 위한 '호텔문고'를 운영했다. 

철도망의 확대는 지루한 열차 여행을 달래줄 '열차 안 독서'의 출현을 촉진했고, 독서 문화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음독'(音讀)이 '묵독'(默讀)으로 변화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책을 읽을 때 소리 내어 읽는 음독이 독서의 주류를 형성했다. 근대 학교 제도와 공공도서관의 확대, 철도와 같은 공공 교통기관의 보급은 '음독'이 소리 없이 책을 읽는 '묵독'으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철도라는 이동 수단을 통해 여행이 일반화되면서 책의 형태와 종류도 여행에 적합한 방식으로 '진화'했다. 책의 사이즈와 부피를 줄인 펭귄북스 같은 '문고본'(paperback)이 출현했고, 일본의 출판문화를 상징하는 '만화잡지'도 철도 여행객을 위해 기획되었다. 

철도를 통해 신문과 잡지 분야에서 '전국지'가 출현했고, 책의 판매량도 크게 늘기 시작했다. 철도망의 확대는 특정 지역 중심으로 미디어 산업이 재편되는 '일극(一極) 체제'의 발달을 촉진했는데, 일본의 경우 도쿄, 조선은 경성을 중심으로 신문과 잡지, 출판 산업이 재편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크 제퍼슨(Mark Jefferson)은 1939년 45개 국가를 연구하여 '한 나라 최대 도시는 항상 불균형하게 거대하다'는 '최대 도시의 법칙'(the law of the primate city)을 주장한 바 있다. 철도는 미디어 산업 분야에서도 불균형하게 거대한 '최대 도시'의 출현을 초래했다. 

신사와 유곽을 모두 갖춘 '신도시' 신용산
 
<대경성시가지도>에 표시된 철도도서관 1937년 일한서방(日韓書房)에서 발행한 <대경성시가지도>에는 철도도서관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용산공업고등학교 맞은편에 철도도서관과 철도종사원양성소가 나란히 자리했다.
▲ <대경성시가지도>에 표시된 철도도서관 1937년 일한서방(日韓書房)에서 발행한 <대경성시가지도>에는 철도도서관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용산공업고등학교 맞은편에 철도도서관과 철도종사원양성소가 나란히 자리했다.
ⓒ 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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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은 경의선(경성-신의주)과 경원선(경성-원산)의 출발지였고, 경인선, 경부선이 모두 경유하면서 교통의 요지로 급부상했다. 1925년 9월 20일 경성역이 새롭게 완공되기 전까지 용산역은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의 출발역일 뿐 아니라 근처에 일본군 사령부까지 있어서 늘 붐비는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용산은 역 앞에 통감부 철도관리국, 철도 관사, 용산동인병원(철도병원의 전신), 철도종사원양성소 같은 철도 핵심 시설이 모여 있는 '철도 기지'이기도 했다. 

1908년부터는 용산 철도 기지와 나란히 일본군 사령부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제 시대 용산은 '철도'와 '군대'라는 조선 지배를 위한 핵심 인프라와 물리력이 모두 자리했다.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용산 일본군 기지는 해방 후 용산 미군기지로 이어졌다. 

군부와 철도 기지가 자리하면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한 '신용산'은 철도도서관, 철도박물관뿐 아니라 용산철도국 수영장까지, 각종 문화 체육시설을 두루 갖췄다. 일본 식민도시가 갖는 특징 중 하나가 '신사'(神社)와 '유곽'(遊廓)의 존재다. 신용산은 일찍부터 '신사'와 '유곽'을 모두 갖춘 일본인 '신도시'로 성장했다. 

철도도서관 옛터에 서린 현대사 
 
옛 용산철도병원 본관 1928년 철근 콘크리트에 붉은 벽돌로 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병원 건축물이다. 일제가 러일전쟁 때 철도 공사를 진행하면서 부상 당한 노동자를 치료하기 위해 지었다. 1984년부터 중앙대학교가 병원을 위탁해서 운영하다가 2011년 이후 비어 있다. 용산구가 ‘용산역사박물관’ 조성을 추진중이다.
▲ 옛 용산철도병원 본관 1928년 철근 콘크리트에 붉은 벽돌로 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병원 건축물이다. 일제가 러일전쟁 때 철도 공사를 진행하면서 부상 당한 노동자를 치료하기 위해 지었다. 1984년부터 중앙대학교가 병원을 위탁해서 운영하다가 2011년 이후 비어 있다. 용산구가 ‘용산역사박물관’ 조성을 추진중이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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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 근처에는 옛 '용산철도병원'이 있다. 옛 용산철도병원은 용산역을 제외하고 이곳이 철도 기지였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건물이다. 1984년부터는 중앙대학교가 부속병원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군을 최초 검안한 의사 오연상은 기자들에게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폐에서는 수포 소리가 들렸다"고 말해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을 알렸다. 그의 용기와 소신이 은폐될 뻔한 박종철군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당시 오연상이 일한 병원이 중앙대용산병원, 지금의 옛 용산철도병원이며, 박종철군이 숨진 후 실려온 병원도 바로 이곳이다. 

철도도서관은 어디에 있었을까? 용산철도병원을 지나면 용산공업고등학교가 있는데, 그 맞은편에 철도도서관과 철도종사원양성소(옛 경성철도학교)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1937년 일한서방(日韓書房)이 발행한 '대경성시가지도'(大京城市街地圖)를 보면 철도도서관의 위치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철도도서관은 지금 재개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용산4구역'에 있었다. 

용산4구역 바로 뒤에 둔지산 녹지가 펼쳐져 있는데, 둔지산 녹지 바로 앞에 철도도서관이 자리했다. 철도도서관이 있던 자리는 외빈 접대와 공식 행사 때 쓰인 용산 총독 관저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철도도서관 옛터인 '용산4구역'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용산 참사'가 발생한 바로 그곳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9년 1월 20일 이곳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숨치는 '용산 참사'가 발생했다. 용산 참사가 발생한 남일당 터에는 34층짜리 빌딩이 지어지고 있다.

철도도서관은 어떻게 되었을까
 
재개발이 진행중인 용산4구역 용산 재개발 사업 중 가장 노른자위로 꼽힌 용산4구역에 철도도서관이 자리했다. 사진 가운데 가장 높은 빌딩이 지어지는 자리가 ‘용산 참사’가 발생한 ‘남일당 터’다. 2009년 1월 20일 이곳에서 ‘용산 참사’가 발생했다.
▲ 재개발이 진행중인 용산4구역 용산 재개발 사업 중 가장 노른자위로 꼽힌 용산4구역에 철도도서관이 자리했다. 사진 가운데 가장 높은 빌딩이 지어지는 자리가 ‘용산 참사’가 발생한 ‘남일당 터’다. 2009년 1월 20일 이곳에서 ‘용산 참사’가 발생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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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도서관만큼, 어쩌면 더 큰 위상을 지녔던 철도도서관은 어떻게 되었을까? 미군정 때는 운수부 산하 '운수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48년 정부 수립 때 교통부 산하 '교통도서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일제 침략과 식민통치의 핵심 인프라였던 철도 선로와 시설은 남았지만, 철도도서관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서히 '붕괴'되었다. '붕괴'라는 표현이 적절치 못할 수 있으나 이 말보다 더 적합한 표현을 찾기 어렵다.

철도도서관은 해방과 함께 주축을 이루던 일본인들이 빠져나가면서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이 국립도서관으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 국립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이어진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조선인이 직원의 상당수를 차지했지만, 철도도서관은 반대로 일본인이 주축을 이룬 이유도 있고, 일제가 철도도서관과 철도 관련 장서를 핵심 시설과 자료로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아쉬운 것은 북한의 경우 일본인 기술자와 가족을 1948년 7월까지 잔류시키면서 주요 시설을 유지하고 인수인계를 받았다는 점이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인 기술자에 대한 '잔류 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인으로부터 남한 내 철도와 주요 기반 시설을 우리 '자산'으로 인수인계받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용산 대폭격'과 철도도서관
 
비행중인 B-29 태평양전쟁 당시 미 육군 항공대 소속으로 일본 본토 폭격에 동원됐던 B-29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기체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때는 미 극동공군 폭격기 사령부 소속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용산 대폭격을 수행한 기체도 B-29다.
▲ 비행중인 B-29 태평양전쟁 당시 미 육군 항공대 소속으로 일본 본토 폭격에 동원됐던 B-29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기체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때는 미 극동공군 폭격기 사령부 소속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용산 대폭격을 수행한 기체도 B-29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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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 16일 일본 미 공군 기지에서 날아오른 미군 B-29 폭격기 47대가 서울 용산 폭격 작전을 감행했다. 철도를 이용한 북한군 병력과 보급품 수송을 차단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미 극동공군 폭격기 사령부(FEAF Bomber Command) 전력의 83%가 동원된 '대폭격'으로 용산 일대 철도 조차장, 철도차량, 철로, 철도공장이 '초토화'되었다. 

용산 대폭격 일주일 전인 1950년 7월 8일 미 극동공군 사령관 스트레이트마이어(George E. Stratemeyer)는 한반도 공중폭격을 수행할 지휘부로 '미 극동공군 폭격기 사령부'를 창설했다. 김태우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전쟁 초기 미 극동공군 폭격기 사령부는 '차단작전'(interdiction)과 '전략폭격'(strategic bombing)이라는 2가지 작전을 주로 수행했다. 

'차단작전'은 적의 병력과 물자가 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교통의 요지와 철도, 도로, 병참선을 공중에서 폭격하는 작전이며, '전략폭격'은 적의 전쟁 수행능력과 의지를 꺾기 위해 후방 핵심 시설과 목표물을 파괴하는 작전을 말한다. 당시 북한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던 용산 철도기지는 차단작전과 전략폭격을 위한 미 극동공군의 핵심적인 목표물이었다.

'용산 대폭격' 때 미 공군은 225kg 무게의 파괴폭탄 1,504발을 투하했다. GP폭탄(General Purpose Bomb)으로 불린 '파괴폭탄'은 두께 10~15cm 아스팔트 도로에 지름 10미터에서 17미터의 구멍을 만드는데, 폭탄이 터진 구멍에 46만 리터가 넘는 물이 들어갈 정도로 파괴력이 큰 폭탄이었다.

파괴폭탄 1개가 최소 10미터에서 17미터 지름의 구멍을 만든다는 점을 감안할 때 폭탄 1504발을 겹치지 않고 투하할 경우 지름 15km에서 18km 면적을 날려버릴 수 있다. 용산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응봉산과 낙산, 서쪽으로는 성미산, 남쪽으로는 관악산, 북쪽으로는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까지 서울 전 지역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폭탄이 이 날 하루 용산에 떨어졌다. 미 공군은 이 작전으로 용산 철도시설의 80%를 파괴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B-29 폭격기의 폭격률이 정밀하지 못한 탓에 용산 철도 시설뿐 아니라 이촌동, 후암동, 원효로, 마포구 도화동, 공덕동 일대까지 폭격의 피해를 크게 입었다. 역사학자 김성칠도 이날 용산 폭격을 일기에 자세히 기록해두었다. 
 
"오늘 오후 구름 낀 하늘을 뚫고 B-29인 성싶은 미기(美機)의 여러 편대가 차례차례로 나타나선 폭탄을 던지고 가고, 또 와선 던지고 가고 하기를 거듭하여 두어 시간 동안을 계속하매, 그사이에 화약고라도 터지는 것 같은 큰 음향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거듭 울리어 오고, 그럴 때마다 30리 밖에 있는 우리 집이 울컥울컥하고 몹시 흔들린다. 용산 쪽 하늘은 이내 검은 연기로 먹장을 갈아붙인 것 같고 그 사이로 화염이 끊임없이 치솟아서 처절한 광경이다.

(중략) 들으매, 오늘의 폭격으로 말미암아 용산 방면의 군사시설과 교통시설이 많이 파괴되긴 하였으나 그보다도 이른바 해방촌이 맹폭을 입었고, 이로 하여 무려 수천 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났다 한다."

당시 김성칠은 용산에서 30리 떨어진 정릉리 362번지에 살았다. 폭격 지점으로부터 10km 넘게 떨어진 곳에서도 폭격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하니, '용산 대폭격'의 강도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서울시 도시계획 분야 전문가로 오랫동안 일한 손정목 교수도 이날 목격한 폭격을 "평생 가장 무서웠던 체험 중 하나"라는 회고로 남겼다. 

미 공군은 8월 4일과 5일 B-29 12대, 8월 20일과 21일, 25일 B-29 8대를 동원해서 용산 일대 철도 시설을 지속적으로 '폭격'했다. 미 공군의 지속적이고 집요한 폭격으로 용산 철도 시설은 완벽하게 '괴멸'되었다. 이 과정에서 용산 철도도서관도 폭격을 피하지 못했고, 23만 권이 넘었던 모든 장서가 불타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청산'만 못한 것이 아니다 
 
철도도서관 옛터 재개발이 한창 진행중인 ‘용산4구역’. 사진 속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 이 주변이 철도도서관이 있던 옛터다. 용산 해링턴 플레이스 103동과 용산 파크웨이(가칭) 일대가 철도도서관과 철도종사원양성소(옛 경성철도학교)가 있던 자리다.
▲ 철도도서관 옛터 재개발이 한창 진행중인 ‘용산4구역’. 사진 속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 이 주변이 철도도서관이 있던 옛터다. 용산 해링턴 플레이스 103동과 용산 파크웨이(가칭) 일대가 철도도서관과 철도종사원양성소(옛 경성철도학교)가 있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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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언론 보도를 살피면 철도도서관이 '전소'되었다고 나온다. 한국전쟁 이후 철도도서관은 '교통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지만 일제 강점기에 가졌던 기능과 위상은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배은선의 논문에 따르면 전쟁이 끝난 후 도서관 건물 1, 2층은 교통부가 쓰고 도서관은 3층만 쓰는 형태로 '축소'되었다. 철도도서관은 1961년 10월 2일 교통공무원훈련소 도서실로 흡수되었다가 1965년 12월 28일 철도청 소속으로 이관된다. 당시 장서량은 3만여 권, 해방 시점의 23만 권 장서에 13%에 불과했다.

'도서실' 수준으로 축소된 철도도서관 장서는 1980년대 중반 철도청이 용산 교육단지를 매각하고 경기도 의왕시 부곡으로 이전할 때 철도전문대학 도서관으로 흡수되었다. 철도전문대학으로 이관된 장서가 2만 7463권이었다고 하니, 1965년 시점의 3만 권에서 장서가 더 줄었음을 알 수 있다. 2003년 8월 '철도도서관'이라는 옛 이름을 잠시 되찾았지만 2012년 한국교통대학과 통합되면서 한국교통대학교 의왕도서관으로 흡수되었다. 

철도도서관과 함께 만철이 세운 다롄도서관, 펑톈도서관, 하얼빈도서관은 모두 중국의 주요 도서관으로 성장했다. 전후 관료가 주도하는 경제시스템, 즉 '일본 주식회사'의 원형을 창출했다는 평을 듣는 만철. 그 만철이 세운 도서관 중 주요 도서관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사라진 도서관'은 철도도서관이 유일하다. 

철도도서관에 있던 각종 자료는 해방 후 국가 교통망 구축에 활용될 우리의 자산이었고, 전문도서관이자 공공도서관으로 기능했던 철도도서관의 역할 역시 소중했다. 하지만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철도도서관은 사라졌다. 

최근 100년 동안 우리가 겪은 가장 큰 '천재'(天災)는 을축년 대홍수이고, 가장 큰 '인재'(人災)는 한국전쟁일 것이다. 철도도서관은 우리가 맞닥뜨린 가장 큰 천재와 인재를 모두 겪은 도서관이다. 천라지망(天羅地網)은 피해도 자신이 판 무덤은 피할 수 없다고 했던가. 을축년 대홍수라는 대재난을 극복하고 이어진 철도도서관이지만 우리가 당사자로 싸운 한국전쟁은 철도도서관을 철저히 파괴했다. 

근대 교통수단인 '철도'는 우리에게 침략과 수탈의 상징이기도 하다. 조선인의 피와 땀, 눈물로 이 땅에 철로가 깔렸고, 그 철로를 통해 이 땅의 산물이 나라 밖으로 빠져 나갔기 때문이다. 철도와 마찬가지로 철도도서관 역시 식민 통치를 위한 인프라인 동시에 근대 문화시설이라는 이중성을 지닌 유산이었다. 우리는 해방 이후 식민 통치의 '적폐'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지만 식민 시대의 '유산'을 챙기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다. 

식민 '잔재'는 청산하지 못하고 '유산'은 상실해버린 불행한 역사가 압축된 곳이 바로 철도도서관이다. 불가항력인 부분도 있지만 최초의 전문도서관이자 공공도서관, 식민지 조선의 3대 도서관인 '철도도서관'은 그렇게 붕괴되어 사라졌다. 

[철도도서관 옛터]

- 주소 :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3가 63번지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철도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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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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