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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의 일이다. 우리 집 베란다 창문 너머로 전통 아랍 복장을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파트 건너편 **오일 본사 건물에 걸린 대형 현수막 사진 속 남자였다. 마천루의 반을 덮은 커다란 현수막 속 남자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방한 예정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왕세자였다. 이틀 뒤에는 건물 양편에 똑같은 현수막이 1개 더 걸렸다.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길래 그럴까 궁금해 찾아보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화학 회사인 아람코는 **오일의 지분 64%를 가지고 있는 최대 주주다. 그 아람코의 실세가 바로 무함마드 왕세자인데, 개인 재산이 약 1246조라 한다. 검색하던 나는 고등학생 딸에게 농담을 툭 건넸다. "너 학교 갔다 오다 왕세자 눈에 띄어서 7번째 부인 되는 거 아냐?"

영국 BBC 기자인 수 로이드 로버츠가 쓴 책 <여자 전쟁> 중 '사우디아라비아' 편을 읽다가 딸에게 건넸던 열없는 농담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늘도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종교, 차별과 종속에 맞서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나는 일부다처제를 농담의 소재로 썼다니. 부끄러웠다.

외출할 때 남성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여성들
 
 책 <여자 전쟁> 표지
 책 <여자 전쟁> 표지
ⓒ 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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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중동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성 인권 침해 문제로 국제적 비판을 받아왔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근거로 내세우지만, 250년 전 왕조와 협약을 맺은 지배 세력 와하브파 성직자들의 자의적인 해석에 가깝다.
 
와하브주의는 여성을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영원히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로 취급한다. 여성은 집을 나서기 전에 반드시 남성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병원 치료를 받거나 은행 계좌를 개설하거나 교육기관에 입학하거나 또 여행할 때도 집 밖에서 보내는 매 순간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남성 보호자는 여성이 몇 살이든 상관없이 결혼시킬 수 있다. 만일 이혼한 여성에게 아버지와 남자 형제마저 없다면, 십 대 아들에게서 이러한 특권을 누릴 허가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다. (117쪽)

대부분의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이 남성의 손아귀에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지만, 특히 이혼이나 사별로 집안에 남성 보호자가 없는 여성은 더욱 심각하다. 외출은 물론 병원, 관공서 일을 볼 수가 없어서 굶거나 병에 걸려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에서 가장 큰 여성감옥"이라는 여성 운동가인 와제하 알후웨이더의 표현이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2008년 자신이 운전하는 사진을 유튜브에 올렸다가 정부에게 탄압받았다.

영화 <와즈다>(2012)가 생각났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재기발랄한 열 살 소녀 와즈다는 자전거를 갖는 것이 소원이다. 와즈다의 엄마는 '여자애들이 자전거를 타면 처녀막이 터지고 나중에 아이를 못 가진다'며 반대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은 자전거뿐 아니라 자동차 운전도 할 수 없고, 혼자서는 대중교통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운전기사를 고용해야 한다. 와즈다 엄마는 거리가 멀지만, 여자만 있는 직장을 다니기 위해 불친절한 남자 운전기사를 참아야 하고, 남편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드레스를 사러 쇼핑몰에 갔을 때도 밖에서 기다리는 운전기사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영화 <와즈다>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 거대하고 깜깜한 감옥에 깃드는 한 줄기 햇살 같은 희망을 보여 준다. 아들을 낳기 위해 새 부인을 맞이한 남편에게 실망한 와즈다 엄마는 남편이 좋아하기 때문에 길렀던 찰랑찰랑한 긴 머리를 자른다. 남편에게 사랑받기 위한 붉은 드레스 대신 와즈다의 자전거를 산다. 그리고 와즈다에게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네가 제일 행복했으면 좋겠어."

영화 <와즈다>를 만든 하이파 알 만수르는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여성 감독이다. 남녀가 같은 사업장에 있는 것을 불순하게 보는 젠더 분리 정책 때문에 감독은 차 안에서 지시를 내리고, 촬영된 컷을 다시 차 안에서 확인하고 재촬영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하이파 알 만수르 감독은 종교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지만, 영화 개봉 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자도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법률을 바꾸는 쾌거를 이뤘다. 그 후 2018년, 여성 운전을 허용했고, 올해는 남성 보호자의 허락 없이도 여성들이 해외여행을 할 수 있도록 검토 중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남성 보호자가 교육·취업·결혼 등 여성의 법적 행위를 승낙하는 권한은 여전히 유지할 방침이라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남성의 보호 속에 있을 때만 안전하다'는 그릇된 인식의 감옥에서 완전히 탈출하기 위한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외출 허가증' 없이 내 마음대로 밖을 다닐 수 있는 우리의 당연한 일상이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에겐 간절한 소망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하지만 최근 발간된 그래픽 노블 <재윤의 삶> 소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고 우리나라 여성도 여전히 젠더의 감옥, 혐오의 감옥, 편견의 감옥 속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20대 여성 주인공이 느낀 브래지어나 생리의 불편함, 성희롱, 여성 혐오 등을 솔직 담백하게 담아낸 책이라는 평론에 온갖 악성 댓글이 달려 있었다.

'여자는 공감과 배려만 바란다.'
'남자는 군대를 강요받고, 여자는 온갖 혜택을 받으면서 뭐가 억울하다는 것인가.'
'여자는 젊을 때는 대충 살다가 남자 잘 만나서 계속 편하게 산다.' 

편견에 근거한 혐오를 쏟아내는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아직 세상의 많은 여성들은 '전쟁' 중이다. 그런 면에서 열악한 여성 인권 문제를 취재하고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친 수 로이드 로버츠의 메시지는 '차별받는 여성'이란 감옥에서 탈출하려는 세계의 모든 여성에게 유효할 것이다.  
 
딸은 어머니의 인생을 보고 배운다. 나는 여자와 남자는 동등하며,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고 내 딸에게 수없이 강조해왔다. 사우디의 소녀들은 자신의 어머니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모든 활동을 집안의 남자들에게 엄격히 통제받고 그들의 지시에 복종하며 지내는 것을 보면서 자란다.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의 자존감과 자부심은 땅에 떨어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림 아사드와 다른 사우디 여성인권 운동가들이 보여주는 용기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들은 자신을 가두는 틀을 깨뜨려왔지만 수백만의 여자들은 아직 감히 도전할 꿈도 꾸지 못하고 있고, 슬프게도 그들의 딸들 또한 어머니처럼 살아갈 것이다. (115쪽)

여자 전쟁 - 잔혹한 세상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여성을 기록하다

수 로이드 로버츠 (지은이), 심수미 (옮긴이), 클(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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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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