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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남섬을 대충 둘러보았다. 오늘은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로 떠난다. 북섬으로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며칠 지내면서 조금 익숙해진 동네, 페어리(Fairlie)를 등지고 길을 떠난다. 어제부터 내리는 비는 아직도 쉬지 않는다. 날씨 또한 쌀쌀하다.
 
심한 비바람이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에  도로까지 공사 중이다. 불편한 여행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심한 비바람이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에 도로까지 공사 중이다. 불편한 여행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 이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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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 속을 헤치며 운전한다. 양들이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다. 많은 소는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젖은 들판에 배를 깔고 앉아 되새김질하고 있다. 추운 날씨에 축축한 땅에서 지내는 모습이 불쌍하다. 그러나 소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삶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사람 보기에 안쓰러울 따름이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라는 옛 성인의 말씀이 떠오른다.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타고 다녔던 자동차를 반납하고 간단하게 숙식도 할 수 있는 캠핑카를 빌렸다. 고생은 하겠지만 힘든 만큼 추억 거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사서 하는 고생'을 택한 것이다.

캠핑카를 빌려주는 곳에는 여행을 마치고 떠난 사람들이 놓고 간 물건이 널려있다. 통조림, 소금, 양파 같은 먹을 것과 함께 거의 새것처럼 보이는 담요와 두툼한 등산용 점퍼 같은 탐나는 물건도 있다. 현대는 필요 이상을 탐하는 시대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타인에게 양도하는 여행객의 훈훈함을 본다.

캠핑카에 짐을 바꾸어 싣고 픽톤(Picton)이라는 동네 이름을 지도에 입력한다. 픽톤에는 북섬으로 가는 정기 여객선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반나절이 지났다. 오늘 목적지까지 도착하기에는 조금 무리다.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다가 중간에서 하룻밤 묵을 생각으로 길을 떠난다.

비바람이 심한 날씨다. 높은 구릉을 돌고 돌아 해변에 도착했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 잠시 차를 세웠다. 태평양의 성난 파도와 비바람이 만들어 내는 풍경이 장관이다. 그러나 자동차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 춥고 궂은 날씨에 캠핑카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걱정이 들기도 한다.
 
캠핑카에서 지내는 고생을 시작한다.
 캠핑카에서 지내는 고생을 시작한다.
ⓒ 이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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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 와서 처음 들렀던 카이코우라(Kaikoura)에 도착했다. 조금은 눈에 익은 동네다. 이곳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진다. 먼저 관광 안내소에서 하룻밤 지낼 수 있는 곳을 알아보았다. 중년의 여직원이 익숙한 동작으로 동네 지도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캠핑장 두 곳을 알려준다.

일단 가까운 산등성이에 있는 캠핑장에 가 보았다. 화장실과 상수도 시설만 있는 무료 캠핑장이다. 서너 대의 캠핑카와 텐트가 이미 자리 잡고 있다. 캠핑장 도로 건너편에 작은 공동묘지가 보인다. 외국에서는 동네 한복판에서도 공동묘지를 흔히 볼 수 있다. 한국과 달리 혐오 시설로 취급하지 않는 것 같다.

일단 잘 곳을 찾았으니 안심이다. 바닷가 따라 지난번에 보았던 관광지를 찾아본다. 같은 장소이지만 굿은 날씨 탓에 전혀 다른 느낌이다. 기이하게 생긴 암석들이 지난번에는 탄성을 자아내도록 마음을 끌었다. 그러나 지금은 파도에 휩싸여 존재감을 잃고 있다. 지난번처럼 관광객이 많이 보이지도 않는다.

비바람이 심해진다. 캠핑카에 요리할 수 있는 시설이 있지만 식사 준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동네 중심가로 나가 식당을 찾아보았다. 골목 끝에 있는 김밥집을 발견했다. 일본 냄새가 풍기는 장식을 한 가게다. 진열장에는 한국 컵라면 등도 진열되어 있다. 주인 여자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으니 표정이 무뚝뚝하다. 물어보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표정이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 없는 호주 시골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오래전에 뉴질랜드에 정착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끼리만 사는 것이 싫어 한국 사람이 전혀 없는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 중에는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는 불만도 토로한다. 현대인은 사람에 의지해 살기 때문에 실망과 원망을 상대방에게 쉽게 표출한다.

캠핑장에는 전기 시설이 없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둡다. 특별히 할 일도 없다. 침대를 펼치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언덕 위에 있는 캠핑장이라 비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자동차가 바람에 흔들리기도 한다. 인간 사회를 떠나 황량한 들판에 홀로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인간관계를 떠나 자연과 함께하는 고생을 즐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호주 동포신문 '한호일보'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태그:#뉴질랜드, #남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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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서 300km 정도 북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에서 은퇴 생활하고 있습니다. 호주 여행과 시골 삶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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