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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 여사의 빈소 제단에 무궁화대훈장이 놓여있다.
 2019년 6월 11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 여사의 빈소 제단에 무궁화대훈장이 놓여있는 모습.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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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 여사님! 하늘나라에서 편히 지내십니까? 아마 이즈음은 그곳으로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몹시 바쁘실 것 같습니다. 먼저 가신 민주 열사 및 인사 그리고 동지들을 찾아뵙거나 그분들의 문안 인사를 받느라 분망하시겠습니다. 또한 먼저 가신 부군(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그동안 이승 일들을 도란도란 나누시느라 지상을 내려다보실 여유조차도 없으시겠습니다.

여사님이 떠나신 지 40여 일, 이승은 별다른 일 없습니다. 해와 달은 뜨고 지고, 낮이 가면 밤이 오고 있습니다. 여사님이 못내 보고 싶어하셨던 평화로운 남북간의 교류 모습은 아직은 큰 진전이 없습니다. 다만 지난 6월 30일,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66년 만에 남·북·미 세 정상이 분단 현장인 판문점에서 만나고, 그 자리에서 북미 두 정상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습니다. 온 겨레에게 평화통일의 푸른 신호 등불로 비쳤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남북 평화통일로 가는 길은 첩첩산중입니다. 당신 유언이 이 세상 사람들 힘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늘나라에서 더욱 많이 도와주십시오.
 
"우리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희호 여사님! 여사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시던 6월 10일, 저는 언론 보도를 통해 위독하시다는 사실을 듣고, 초저녁부터 쾌유를 비는 글을 썼습니다. 그날 자정 무렵 그 글을 다 쓴 뒤 "올 연말 크리스마스카드도 기다리겠습니다"라는 제목을 달아 제가 자주 기고하는 <오마이뉴스>에 송고했습니다. 그런 뒤 막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 여사님의 부음을 접했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이른 아침 "올 연말에는 이희호 여사의 카드를 받을 수 없게 됐습니다"라고 제목과 본문을 손봐 다시 송고했습니다. 올 연말에는 여사님께서 해마다 보내주시던 그 크리스마스카드를 받지 못해 매우 섭섭할 것 같습니다.
 
 어느 해(2010) 연말 크리스마스카드 속지
 어느 해(2010) 연말 크리스마스카드 속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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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이희호 여사님! 저는 오늘 여사님을 추억하면서 언젠가 보내주신 <동행>이라는 저서를 다시 펼치고는 소곤소곤 들려주신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 내외가 방 한가운데 나란히 앉아 9시 뉴스를 보면서 오늘의 행사를 되새겨 보니 새삼 감격스러웠다.
김대중 : "갖은 고난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이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이희호 : "드디어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국민들 잘 살게 해 주세요. 진심으로 축하해요."
김대중 : "당신도 수고가 많았소."
이희호 : "내가 한 일이 뭐 있다고."
김대중 : "아니오. 당신이 없었으면 나에게 오늘이 있었겠소."
그가 나의 손을 쥐었다. 긴장된 긴 하루였다. - 이희호 지음 <동행> 323쪽


그 사람(김대중)은 노모와 어린 두 아들을 거느린 가난한 남자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셋방에는 앓아누운 여동생도 있었다. 또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정치 재수생이었다.

(그는) 1954년 처음 정치에 투신해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후, 한 번은 후보 등록이 취소되었고, 세 번이나 고배를 마신 좌절의 연속이었다. 1961년 5월 13일 강원도 인제의 보궐선거에서 마침내 당선되었으나 사흘 뒤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어버렸다. 그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장면 내각에서 여당인 민주당 대변인을 지냈던 경력 때문에 검거되어 두 차례에 걸쳐 3개월간 구속된 억세게 운이 나쁜 남자였다.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는 큰 꿈과 열정이 그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 위의 책 65쪽

 
 
이희호 여사는 서울 사대문 안 부유한 전주 이씨 가문인 의사 이용기 선생과 연안 이씨 이순이 선생의 6남 2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나셨지요. 이화여고와 이화여전 문과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에 진학한 뒤, 사범대학교육학과로 전과하여 졸업하셨습니다. YWCA 총본부 외교국장으로 활동하다가 미국 램버스대학에서 사회학을 수학하고, 스카렛대학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 YWCA 연합회 총무를 맡은 재원이셨지요.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대통령, 두 사람은 집안이나 학벌 등 결혼조건이 형평에 맞지 않는, 세속적인 이해관계로는 쉽게 이뤄질 수 없는 인연이었습니다. 
 
내가 그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당연히 주위에서 반대가 극심했다. 가족은 물론 친지, YWCA, 여성계 선후배들이 극구 만류했다. 눈물로 호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화여전 스승이자 대한 YWCA 연합회 회장을 지낸 김갑순 선생님의 회고다.

이희호 총무가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부드러운 성격에 강한 책임감으로 좋은 사회운동가 기질을 타고났다고 기대를 많이 걸었던 YWCA 관련 어른들은 김대중 씨와 결혼을 반대하기로 했다. 조건이 나쁜 그와의 결혼으로 헤어 나오기 어려운 함정에 빠져 좋은 일꾼 하나 빼앗기고 앞으로 여성 지도자로 대성할 재목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서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도록 공작을 폈다. 그러나 평소 신중했던 그가 비장한 각오로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라고 말하는 데는 더 이상 반대를 할 수 없었다. - 위의 책 66쪽
 
 
여사님의 저서를 보니, 정혼도 무척 정치적이고 논리적이었더군요.
 
"당신도 알고 있듯이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며, 나와 아이들을 돌보아주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에게 정치는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이 존재 이유였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 - 위의 책 69쪽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습니다.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곧 거세게 노크했다"라고 회고하셨죠.
 
 자서전 <동행> 초대장 겉그림(2008. 11.)
 자서전 <동행> 초대장 겉그림(2008. 1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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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정치인의 동반자
 
김영삼 41%, 김대중 33%, 정주영 16%. 응접실에서 같이 텔레비전 개표 방송을 보던 백경남 교수 일행이 돌아가자 안방으로 갔다. 당사에서 11시쯤 들어온 남편이 쓸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번에도 하느님은 나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이제 정계를 떠나려고 하오.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써주오."

그의 비장한 결정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그가 구술하고 나는 받아 적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또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패배를 겸허한 심정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합니다. …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로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습니다." - 위의 책 302쪽
 
 
강행군을 마치고 5시쯤 숙소로 돌아오니 대통령은 아직 정상회담 중이라고 했다. 2시간째 계속하고 있었다. 잠시 휴식 차 온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 6시 전에 다시 회담장으로 갈 때는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무거운 걸음을 떼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 고독하고 힘겨워 보였다. 한동안 배웅하면서 서 있자니 눈가가 젖어왔다. 누구에게 들킬세라 나는 얼른 눈가를 훔쳤다. 막중한 책임을 진 사람은 결정적 순간에 무섭게 외롭다. 그날의 그가 결혼생활 중 만난 가장 고독한 모습이었다. - 위의 책 340쪽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합의 직전 남편 김대중 대통령의 고독한 모습을 위와 같이 기록하셨더군요. 당신께서는 대단히 지혜롭고 의지가 투철한 신념의 여성 지도자로써 이 땅에 여권 신장과 민주주의의 발전 그리고 남북이 함께 평화통일의 길로 가는데 주춧돌을 놓으신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악수(2008. 11. 11. <동행> 출판기념식장에서.
 어떤 악수(2008. 11. 11. <동행> 출판기념식장에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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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님과 저는 학부모와 교사의 관계로 연을 시작했지요. 대체로 학부모와 교사의 만남은 학생 재학 중에는 돈독했다가 학생 졸업 후에서 그 관계가 씻은 듯이 사라지기 일쑤였지만 여사님은 정반대였습니다.

학생 졸업 후 15년이 지난, 이희호 여사가 청와대로 들어간 뒤부터 인연이 돈독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이마도 그즈음에야 언저리를 돌아볼 여유를 가지셨나 봅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청와대에 계실 때는 단 한 번도 만나뵌 적이 없습니다.

마치 두보의 시 한 구절처럼 '꽃 지는 시절'(현직에서 물러난 뒤) 한 차례 만났을 뿐입니다. 그 뒤 20년이 넘도록 여사님께서는 해마다 크리스마스카드를 빠트리지 않고 꼭 보내주셨지요. 지난날에 대한 감사와 앞날에 대한 부탁의 뜻이 담겼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희호 여사님! 당신의 아드님 김홍걸 민화협 상임의장은 청출어람으로 이제는 저의 격려나 훈수가 필요 없는 훌륭한 인물이 됐습니다. 당신 아드님이 민족화해와 분단 극복에 큰일을 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한반도에 전쟁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마침내 이 땅 곳곳에 평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하늘나라에서 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 많이 기도하여 주옵소서.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옵소서.

2019년 여름, 원주 치악산 밑에서. 옛 훈장 박도 올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민화협이 발간하는 <민족화해> 99호(2019. 07-08. )에 실린 글을 일부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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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