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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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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가 5살이다. 두 아이가 자라는 만 4년 동안, 엄마인 나도 머리에서 발까지 천천히, 그리고 골고루 비대해졌다. 게으르게 지냈던 건 아니다. 내가 부지런 떠는 대부분의 일상은 설거지와 청소, 아이들 등하원, 그리고 글쓰기였다. 작은 우리 집이 육체를 쓰는 세계의 전부였다.

덕분에 팔, 다리, 배에 사이좋게 지방이 붙었다. BMI 수치는 23.9로 치달았다. 과체중이 되어버린 거다. 아이들 등하원 시간에 아파트를 오르내리는 일 말고 더 많이 움직여야 했다.

살을 빼기 위한 운동치고 헐겁기 짝이 없지만, 일단 하루 7천 보, 딱 이만큼만 걸어보기로 했다. 만 보는 아니니까, 이쯤은 만만해 보였다. 결심 후, 매일 걷기 시작했다. 핸드폰에 만보계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한 후 까만 면 반바지에 반소매 티를 입고 동네 곳곳을 누볐다.
     
하루 7천 보, 동해를 만나다
 
나는 동네를 걸었고, 여기는 동해였다. 서쪽으로 걸으면 태백산맥이 보이고, 동쪽으로 걸으면 동해가 있는 아담하고 소박한 도시. ⓒ 최다혜
 
나의 동네는 강원도 동해시다. 태백산맥과 동해 사이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소박한 도시. 건강을 챙기기 위해 어기적대며 걸었을 뿐인데, 하루 7천 보는 세계를 넓혀줬다. 30년을 동해에서 살았지만, 자동차가 아닌 육체로 확인한 세계는 더 생생했다.

만보계를 들고 수시로 확인하면서 동해의 주요 장소들을 '몇 보' 단위로 재기 시작했다. 무릉계곡 입구에서 용추 폭포까지 5천 보, 전천에서 바다 보며 출발해 태백산맥 줄기 자락까지 걸으면 5천 보, 해안 숲길은 4천 보, 묵호 수변공원에서 등대 논골담길은 3천 보, 가원습지 한 바퀴는 천 오백 보.

'운동'으로 걷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걸으면서 쉴 수 있었다. 등원 차량 시간에 맞춰 아이들 옷을 급히 갈아입히고, 땅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주워담을 때가 마음이 더 급했다. 걷기 위해서는 전신을 움직여야 하지만, 거의 무의식적인 행위다. 덕분에 머릿속은 자유롭고 편안하다. 가로수로 심어진 메타세쿼이아와 푸른 하늘이 너무 잘 어울려 행복하게 걸으며 쉴 수 있다.

대관령을 훌쩍 넘어 동해로 피서 올 분들에게 걷기 코스를 선물해 드리고 싶다. 작정하고 만 보를 채우려 하지 않아도, 만 보쯤 걷게 되는 동해의 아름다운 곳들. 먼저 걸어 본 동해 현지인으로서 안내해 드리려 한다. 
 
세상을 탐험하는 것은 마음을 탐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걷기는 세상을 여행하는 방법이자 마음을 여행하는 방법이다. -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많은 분들이 동해시를 걸으며 마음에 여유를 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했다. 준비는 필요 없다. 길일 뿐이다. 그러니 입장료도 당연히 없다. 그저 이곳을 걸으시면 된다.

①망상 해수욕장 
 
동해 망상해수욕장 ⓒ 최다혜
 
수도권에서 동해로 오는 분들은 망상해수욕장(아래 망상)을 가장 먼저 만나실 수 있다. 설탕 입자 굵기의 가늘고 흰 모래와 동해시에서 제공하는 숙소가 매력적인 곳이다. 망상의 최남단 제2오토캠핑장에서 최북단 한옥마을까지 조성된 산책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산책길 너머로는 올봄, 동해 산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망상의 캠핑장도 피해를 당했으나, 동해시설공단은 해수욕장 개장 직전까지 작업했다. 덕분에 올해 안에 못 들어가볼 줄 알았던 망상의 시립 숙소 '망상 해변 한옥마을'로도 걸을 수 있다. 한옥촌 옆에는 '산불 생존 카라반' 7대가 있다. 도깨비불처럼 튀어 다녔다는 2019년 동해안 산불마저도 피해간 오토캠핑카라면, 행운이 깃들지 않았을까 하는 환상마저 생긴다.
     
다른 어디를 걸을 때보다 해수욕장 옆을 걸으면 몸과 마음이 이완된다. 오직 쉬기 위한 사람들만이 찾는 곳이기 때문인 걸까.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풍경에 너그러워진다.

3살, 5살 난 두 아이가 모래에서 허우적대면, 그날 저녁 온몸에서 모래를 털고 샤워를 시키느라 전쟁일 게 뻔하다. 하지만 해변의 느긋함 때문일까. 매번 집에 돌아갈 때 후회하면서도 바다에 있을 때만큼은 관대하게 함께 모래로 다이빙해 버린다.
   
동해 망상해수욕장 ⓒ 최다혜
 
[여행 정보]

- 7월 19일부터 9월 11일까지 망상해수욕장 내 ANGVA 전시관에서 연어 페스타가 열린다. 연어 요리와 수제 맥주를 곁들여 먹을 수 있고, 연어 맨손 잡기 체험 및 연어 관련 도서전까지 구경할 수 있다.

- 망상 해수욕장 모래사장 내, 어린이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워터 슬라이드가 있다. ANGVA 전시관 옆에는 이동식 놀이동산이 있어 아이들과 놀기에 안성맞춤이다.


②묵호 수변공원과 논골담길
 
묵호 등대 ⓒ 최다혜
 
망상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묵호 어시장이 나온다. 싱싱한 회를 직접 떠서 바로 먹을 수 있는 회센터와 카페들이 바다를 따라 이어진다. 묵호 시장도 있어 해물 칼국수와 전, 호떡, 김밥 등을 푸지게 먹고 산책할 수 있다.

배를 채우면 묵호 수변 공원으로 간다. 수변 공원에서는 테트라포드로 이어진 긴 방파제 길 위에서 깊은 바다를 옆에 두고 1천 보를 걸을 수 있다.

방파제 너머로 야트막하게 솟아오른 해안 단구 위로 동해 시내가 보인다. 동해 시내 너머로는 동해 최남단인 추암까지 빼꼼히 있다. 작은 도시인 동해는 높은 건물이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 우리의 시야가 방해받지 않을 때 어디까지 조망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수변 공원 입구 맞은편에는 묵호 등대로 이어지는 논골담길이 나온다. 60년 전의 길을 훼손하지 않고 벽화만 덧대 꾸민 가파른 언덕길이다. 한 길로 쭉 이어지다가 등대 바로 아래에서 등대오름길과 바람의 언덕길 둘 중 하나를 선택해 걸을 수 있다. 어디를 먼저 가도 좋다. 바람의 언덕과 등대는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논골담길을 오르내리다 보면, 벽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묵호에서는 철학도, 인문학도 전부 길가의 개똥이다.' 먼바다에서 고기 잡고, 언덕 위로 무연탄과 등대 지을 돌을 나르던 묵호 사람들에게, 인문학이나 철학이 무슨 쓸모가 있었을까. 바람의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색종이 같은 지붕 얹은 작은 집들의 사연을 상상해보며 걷는다.
 
묵호 논골담길 바람의 언덕 ⓒ 최다혜

[여행 정보]

- 논골담길 중 바람의 언덕으로 올라가면 '논골 상회', '논골 카페', '논골 식당'을 만날 수 있다.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상점, 카페, 식당으로 저렴하면서도 깨끗하다. 무엇보다 바람의 언덕에서 묵호항을 조망하며 잠시 쉴 수 있다.
   
③추암 출렁다리와 촛대바위
 
추암 촛대바위 ⓒ 최다혜
 
마지막으로 추암 해수욕장(아래 추암)으로 향한다. 묵호에서 차를 타고 20분 정도 이동해야 한다. 추암은 해수욕보다 '촛대바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애국가 첫 장면에서 하얗고 길게 우뚝 솟은 바위 위로 해가 넘실 떠오르는데, 그 바위가 추암의 촛대바위다.
 
추암 출렁다리 ⓒ 최다혜

추암은 물놀이보다 걷기에 더욱 특화돼 있다. 주차장 입구부터 조각공원이다. 조형물을 감상하며 낮은 산을 오르면, 출렁다리가 나온다. 개장한 지 한 달 남짓 된 따끈한 다리다.

다리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철망이 있어 깊은 바다가 아찔하게 내려다보인다. 바위로 만들어진 오목한 만에, 소금기 가득한 하얀 파도가 바위에 강하게 부딪친다. 아름답고 서늘한 광경인데, 간담을 더 서늘하게 만드는 건 출렁다리가 이름값 하며 잘 출렁대서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보장된 안전 속에 마음 졸이며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으니까.
 
출렁다리에서 내려와 해암정을 둘러본 후, 바로 촛대바위로 향한다. 산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낮은 언덕을 1~2분 즈음 오르면 촛대바위를 볼 수 있다. 들인 공은 적지만 결과는 대만족이다. 단단하고 하얀 바위들로 둘러싸인 이 언덕은 어디서 찍어도 화보다. 시선을 옆으로 옮기면 건너온 출렁다리도 아득히 볼 수 있다.
 
추암 출렁다리 옆 풍경 ⓒ 최다혜
 
[여행 정보]

- 추암은 동해와 삼척의 경계다. 해수욕장의 해변을 걸으면 삼척 이사부 사자공원이 나온다. 이름 그대로 독도를 지킨 신라 장군 이사부 장군을 기리는 공원이다. 추암에서 이사부 사자공원까지 따라 걸으면 왕복 4천 보 정도 거뜬히 더 채울 수 있다. 마침 이사부 사자공원에서는 그림책 전시회를 겸하고 있는 데다, 물 미끄럼틀과 어린이 놀이터도 두 군데나 있다. 차를 타고 20분이나 달려왔는데 2천 보밖에 걷지 못한 것이 아쉽다면, 시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사부 사자공원에 다녀와 봄직 하다.


걷기는 곧 자유     
 
묵호 논골담길 ⓒ 최다혜
 
바다를 혼자 걸으면 뭐라도 생각하게 되고,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걸으면 뭐라도 이야기하게 된다. 땡볕에서 땀 흘리는 두 아이의 이마를 쓸어주고, 목마르다는 아이들에게 물을 찾아 먹였다. 모래를 만지려는 아이들을 말리다가 포기하기를 반복하며 걷기도 했다. 인적 없는 넓은 데크가 나오면,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틀어 놓고 춤을 췄다.

걸을 수 있다는 건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상징하는 지표다. 시간과 공간이 마련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걸어야 한다. 집에서 가사 노동과 육아, 일에만 전념했던 나는 일부러 걷고 나서야 자유를 얻었다.

살고 계신 그 어딘가에서 걸으시다가, 바다가 생각나시면 동해로 훌쩍 오셔도 좋다. 바닷길뿐만 아니라 다음에는 '계곡과 산', 그리고 '강가'를 따라 걷는 길도 알려드리고 싶다. 여러분의 걷기를 위해. 그리고 자유를 위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dahyun0421)에도 실립니다.

태그:#동해걷기여행, #강원도동해, #바닷길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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