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편집자말]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영화 포스터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영화 포스터 ⓒ Buena Vista International

  
코미디 장르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배우들을 보면 그들이 비슷한 캐릭터의 반복을 통해 각자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벤 스틸러가 잘생긴 외모에 사회적으로도 나름 성공했지만 적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 내는 소심한 남자를, 아담 샌들러가 무기력하고 때로는 염세적이기까지 한 남자를 맡고 있다면 잭 블랙은 보잘것없는 외모에 성격은 편협하고 고약하지만 결코 미워할 순 없으며 자존감만큼은 그 누구보다 높은 괴짜 캐릭터를 맡고 있다. 

2000년에 개봉한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잭 블랙은 비록 조연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캐릭터로 데뷔 10년 만에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영화 이후 그는 말 그대로 승승장구하며 세계적인 스타 배우로 자리한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스틸컷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스틸컷 ⓒ Buena Vista International

 
영국 출신 작가 닉 혼비의 소설 <하이 피델리티>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는 실연당한 한 남자가 자신의 연애사를 되돌아보며 사랑과 관계에 대해 깨달음을 얻게 되는 성장 드라마이자 로맨틱 코미디이며 1990년대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뮤직 드라마다.

레코드 가게 '챔피언십 비닐'을 운영하는 롭(존 쿠삭)의 연애는 언제나 여자들이 먼저 그를 떠남으로써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무리 되었다. 그의 첫 여자 친구는 첫 키스 후 3일이 지나고 그를 떠났으며 고등학교 때 사귄 똑똑하고 아름다운 페니와는 키스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해 그가 그녀를 먼저 떠났음에도 그녀가 이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버림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찰리(캐서린 제타 존스)는 연애하는 내내 그를 불안하게 만들다가 그를 차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버렸고, 실연의 아픔을 서로 위로하던 사라는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그를 떠났다. 

로라(이벤 야일리)와의 연애는 그가 전에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과 신뢰를 가져다준다. 예쁘고, 착하고, 유머감각도 있고, 이해심도 깊고, 게다가 능력까지 있는 그녀와의 연애는 순조롭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이별을 고한다. 이별의 징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던 그는 떠나는 로라의 뒤통수에 대고 마음에도 없는 막말을 퍼붓는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스틸컷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스틸컷 ⓒ Buena Vista International

 
음악광인 롭은 우리가 불행해서 음악을 듣는 것인지, 아니면 음악(사랑, 배신, 고통, 실연을 노래하는)을 들어서 불행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을 만큼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음악을 결부시키고, 가게에서 손님들을 위해 앨범 순위를 매기는 것처럼 앞서 얘기 한 옛 연인들과의 연애를 떠올리며 아픔의 순위를 매긴다. 그리 유쾌하지 않은 지난 연애를 기억하면서 그는 도대체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인지, 정말 자신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 한다.

그의 연애생활 못지않게 레코드 가게 운영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LP판이 아닌 CD로 음악을 듣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된 지 오래인 1990년대 말, 사람들은 깔끔하고 친절한 대형 프랜차이즈 음반 가게에서 음반을 구입한다. LP판들로 가득 채워진 '챔피언십 비닐'의 매출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 그나마 나름 음악 좀 듣는다는 마니아, 혹은 괴짜들 덕분에 롭의 가게는 근근이 유지되고 있다. 

가게의 직원인 딕(토드 루이소)과 베리(잭 블랙)는 롭 못지않은 음악광으로 시도 때도 없이 고객이든 사장이든 상관 않고 음악에 대한 토론을 벌인다. 자신의 근무일이 아닌 날에도 출근해 자신과 취향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베리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괴짜로 수년째 밴드 멤버를 모집 중이다.

그는 사장인 롭이 버젓이 보고 있음에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고객에게는 앨범을 팔지 않으며 롭 또한 거기에 크게 화를 내지 않는다. 이렇게 자유로운 가게의 분위기가 영화의 매력을 더하는 동시에 영화가 나온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1990년대에 대한 향수까지 자극한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스틸컷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스틸컷 ⓒ Buena Vista International

 
시간이 흐를수록 롭은 로라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또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자신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는지 깨닫는다. 관계가 깊어지면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그는 회피해왔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면서 그녀의 소중함을 과소평가했으며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자극, 유혹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다른 가능성들을 저울질했다. 그는 이제 환상과 현실을 비교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극한의 슬픔을 겪으면서 자신의 솔직한 마음, 자신의 마음이 롭에게 있음을 마주한 로라가 롭에게 돌아가고, 이제 사랑이 뭔지, 관계가 뭔지 알겠다는 롭이 로라만을 위한,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들로만 가득한 노래 테이프를 만들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는 푸념과 자기성찰이 잘 어우러진 한 남자의 연애사를 가볍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국내에서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원작자로 더 유명한 닉 혼비의 재치와 개성이 돋보이는 원작의 매력과 영화에 걸맞은 각색, 그리고 전작들에서 장르를 불문하고 뛰어난 연출력을 보여준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과 흠 잡을 데 없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의 만남이 인상깊다. 게다가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카메오부터 팀 로빈슨, 캐서린 제타 존슨, 조앤 쿠삭, 리사 보넷 등화려한 조연 군단까지.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는 사랑과 음악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할 거리들을 많이 던져주는 매력적인 영화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스틸컷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스틸컷 ⓒ Buena Vista International

 
이 영화가 가진 수많은 미덕 사이에서도 잭 블랙의 매력은 특히 눈에 띈다. 괴팍하고, 고약한, 곁에 있다면 절대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꼭 미워할 수도 없는, 그래서 작품 속 캐릭터로서는 누구보다 매력적인 인물을 잘 살려낸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주연으로서의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잭 블랙은 1년 후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기네스 팰트로의 상대역으로 출연해 흥행에도 성공하면서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2003년 <스쿨 오브 락>에서는 코미디뿐만 아니라 자신의 음악적 재능까지 가감 없이 보여주는데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그가 연기한 베리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그의 원맨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쿨 오브 락>과 <나쵸 리브레>(2006), 웃음기를 뺀 <킹콩>(2005), <로맨틱 홀리데이>(2006), 그리고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 <쿵푸 팬더> 시리즈에서 주인공 포의 목소리 연기까지. 지난 20여 년 동안 캐릭터의 한계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품 속에서 그의 매력은 빛을 발했다. 

추신. 그가 출연한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신작 <돈 워리>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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