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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통치 반대시위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 광경
▲ 신탁통치 반대시위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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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두고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 '카이로 선언'의 'in due course', 즉 '적절한 방법으로' 혹은 '적절한 절차를 거쳐'라는 문구의 구체적 의미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통해서 그 윤곽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4강대국, 보다 정확히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 양국의 '신탁통치안'이었다. 신탁통치에 대해서 해석의 여지가 있다 해도 핵심은 결국, 독립국가 수립 전에 상당 기간 위임통치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서처럼 과도정부를 구성한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동 결정은 제3항에다 최고 5년에 걸친 4개국 신탁통치를 적시했다. 거기다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완전한 독립국가로 가기위해 복잡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의 다단계 절차를 규정해 놓았다. 완전한 독립도 아니고 그렇다고 식민지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상태가 바로 신탁통치안의 본질이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이 아니라 독립에 관한 의정서일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 주장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미국 동아시아 국제주의 정책 일환으로서의 신탁통치안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미국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졌다.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한반도에서는 찬반 여부를 놓고 좌, 우익 간의 격렬한 정치적 대립이 발생했다. 여기서는 찬반 여부를 떠나서 신탁통치안이 그 자체로 한반도문제 해결에 적절한 정책이었는지를 따져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신탁통치구상에 담긴 미국의 정책적 의도와 함께 신탁통치안을 뒷받침한 국제주의 노선의 본질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

해방과 함께 미국이 한반도에 들어온 목적은 '일반명령 1호'에 따라 종전 계획, 곧 군사적 점령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위 38도선을 따라 마련된 소련과의 분할 점령이 나타내듯이 패전국 처리라는 군사작전 수행이 급선무였다. 이러한 작전계획에 의거하여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남한과 북한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식민지 노예상태에서 벗어난 조선인들은 독립국가 수립을 강하게 열망했다. 따라서 미국과 소련은 군정체제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조선을 독립시킬 것인가? 이때 미국이 떠올린 해법이 식민지 처리 방식으로 오랫동안 구상해온 '신탁통치'였다.

그런데 문제는 '신탁통치안'이 한반도문제 해결에 적합한 맞춤형 정책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신탁통치가 등장한 기원을 살펴보면, 이든 영국 외상이 1943년 3월 워싱턴을 방문해 전후 식민지 처리문제에 관해 루즈벨트 대통령, 헐 국무장관 등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든 외상에게 식민지 독립 방안으로 신탁통치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국은 미국의 제안을 마지못해 수용했다. 하지만, 미국 구상대로만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은 왜 식민지의 즉각적 독립방안이 아니라 신탁통치안을 들고 나왔을까? 전후 미국이 표방한 국제주의 관점에서 신탁통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탁통치안은 연합국으로 전쟁에 참여한 서유럽 국가들과의 협조를 유지하기 위한 발상이었다. 왜냐하면, 유럽 승전국들 대부분이 거대한 식민지를 보유했으며, 이들은 종전 후에도 식민지를 순순히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탁통치구상은 탄생 단계부터 식민지 주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승전국들 사이의 국제적 협조 유지가 일차 목적이었다.

더 큰 문제는 신탁통치가 전승국,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처리 방안으로 제시된 정책이었다는 사실에 비춰봤을 때,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는 논리적으로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영국 식민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즉각적 독립을 성취한 반면, 프랑스는 전후에도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원래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도 신탁통치를 실시할 예정이었지만 프랑스의 거부로 운도 떼지 못했다. 이처럼 전후 미국이 주도한 신탁통치안은 일관성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승국들의 반대에 의해 쉽게 좌초됐다.

이처럼 허접하기 짝이 없었던 신탁통치 구상이 유독 한반도에서 격렬한 갈등을 야기한 이유는 조선이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과 함께,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이 분할 점령을 통해 한반도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한반도에서 신탁통치 실시문제를 놓고 국무부와 군정 당국 등 미국 정책부서 간에 일정한 파열음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부서 간 갈등이 과연 정책노선을 달리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신탁통치 해석을 둘러싼 국제주의 노선 내부의 정책 갈등

한반도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정책노선 상의 갈등으로 보는 대표적 논자가 바로 브루스 커밍스다. 신탁통치안을 놓고 국제주의자들과 국가이익을 우선시 하는 국가주의자들 사이에 정책적 갈등이 있었고, 결국 국가주의자들이 승리해서 한반도를 분단에 이르게 했다는 게 커밍스의 핵심 주장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커밍스는 이러한 갈등을 번즈, 빈센트, 보튼 등 국무성에 속한 국제파(Internationalist)와 하지, 베닝호프, 랭던 등 미 군정에 속한 국내파(Nationalist) 사이의 대립으로 파악했는데, 국제파는 다국적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데 반해, 국내파는 사실상의 대소봉쇄인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B. Cumings. 1981.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p.214).

'신탁통치안'에 대한 커밍스의 해석은 과장된 측면이 있거나 미국 대외정책의 변천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지나친 단순화다. 국제주의냐 국가주의냐 여부는 단지 신탁통치에 대한 입장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커밍스가 규정한 '국가주의자들' 역시 국제주의 자장 안에서 자기 합리화의 근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커밍스가 언급한대로 신탁통치안에 대한 국제파와 국내파 또는 국제주의자와 국가주의자 사이의 정책적 대립이라는 이분법이 지극히 자의적이라는 점이다. 소련과의 협조노선을 주장한 국제주의자들은 실제로는 번즈 국무장관을 비롯해서 해리먼 주 소련 대사, 에드윈 폴리 대통령 특사 등 국무부 라인이 아니라 비둘기파로 분류된 마셜 합참의장 등 군부 쪽 인사들이었다. 왜냐하면, 육군성이나 총참모부 등 군부 인사들은 소련의 참전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커밍스 기준에 따르면 오히려 국무성 인사들을 반소련 노선을 견지한 '국가주의자'들로 분류하는 게 더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국제주의를 떠받친 두 가지 기둥은 문호개방과 '무조건 항복론'과 같은 과감한 군사적 행동주의였다. 국제주의를 탄생케 한 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상황을 감안했을 때, 국제주의를 해석하는 데 가장 중요한 매개변수는 소련과의 협조를 전쟁 후에도 과연 지속할 수 있는가 여부였다. 그러므로 소련과의 협조관계 지속 여하에 따라 국제주의에 대한 해석은 고정불변한 게 아니라 A부터 Z까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었다.

국제주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커밍스가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국제주의와 국가주의의 갈등으로 해석한 국무부와 미 군정세력 간의 다툼은 실상은 국제주의 노선을 전제로 한 정책적 갈등으로 해석하는 게 보다 타당하다.

국무부는 신탁통치를 견지하다가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한반도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다. 이런 조치를 취하면서 국무부는 아무런 모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UN으로의 한반도문제 이관 또한 커밍스가 말한 '국가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신탁통치를 추진하건 아니면 유엔으로 이관하건 모두 국제주의에 근거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소련과의 협조노선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판단 외에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한반도문제에 대한 무지의 산물로서의 신탁통치안

미국은 어째서 소련과의 협조노선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까? 소련과의 협조노선을 지속하는 문제에 있어 판단의 최소 기준은 미국이 오랫동안 주창해온 문호개방원칙의 지속 여부였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 친소정권이 들어선 사건, 그리고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 게 미국의 정책변화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간주된다.

미소공위에서 미국이 철수한 사실 역시 한반도 안에서 남남 혹은 남북 갈등이 불거져 그렇게 됐다기보다 전 세계적 차원의 미소협조 결렬이 더 크게 영향을 미쳤다. 세계 전략적 차원에서 미국과 소련의 협조노선이 계속 유지되고 갈등이 오직 한반도에서만 불거진 것이었다고 한다면 미국과 소련은 분단이 아니라 남북단일정부 수립을 위한 공동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남북 모두에 영향력을 시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했을 때 신탁통치안이 과연 한반도에서 분단을 해소하고 자주적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데 적절한 방안이었는지 되물어야 한다. 신탁통치는 남북단일정부를 수립하는 데 적합한 방안이 결코 아니었다. 신탁통치안은 그것이 처음 제기됐을 때부터 한국인들은 독립국가를 유지할 만한 자치능력이 결여돼있다는 대단히 근거 없는 추론에 기초했다. 이 추론은 신탁통치를 주창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이하 국무부의 소위 '국제주의자들' 모두가 공유한 한반도문제에 대한 기본 가정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발을 다시 들여놓기 전까지 미국은 한반도문제에 관해 대단히 무지했다. 따라서 신탁통치안은 미국이 지속적으로 견지해온 한반도문제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 달리 표현하면 동아시아정책과 한반도문제의 분리 내지 디커플링의 산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1944년 1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평양전쟁협의회에서 조선을 40년간 신탁통치 아래 둔다고 발표하면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은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40년간 신탁통치구상이야말로 미국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무지 혹은 정치적 무관심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소련과의 협조노선에서 냉전형 국제주의로 : 한반도문제의 유엔 이관

신탁통치안이 예상과 다르게 한국인들의 거센 저항에 부디치자 미국 정책당국은 대단히 곤혹스러워했다. 그들은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할 때만큼이나 폭풍 속으로 들어왔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 숙고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러일전쟁 당시 태프트·카쓰라 밀약을 맺어서 한반도문제를 일본에 이관했던 것과 대단히 흡사하게, 이번에는 너무나도 손쉽게 한반도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할 수 있었다.

한반도문제의 유엔으로의 이관이 한반도에 어떤 파국적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미국은 과연 몰랐을까? 유엔이관이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조치임을 과연 몰랐을까? 유엔 감시에 의한 동시선거안을 북한과 소련이 진정 수용할 것이라 생각했나?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예'라고 답한다면 그만큼 미국이 한반도문제에 무지했고 정치적으로 순진했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그렇지 않고 '아니오'라고 답한다면 그만큼 한반도문제 해결에 관심이 없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정치적 관심'이 아니라 '군사전략적 고려'가 미 정책당국의 마음을 지배했음을 말해 줄 뿐이다.

미국이 과연, 커밍스 말대로 '신탁통치'를 통해서 한반도 전체의 단일정부수립을 의도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순간 이미, 신탁통치가 실제로 가능한지 여부와 관계없이 남북통일의 단일정부만큼이나 남한만의 단독정부 또한 정치적 선택지로 고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미국은 남한만의 단정수립에 별반 도의적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미국은 소련의 과도정부안을 기꺼이 수용했고, 좌우합작 노력 등 한반도 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볼 이유가 상당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미국은 유엔에 의한 단정 수립을 기꺼이 자랑스러워했고 자신들의 도움으로 남한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했다고 전 세계적으로 홍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신탁통치안'은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로 요약할 수 있는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해서 마련한 진지한 계획이 아니었다. 일본 우선의 동아시아 정책과 세계적 차원의 봉쇄전략에 근거하여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면 언제라도 '한반도를 떠나기 위해' 마련한 가건물에 불과했다. 우리는 미국이, 남한에서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미군철수를 즉각 단행한 사실과 한국전쟁 직전에 발표한 유명한 '애치슨선언'에서 이러한 주장을 입증할 만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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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