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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원 선거 첫 유세 나선 아베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4일 참의원 선거가 고시된 가운데 후쿠시마(福島)현 후쿠시마시에서 첫 유세에 나서 지지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 참의원 선거 첫 유세 나선 아베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4일 참의원 선거가 고시된 가운데 후쿠시마(福島)현 후쿠시마시에서 첫 유세에 나서 지지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 교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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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경제보복을 뻔뻔하고도 자신있게 벌일 수 있는 것은 한국 경제의 일본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양국 경제의 상호 연계성이 높은 상태에서 한국의 예속성이 심하다 보니, 강제징용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하기보다는 원자재 수출을 규제하는 엉뚱한 조치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대일 의존적이 되는 과정은, 한·일 간에 현대적 무역관계가 시작된 1876년 강화도조약(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 이후 143년간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두 나라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이 기사는 한국 경제에 불리하게 작용해온 그 두 나라의 영향력에 관한 것이다.

1876년 이후 일본은 '함포 외교'로 상징되는 군사·외교력의 우위를 앞세워, 영국제 면직물 등을 중계무역 하는 방식으로 조선 시장을 잠식했다. 이후 지속적인 대일 무역적자 속에서 조선이 일본에 점차 의존하게 되는 상황이 청나라와 일본의 무역통계에서도 확인된다.

1859~1948년의 청나라 및 중화민국 수출입 통계를 기록한 <중국 구(舊)해관 사료>의 '조선 부록'에 따르면, 조선 무역통계가 남아 있는 1885~1893년에 조선의 전체 순무역액(순수 무역액, 재수출액 공제) 4670만 5213멕시코달러 중에서 74.4%인 3475만 9055멕시코달러가 일본과의 무역에서 발생했다. 무역통계가 멕시코달러로 집계된 것은, '조선 부록'을 작성한 청나라의 통계가 멕시코달러로 작성됐기 때문이다. 조선 대외무역의 74.4%가 일본에 의존한 데 비해, 일본 대외무역이 조선에 의존한 비율은 매우 낮았다. 대장성이 발간한 <대일본 외국무역 연표>에 따르면, 1885~1893년 일본의 전체 무역액 11억 1681만 엔 중에서 대(對)조선 무역액은 2.4%인 2641만 엔에 불과했다.

조선의 대일 의존율은 74.4%인 데 반해, 일본의 대조선 의존율은 2.4%에 불과했다. 일본의 군사·외교적 우위 속에서 조선이 일방적으로 적자를 감수하는 가운데, 조선의 대일 의존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것이다.

한국 경제가 대일 의존적으로 변하는 과정

조선의 무역적자가 얼마나 심했는가는 조선의 금이 일본으로 대량 유출된 데서도 드러난다. 무역대금을 결제할 현금이 적다 보니 그 대용으로 금이 대거 반출됐던 것이다. <중국 구해관사료>에 따르면, 위 9년간의 총 무역적자 1699만 1573멕시코달러의 48.4%인 822만 6594멕시코달러어치의 금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흘러갔다.

<1892년도 조선의 대외무역에 관한 보고서>에서 조선 총세무사 모건(F.A. Morgan)은 "이 나라의 금 유출은 외국 수입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해외로 유출된 이 나라의 상품으로 정확히 취급될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 상품을 수입하는 대가로 해외로 나간 상품이 바로 금이라는 이야기다. 금이 결제수단으로 활용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국부가 대거 유출될 정도로 조선의 대일 무역 의존 및 무역역조는 심각했다.

그 같은 의존도가 한층 더 견고해진 계기는 일본에 의한 국권침탈이었다. 의존성이 한층 더 강해지는 일은 1910년 국권침탈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에 나타났다.

1910년 이전에 조선 정부 혹은 대한제국 정부는 서양 국가들에게 무역상의 '최혜국 대우'를 약속했다. 해당 국가가 제3국들에 비해 차별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수교조약이나 통상조약에 넣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을 강점한 직후, 일본은 그런 최혜국대우 조항을 파기하지 않았다. 향후 10년에 한해 서양열강이 식민지 조선과의 무역에서 최혜국 대우를 계속 향유할 수 있도록 했다. 서양열강이 조선에 대해 갖고 있던 무역상의 혜택을 10년에 한해 연기해준 것이다. 김옥근 경상대 교수(2000년 작고)의 <한국 경제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일제는 1910년 한국을 강제 합병한 후 종래에 최혜국대우를 받기로 되어 있던 미국·청국·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 등에 대하여 한일합병이 성립된 사실을 통고하고, 종전에 한국 정부와 체결한 제(諸)조약을 무효로 하되 관세에 관해서는 10년 동안 종전대로 시행할 것을 선언하였다."
 
서양열강이 조선에 대해 갖고 있던 권리를 식민지 조선를 상대로 10년 더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일본이 그들에게 진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1894년 청일전쟁을 벌일 때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이탈리아·미국이 일본의 도발을 묵인해주고, 그 뒤 조선 강점을 추진할 때 영국과의 영일동맹과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이 도움이 됐던 데 대한 보답이었다.

"일제가 강제합병 후 10년 동안 구 관세를 그대로 실시한 이유는 일제의 조선 강점을 도운 영·미 등 열강에 대해 합병 전에 향유한 대조선무역의 특권을 당분간 보호해"주기 위해서였다고 위 책은 말한다.

하지만 이 조치가 서양열강의 이익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일본 상권은 계속해서 한국 시장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누리면서 구미의 상품을 한국에 팔고 한국 상품을 구미에 팖으로 인해 중간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고 오병석 협성대 교수의 논문 '일제 식민경제의 유산과 한국 무역'(<경영컨설팅연구> 제7권 제1호)은 말한다.

그 10년 동안에도 식민지 한국의 대일 의존도는 오히려 높아졌다고 <한국 경제사>는 말한다. 10년이 끝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식민지 한국의 대일 의존도는 점점 높아져, 나중에는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바뀌었을 정도다.

위 책은 "1920년 8월에 영·미 등 구미 각국에 대한 관세 보류 기간이 끝나게 되자, 일제는 그것을 철폐하고 일본의 관세법을 조선에까지 연장시킴으로써 식민지 조선에 대한 상품과 자본의 무제한적 유입의 길을 열었다"면서 "일제는 1920년대의 조선의 수입 무역에 있어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였다"고 말한다. 1920년에 식민지 조선과 일본을 하나의 관세 시장으로 통합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경제적 지배력을 한층 더 강화했다는 것이다.

1945년 찾아온 기회가 무산된 이유
 
기념촬영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 28일 오전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기념촬영하고 있다.
▲ 기념촬영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 28일 오전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기념촬영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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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910년 이전에는 일본의 함포외교에 의해, 1910년 이후에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의해 한국 경제의 대일 의존도가 나날이 높아져 갔다. 그런데 이 관계는 1945년 8월 15일 중대 위기를 맞았다. 한국이 만성적 의존에서 벗어나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그해 그날 주어졌다.

<민족경제론>의 저자인 박현채 조선대 교수(1995년 작고)는 '이 땅은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인가'라는 기고문에서 "1945년 8·15 이후 한일관계는 새로운 차원에서 대등한 민족관계를 바탕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지난날의 불평등했던 수탈과 피수탈 관계에 대한 보상과 함께 호혜적인 관계에서 새롭게 시작되었어야 했다"(<중등우리교육> 1992년 8월호)고 안타까워했다.

8·15 당시 21세 청년이었던 이 경제학자는,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대일 의존도가 개선되지 않는 부조리한 상황을 계속 지켜봐야 했다. 패망하고 쫓겨간 일본에 의해 한국 경제가 여전히 지배당하는 기현상이 종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나라의 힘' 때문이었다. 1876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한국 경제를 지배한 것은 주로 일본의 힘 때문이지만, 1945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그렇게 흘러온 것은 '두 나라의 힘'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한 나라는 도널드 트럼프의 나라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한일관계가 정상화되기 전부터, 미국은 한국 경제의 대일 종속에 신경을 썼다. 한국 경제가 종전대로 일본에 예속된 상태로 남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대한 원조에 관한 포스터.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대한 원조에 관한 포스터.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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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미국이 벌인 일 중 하나가, 한국에 제공한 원조자금을 일본 상품 수입에 쓰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차철욱 부산대 연구교수의 논문 '1950년대 한일무역 중단의 정치적 성격'에 이런 설명들이 있다.
 
"한국전쟁 휴전 후 시작된 미국의 부흥원조를 둘러싼 한·미·일의 갈등은 한·일 무역 갈등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갈등은 1953년 8월 4일부터 9일까지 미 국무장관 덜레스의 한국 방문으로 부각되었다. 덜레스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서명을 목적으로 방문했지만, 부흥원조의 대일 구매를 요구할 목적도 갖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자립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공업화를 위해 원조(자금)의 사용권과 원조 조달 지역, 구입 품목을 한국이 원하는 대로 하고자 구매권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소비재를 도입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무역업자에 대한 민수물자 공매제도를 한국이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구매권을 넘겨줬다."
-효원사학회가 2006년 발행한 <역사와 세계> 제30권.
 
미국이 대한(對韓) 원조를 제공하면서, 그것을 일본 소비재 상품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며 1953년에는 국무장관까지 보내서 압박을 직접 행사했다는 이야기다. 대한 원조가 한국이 아닌 일본의 경제부흥에 쓰여지도록 배려한 것이다. 위에 제시된 포스터에는 '한국을 재건하자'고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을 재건하자'는 목표로 대한 원조를 실시했던 것이다. 위의 박현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대일 종속관계는 한·미·일 삼각관계를 기초로 계속 확대·심화되면서 막대한 경제 잉여의 대일 누출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것이 그동안의 사정이다."
 
한국에 생기는 경제적 잉여가 일본으로 누출되도록 유도하면서, 미국이 한국 경제를 일본 경제에 종속시킨 이유가 있다. 미국-일본-한국 삼각 동맹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자국 하부에 있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도 위계질서가 유지돼야 미국의 삼각 동맹 운영이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8·15 때 붕괴됐어야 할 한국 경제의 대일 의존이 미국의 전략적 필요 때문에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인간적인 호소를 외면하고 도리어 경제보복을 할 수 있는 것은, 현재까지도 한국 경제가 미국의 영향력 하에 대일 의존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배의 청산을 요구하는 한국을 상대로 '너희가 먹고사는 경제구조를 상기해보라'며 아베 신조가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8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한국 기업들에 피해가 실질적으로 발생할 경우, 필요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10일의 30대 기업 간담회에서는 "우리 정부는 일본의 부당한 수출제한 조치의 철회와 대응책 마련에 비상한 각오로 임하고 있다"며 "(일본도) 더 이상 막다른 길로만 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과 정부가 추진하는 대응 조치가 일본의 경제보복을 철회시키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또다시 이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차제에 한국 경제의 대일 의존도를 감소시킬 수 있는 방안도 함께 강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일을 한국 경제의 체질을 강화시키는 기회로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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