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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대 트레일 중 가장 길고 험하다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이하 피시티) 4300km. 미국 LA 문화단체 '컬쳐앤소사이티' 기획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처한 한국 하이커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 기자말

[* 1편에서 이어집니다]

눈에 매복된 얼음장 계곡에 빠지다
  
가장 아름답다는 시에라 구간
 가장 아름답다는 시에라 구간
ⓒ 권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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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 구간에 입성한 지 2주가 지났을 무렵 존 뮤어 트레일(John Muir Trail, 운행 49일째, 운행거리 1609km)에 올랐다. 시간은 오후 6시 10분,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2시간이 남아 있었다.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고 판단하고 눈 덮인 길을 올랐다. 중간에 만난 하이커들은 눈이 녹아 위험하니 내일 새벽에 같이 오르자고 했다. 하지만 앞뒤 재지 않고 '직진 본능'을 발휘했다.

무리수를 뒀나. 눈 덮인 길에는 발자국이 없었다. 그나마 발자국이 있는 곳은 길이 여러 군데로 길게 나 있었다. 휴대전화 GPS도 먹통이었다. 등산화가 눈에 젖기 시작하더니, 눈 아래 매복된 계곡에 양 발이 다 빠져 버렸다. 얼음장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골반까지 물에 잠겼다. 다시 배까지 잠겼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3000m가 넘는 고산에 계곡물이 숨겨져 있다니. 물살마저 강했다.

"나는 할 수 있다!", "당황하면 안 돼!"

큰소리로 외치며 뛰다시피 걸어 반대편 육지에 올라섰다. 침낭과 배낭이 젖었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너무 추웠다. 다리가 얼 것 같았다. 젖은 레깅스를 벗어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반바지도 이미 젖어 있었지만 딱 붙어 체온을 흡혈귀처럼 빨아먹는 레깅스보다는 나았다. 웃옷도 벗어 맨몸에 경량 패딩만 입었다. 젖은 양말도 벗어 빨래하기 위해 구겨 둔 냄새 나는 것으로 갈아 신었다. 오후 6시 40분 존 뮤어 패스 정상에 도착했다.
  
하지만 먼저 도착한 하이커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텐트 칠 곳이 없었다.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십여 분 하산하던 중 또 발이 물에 빠졌다. 이번엔 종아리 근육 경련까지 났다. 비명을 지르며 드러누웠다. 체념을 하고 5분 정도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눈물이 글썽글썽 났다.

오후 9시, 10시, 11시 몸을 벌벌 떨며 걸었다. 랜턴 하나에 의지한 채 발자국을 밀어냈다. 새벽 1시가 돼서야 새로운 야영장에 도착했다. 한국인 하이커들이 많이 쓰는 산악용품 브랜드인 제로그램(ZEROGRAM) 텐트가 보였다. 뭔가 모를 안도감이 밀려왔다.

부랴부랴 텐트를 치고 밥과 파스타가 섞여 있는 즉석식품인 크노스를 뜨거운 물에 불렸다. 치즈 두 개도 넣어 비볐다. 밥이 입에 들어가자 눈물이 나려 했다. 젖은 옷을 나무에 걸어두고, 젖은 침낭에 발가벗고 들어갔다. 일기를 쓰려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눈물이 갑자기 터졌다. 야밤에 혼자 두꺼비처럼 '꺽꺽' 울었다. 위험한 상황에서 무모한 시도.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하지만 '해냈다, 성공했다'는 벅참도 밀려들었다.

철인경기, '피시티 챌린지'에 도전
 
24시간 챌린지를 하는 도중 60km 지점에서의 발
▲ 아름다운 나의 발 24시간 챌린지를 하는 도중 60km 지점에서의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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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티 꽃'이라 불리는 시에라 구간을 끝내고 노스 캘리포니아 구간(운행 54일째, 운행거리 1863km)에 진입했다. 이곳은 다소 지루했다. 멋진 풍경이 있는 곳도 많지 않았다. 길이 험해 성취감을 주지도 않았다. 뭔 놈의 모기는 왜 그리 많은지.

피시티 속 철인경기 '피시티 챌린지'에 도전했다. 챌린지란 하이커들이 목표를 만들어 게임처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24시간 챌린지'에 도전했다. 잠을 자지 않고 24시간 걸어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다. 나는 노스 캘리포니아 에트나(Etna, 운행 76일째, 운행거리 2574km)를 출발해 세야드 밸리(Seiad Valley)까지 80km 구간에 도전했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식욕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걸으며 초코바와 견과류를 먹었지만 식욕은 멈추지 않았다. 점심과 저녁 때는 먹어도 먹어도 계속 배가 고팠다. 구멍 뚫린 항아리 같았다. 다음은 수면욕이다. 새벽에 하이킹하다 텐트에서 단잠 자는 하이커를 본다. 또 다른 자아가 속삭인다. "마, 자라! 내일 아침에 출발해도 된다 아이가"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차디찬 새벽 공기에 웃옷을 벗고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캘리포니아 북쪽 오리건주는 '피시티의 고속도로'라 불린다. 길이 평평하고 높낮이가 완만해 빨리, 많이,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리건 2주 완주 챌린지'에 도전했다. 733km 구간을 하루 52km씩 걸어 2주 만에 끝내는 것이다.

뜻밖의 변수를 만났다. 곤충의 습격이다. 먼저 모기떼. 걸을 때 모기 주둥이를 피하기 위해 춤추며 걷다시피했다. 대소변도 꾹 참았다. 야영장에 도착해서는 냇가에 물 뜨러 가는 사이 모기 20방 정도 물렸다. 모기를 피하려고 패딩을 입고 모자로 주변을 휘두르며 밥을 먹었다. 개미 습격도 받았다. 개미가 속옷을 파고들어 사타구니를 깨물어 대는데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한반도기 펼치자 가슴이 후련했다
 
독립투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미국에서 흥사단을 운영중이신 조셉신 선생님과
▲ 통일염원 독립투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미국에서 흥사단을 운영중이신 조셉신 선생님과
ⓒ 권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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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캄보디아 평양랭면관에서 북한 종업원을 만난 뒤 세계여행을 할 때마다 한반도기를 가지고 다녔다. 태극기와 인공기가 같이 그려진 깃발이다. 부산에 놀러오겠다던 그이와 혹시나 재회할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피시티를 걸으면서도 옷가지는 버려도 항상 한반도기와 태극기는 배낭에 들어 있었다. 랜드마크나 중요 지점마다 꺼내 사진을 찍었고 한반도기를 궁금해 하는 하이커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설명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날 때였다. 어떤 하이커는 북한을 보고 '미사일맨'이라고 조롱했지만, 대부분 하이커들은 우리의 통일을 기원했다. 한반도기를 펼칠 때마다 가슴이 후련했다.

하이킹 42일째 시에라의 'Silver pass'에서 한반도기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국에서 군생활을 했다는 20대 후반 하이커 로반이 그것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 왔다. 나는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해 설명했다. 또, 강한 미국이 부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상 밖의 답이 돌아 왔다. 

"우리가 군사적으로 강한 것을 알아. 하지만 세계에서 참전 사망자 수도 아주 많은 편이야. 평화가 진짜 필요한 곳은 바로 미국이야."

후련할 줄만 알았던 4300km 완주
  
마지막 관문인 워싱턴주다. 새벽 촉촉한 안개를 걷는 것이 좋았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젖은 나무 향과 차가운 공기는 나를 황홀하게 했다. 캐나다까지 800km, 20여일이면 끝이다. 곧 완주라니,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캐나다 국경 전 마지막 마을 마자마(Mazama, 운행 104일째, 운행거리 4170km)에 도착했다. 그런데 비보가 들렸다. 최종 목적지로 가는 길이 산불로 막혔다는 것이었다. 믿기지가 않았지만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가득 찬 연기가 뉴스 속보를 대신했다. 계획을 바꿔 마자마에서 히치하이크한 후 시애틀로 갔다. 렌터카를 빌려 캐나다로 간 뒤, 남았던 거리만큼 북쪽에서 거꾸로 걸어내려 갔다. 하이킹 106일째 최종 목적지인 매닝파크 모뉴먼트(Manning Park, 운행거리 4268km)에 다다랐다.

"바로 앞이 모뉴먼트야, 고생했어 친구."

먼저 완주한 하이커가 웃으며 말했다. 기쁘고 울컥하는 마음에 모뉴먼트를 향해 질주했다. 길 끝에 도착했다. 허무했다. 성취감도 밀려 왔다. 눈물이 저절로 떨어졌다. 모뉴먼트에서 혼자 3시간을 앉아 있었다.

피시티 하이킹은 힘듦의 대명사 같다. 다만 완주했으니 뭐든 잘 할 거야라는 생각은 좋은 방법은 아니다. 그 또한 그것에 갇혀 있는 거니까. 하이킹을 마친 지 일 년이 다 돼 가는 지금 나는 그것은 그것대로 놓아주었다. 이미 길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 서로 다른 문화와 성격, 육체적 능력 차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화해, 깨달음 말이다. 겸손해졌다고 할까. 어쩌면, 그것이 내가 세계 유랑을 하며 찾던 진짜 희망봉이 아닐까.

태그:#PCT, #피시티, #권현준, #하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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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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