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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그레브 구시가의 성문으로 사용되었던 스톤게이트를 지나 구시가 안으로 들어갔다. 구시가는 그라데츠(Gradec) 언덕 위의 꽤 넓은 평지 위에 일부 성벽과 역사적 건축물들을 안은 채 여행자들을 반기고 있었다. 현재도 이 그라데츠 언덕은 크로아티아 대통령궁, 의회, 박물관, 성당들이 모여 있는 자그레브의 보석과 같은 곳이다.
 
언덕 위에 자리잡은 꽤 넓은 이 평지에서 크로아티아 역사가 시작되었다.
▲ 그라데츠 언덕. 언덕 위에 자리잡은 꽤 넓은 이 평지에서 크로아티아 역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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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데츠 언덕 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언덕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성 마르코 성당(Crkva Sv. Marka, St. Mark Church)이다. 13세기에 처음 건설되고 20세기 초에 재건된 이 성당은 자그레브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체크무늬와 문장이 아름다운 이 성당은 구시가를 밝히고 있다.
▲ 성 마르코 성당. 체크무늬와 문장이 아름다운 이 성당은 구시가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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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성당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성당은 바라보기만 해도 묘한 친근감이 드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당의 지붕은 마치 레고로 장식한 것 같기도 하고, 옛 오락실 게임인 테트리스의 배경 같이 보이기도 한다. 19세기에 성당을 재건할 당시에 지붕에 추가된 이 장식은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규모가 크지 않은 마르코 성당이 다른 성당과 달리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 성당의 남다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성당 지붕이 빨강, 파랑, 흰색의 체크 무늬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당의 지붕은 몇 가지 색만을 배열한 타일 모자이크만으로도 화려함과 세련된 색감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마르코 성당 지붕에는 크로아티아의 유명한 상징이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지붕 위의 바둑판 무늬인 체커보드(Checkerboard)는 크로아티아 국기의 문장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강호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크로아티아 축구 대표팀의 유니폼에도 그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10세기경 베네치아공화국과 전쟁을 하던 크로아티아 왕이 그만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이 크로아티아 왕은 감옥에서 베네치아 총독과 자신의 자유를 걸고 체스 시합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체스 시합에서 크로아티아 왕이 세 판을 연거푸 이겨 석방되자 크로아티아의 문장에 체커보드를 넣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독특한 마르코 성당 지붕의 왼쪽에는 크로아티아를 상징하는 문장(紋章)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자그레브 시를 나타내는 문장이 그려져 있다. 국기와 같은 문장이 성당 지붕에 그려져 있지만 문장 자체가 체크 문양과 어울리기 때문에 전혀 촌스럽지가 않다.

마르코 성당은 그라데츠 언덕의 한 중앙에서 스스로 크로아티아와 자그레브를 상징하는 대표 성당임을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 성당은 이 이색적인 외관과 상징성 때문에 현재는 자그레브의 대표적인 관광 아이콘이 되어 있고 자그레브 대성당 못지 않은 대표적인 명소가 되어 있다.
  
관광객이 많지 않은 아침시간에 나는 마르코 성당 주변을 여유 있게 둘러보았다. 성 마르카(Sv. Marka) 광장의 마르코 성당 좌우로는 대통령궁과 의회 건물이 자리잡고 있어서 이곳이 크로아티아의 중심광장임을 알려준다. 국가를 대표하는 이 광장에는 우리나라 광화문 광장같이 국가적인 행사가 자주 개최된다.
 
작고 소박하지만 크로아티아 정치와 권력의 중심지이다.
▲ 크로아티아 대통령 궁. 작고 소박하지만 크로아티아 정치와 권력의 중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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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카 광장에서는 아침부터 크로아티아 군인들을 추모하는 행사준비가 한창이었다. 행사의 영상과 음향을 준비하는 팀이 광장을 오가며 분주하게 장비를 세팅하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정부 의전팀으로 보이는 공무원들이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군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고위 장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1990년대에 독립을 쟁취한 크로아티아에서 독립전쟁을 이끈 군인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남다른 것 같았다.
 
대통령 궁 앞에서 크로아티아 군인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준비 중이다.
▲ 성 마르카 광장. 대통령 궁 앞에서 크로아티아 군인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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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데츠 언덕이 이어지는 남쪽 끝까지 건축물들을 구경하며 걸어가다가 보니 로트르 슈차크(Lotrščak) 타워가 눈앞에 나타났다. 13세기에 그라데츠 언덕을 둘러싸던 남문의 일부로 건축되었던 이 타워는 중세시대에 자그레브를 방어하던 타워였다. 자그레브의 성벽이기도 했던 이 타워 벽면의 두께는 거의 2m나 될 정도로 두꺼웠다.

타워 몸체의 석재는 울퉁불퉁 하기도 하고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기도 하며, 어느 부분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기도 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타워는 볼수록 투박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이 멋진 타워는 현재도 자그레브 신시가지를 360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어서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정오마다 울리는 타워의 대포 소리는 자그레브를 상징하는 소리이다.
▲ 로트르슈차크 타워. 정오마다 울리는 타워의 대포 소리는 자그레브를 상징하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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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타워에서는 매일 저녁마다 도시로 진입하는 문을 닫기 전에 종(鐘)을 울려서 자그레브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렸었다. 그런데 이 종이 없어지면서 '도둑의 종'이라는 뜻의 '로트르슈차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19세기에 타워가 4층으로 증축된 이후부터는 종 대신에 대포를 설치하고 대포 소리를 발사하고 있다. 매일 정오에는 이 타워의 맨 위층에서 창 밖으로 대포를 쏘아 현재 시간이 정오임을 알리고 있다.

이 대포 소리는 자그레브 시민들에게는 자그레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친근하고 오래된 소리이다. 이 대포 발사는 자그레브의 역사적 전통이 되어 외국의 관광객들이 시간 맞춰 모여드는 관광 명소가 되게 만들어 주었다.
 
언덕 아래의 자그레브 신시가지의 광활함에 놀라게 된다.
▲ 자그레브 전경. 언덕 아래의 자그레브 신시가지의 광활함에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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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워의 전시관을 둘러보다가 로트르 슈차크 타워의 전망대로 올라섰다. 구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이 전망대에서는 가슴이 탁 트이는 시가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고, 왜 자그레브가 크로아티아의 수도가 되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눈 앞에는 지평선이 보일 만큼 넓은 대지 위에 들어선 자그레브의 광활함이 펼쳐졌다. 넓은 대지 위에서 귤색 지붕을 머리에 인 베이지색 건물들이 어울리는 풍경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타워의 남쪽을 내려다보니 일리차(Ilica)거리로 연결되는 푸니쿨라(funicular)가 운행되고 있었다. 일리차 거리 탑승장에서 그라데츠 언덕 탑승장까지의 거리는 보기에도 짧아 보이는데, 운행거리 66m에 표고 차가 30.5m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자그레브의 푸니쿨라는 세계에서 운행거리가 가장 짧은 푸니쿨라로도 유명하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푸니쿨라이지만 역사적 향취가 느껴진다.
▲ 자그레브 푸니쿨라. 세계에서 가장 짧은 푸니쿨라이지만 역사적 향취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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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니쿨라를 타지 않는 사람은 푸니쿨라 바로 옆의 계단을 이용할 수 있지만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푸니쿨라 탑승 시간이 겨우 55초 밖에 되지 않지만 외국에서 온 여행자들은 자그레브 방문 기념으로 즐겁게 이 푸니쿨라를 이용하여 그라데츠 언덕을 오르기 때문이다.

1800년대 후반에 자그레브 시내에 처음 등장한 공공 교통수단인 푸니쿨라는 가격도 저렴하고 운행 간격도 10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그레브 시민들은 이 푸니쿨라를 실생활에서 아직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나는 계단으로 내려갔다가 푸니쿨라를 타고 다시 올라와 보았다.

푸니쿨라는 예상 외로 탑승인원이 꽤 많은 편이어서 내부가 쾌적했다. 유럽의 오랜 역사가 느껴지는 푸니쿨라를 타고 있으니 괜히 로맨틱하다고 느껴진다. 아마도 이 푸니쿨라에서 사랑스러운 연인을 만나는 드라마를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새파란 푸니쿨라가 서서히 언덕 위로 올라가고 내려오는 모습은 참으로 정취가 있다.

푸니쿨라로 다시 올라온 그라데츠 언덕 주변에는 헝가리 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벨레 4세 공원(Park Bele Ⅳ)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적한 이 공원은 울창한 나무로 둘러 싸여 있고, 나무 벤치는 지나가는 길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날씨 속에 시원한 바람에 공원의 나뭇잎들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공기 맑은 공원에서 슬라이딩을 즐기는 청동 소녀상의 인기가 아주 좋다.
▲ 벨레 4세 공원. 공기 맑은 공원에서 슬라이딩을 즐기는 청동 소녀상의 인기가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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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한가운데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여자아이가 슬라이딩을 즐기고 있었다. 실감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이 청동상의 인기가 높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진 청동상의 손과 발이 황금색으로 번들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청동 작품 하나가 공원 전체의 분위기를 활기 있게 살리고 있었다.

그라데츠 언덕에서 자그레브 신시가지로 내려가는 산책로는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다. 숲 속의 나무들이 호위하는 듯한 예쁜 산책로에서는 가슴 속으로 맑은 공기가 들어왔다. 이 산책로를 내려가면 오래된 가게와 정취 있는 트램이 지나는 자그레브의 신시가지가 나타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태그:#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여행, #자그레브, #자그레브여행, #성 마르코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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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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