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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엽 판화가 작품을 설명하는 문정현 신부.
 이윤엽 판화가 작품을 설명하는 문정현 신부.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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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엽이 전시한 이 판화가 맘에 들어. 눈이 부리부리하게 살아 있잖아. 아줌마가 입은 옷은 합판을 덧댄 거야. 이게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이지. 이건 평택 대추리 사람들을 그린 판화야. 갯벌을 메워 땅을 일궜던 사람들인데 미군기지 때문에 다 쫓겨났어. 이 사진은 제주 강정에서 철조망 안에 갇힌 내 모습이야. 순택이가 사진을 찍는지도 몰랐어."

팔순을 앞둔 '길 위의 신부' 문정현(79). 20년 만에 군산으로 돌아온 그가 '평화바람 부는 여인숙'(https://www.peacewindinn.com)이라는 아주 특별한 문화공간을 차렸다. 월명동 동국사 가는 길목의 2층 건물이다. 1층은 전시 공간, 2층은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여인숙. 주변에 적산가옥과 같은 일제 강점기 잔재가 남은 이곳에서 그는 평화 프로젝트 '반미쳐라!'의 첫 전시회 '군산에서 군산으로'를 진행하고 있다.

[전시 공간] "문 신부님은 폭력배다"
 
 20년만에 군산으로 돌아와 '여인숙'을 차린 문정현 신부.
 20년만에 군산으로 돌아와 "여인숙"을 차린 문정현 신부.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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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공간을 둘러봤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문 신부가 안내했다. 여인숙 입구로 들어오면 왼쪽 벽에 송경동 시인의 '벽시' 7편이 붙어 있다. '우리가 지나온 여인숙 3'이란 제목의 시는 "문 신부님은 폭력배다"로 시작한다. 그 시를 읽다가 아래 대목에서 피식 웃음이 났다.

"만나면 반갑다면서 마주잡은/손가락부터 비튼다/껴안고는 귀를 무신다/뱃살을 꼬집고/지팡이로 정강이를 갈기신다/고착되어 맞붙은 견찰들이 가끔 하는 수법과 닮으셨다//아파서 화가 나다가도/얼마나 외로우셨으면 그리웠으면/얼마나 보고 싶어 미워졌으면 저러실까/용서가 된다//다음에 만나면 내가 먼저/신부님을 꼬집고 물어버려야지 싶은데/아직 난 신부님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진 않다는/자책이 슬프다"

길 위에 선 노동자들과 거리낌 없이 지내는 문 신부의 면모를 고스란히 담았다. 이 시가 끝나는 자리에 이윤엽 판화가 작품 수십 점이 걸려 있다. 이마를 겨누는 칼날 끝에 버티고 선 짱짱한 노동자. 민중들의 고단한 삶과 당당한 투쟁의 기운이 전해졌다. 그가 나무판에 새겨 물감으로 찍어낸 건 평화였고, 평화를 위한 싸움이었다.

그 옆에는 문 신부의 제주 강정 싸움을 담은 노순택 작가의 사진이 전시됐고, 최병수 작가가 구럼비에 설치했던 설치작품 '이지스함'도 재현해 놓았다. 작은 방에 들어가면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그린 전진경 작가의 '농성장 드로잉 시리즈'를 볼 수 있다. 그곳에 표현된 농성장 풍경과 노동자들의 소소한 일상을 마주하면 '웃프다'.
 
 노순택 작가가 찍은 자신의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정현 신부.
 노순택 작가가 찍은 자신의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정현 신부.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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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방에는 평화운동단체인 '평화바람' 단원이자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오두희 감독의 영상 기록이 있다. 90년대부터 강정에 이르기까지 문정현 신부와 함께한 여정을 담았다. 그 방에는 문화기획자인 신유아씨의 사진도 전시했다. '평화바람 부는 여인숙'을 함께 꾸민 사람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고, 그 시간을 느낄 수 있다.

방에서 나와 다시 입구의 오른쪽 벽에는 정택용 사진작가의 작품을 걸었다. 그 중 문정현 신부가 희망버스 때 연설하는 장면을 뒤에서 찍은 사진이 인상적이다.

한번 둘러보니 8명의 작가들이 꾸민 작은 공간을 빼곡하게 채운 건 20년 전에 군산을 떠난 문 신부의 평화 여정이었다. 동두천 캠프 케이시, 미 대사관 앞, 매향리 폭격장, 평택 대추리, 용산참사 남일당 망루, 제주 강정마을에 머물면서 울고, 웃고, 걷고, 싸운 '길 위의 신부'. 그가 새롭게 낸 평화의 길이다.

[귀향] "홧김에 왔다"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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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군산으로 돌아오셨나요?"

장맛비가 오락가락했던 지난달 26일 오후, '평화바람 부는 여인숙' 한켠에서 책장을 넘기던 문 신부에게 던진 첫 질문이었다. 문 신부는 "홧김에 왔다"고 말했지만, 그에게 먼저 화를 낸 나무가 있었다. 미군기지가 확장되면서 644세대가 쫓겨날 하제 마을을 지키고 있는 600살 팽나무였다.

"작년 12월 여인숙에서 '안녕 하제' 전시회를 할 때 왔었어. 하제마을 안녕이라는 의미야. 미군기지를 50만평으로 확장하면서 하제 마을 사람들이 쫓겨났어. 안동에 사는 이재각이라는 친구가 그 과정을 사진으로 담았더라고. 이 마을의 팽나무가 전시회의 주제였어. 그런데 이곳에서 오래 산 나는 그 팽나무를 처음 봤어.

다음날 새벽 하제마을에 갔지. 팽나무가 있더라고. 600년 된 보호수야. 혼자 서 있는데, 나무가 호통을 쳤어. '네 동네 놔두고 어디 가서 뭔 짓 하고 다니는 거야?' '날 베어버리면 천벌을 받을 거다.' 그 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나더라고. 그래서 여인숙 공간을 사서 우리들의 평화를 깨는 미국 놈들 욕도 하고, 불평등한 한미 관계에 대해 '말 짓'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1960년에 지은 이 공간은 실제 여인숙을 운영했던 곳이다. 2007년에 문을 닫고 방치된 여인숙을 2010년에 문화공동체 감 이상훈 대표가 리모델링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했고 '여인숙(與隣熟)'이란 간판을 달았다. 여러 이웃이 모여 뜻을 이룬다는 뜻이다. 이상훈 대표는 '안녕하제'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이곳의 문을 닫을 예정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문 신부가 팽나무를 본 뒤, 그와 함께 해 온 '평화바람 '식구들과 함께 이곳에 '평화의 진'을 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억 원의 빚을 내 여인숙을 샀는데, 내가 '일 저질렀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동안 현장에서 만난 친구들이 와서 온몸으로 리모델링을 해줬어."

[군산과의 인연] 영원히 미군기지 출입 금지 당한 '깡패 신부'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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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신부가 군산과 인연을 맺은 건 미국 유학을 마친 뒤 1995년 군산 오룡동 성당에 부임하면서부터다. 그때 군산에서 미군기지 활주로 사용료 문제가 등장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미 공군 기지를 자주 드나들었어. 군종 신부가 영어를 할 줄 몰라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 그런데 97년부터 미 공군 기지 앞에서 싸움을 시작했어. 우리 민항기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나중에는 이스타제트가 하루에 두세 편씩 미군기지 공항 활주로를 이용했는데, 사실 거긴 우리 땅이잖아.

그 땅을 기한도 없이 무상으로 쓰는 미군이 우리에게 활주로 사용료를 받았어. 5년마다 한 번씩 재계약을 했는데, 97년에 무려 5배를 올려달라고 한 거야. 그게 말이 돼? 군산 미공군기지 우리땅 찾기 시민모임을 만들어서 싸우기 시작했지."


문 신부는 차를 몰고 미군기지로 돌진해서 들어간 뒤에 구호를 외치며 플래카드를 휘젓고 시위를 벌였단다. 미군기지 옆에 드럼통을 밟고 올라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욕을 하기도 했다. 미군기지 벽 안쪽으로 오물과 빈 깡통, 쓰레기, 썩은 계란 등 닥치는 대로 던지면서 '양키 고홈'을 외쳤단다.

"진짜 깡패는 그들이야"

싸움을 말리던 경찰이 문 신부를 차로 납치하다시피해서 익산 '작은 자매의 집'에 데려다 놓기도 했다. 격렬한 시위 때문에 미군들은 외출을 못했고, 6km 정도 떨어져 있는 국제문화마을의 술집 주인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문 신부에게 항의하러 올 정도였단다. 심지어 미 공군은 문 신부에게 이런 내용의 공식 문서를 통보했다. '영원히 미군기지의 출입을 금한다. 부대장의 서면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없다.'

"깡패신부? 맞는 말이지. 그들에겐 당연히 내가 깡패로 보였겠지. 그런데 진짜 깡패는 그들이야. 우리 땅을 무상으로 빼앗아 쓰면서 왜 우리에게 돈을 내라는 거야? 그때 알게 된 게 불평등한 소파(SOFA, 주한미군지위협정)야. 인터넷에 '소파'를 쳐서 검색하면 '의자'만 뜨던 때였어."

그해 활주로 이용료 인상안의 일부는 철회됐다. 당시 활주로 이용료 문제로 미 공군과 협상을 했던 우리 군의 대령이 협상을 마친 뒤 문 신부를 찾아와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단다.
 
 .평화바람 부는 여인숙'에는 최병수 작가가 구럼비에 설치했던 설치작품 ‘이지스함’도 재현해 놓았다.
 .평화바람 부는 여인숙"에는 최병수 작가가 구럼비에 설치했던 설치작품 ‘이지스함’도 재현해 놓았다.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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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매향리에서 제주 강정까지

문 신부가 군산을 떠나 외지에서 떠돈 것은 이 싸움의 결과물이었고, 평화를 위한 '반미' 투쟁의 서막이었다. 문 신부는 서울로 올라와서 '불평등한소파개정국민행동'이라는 147개 단체의 연대기구를 만들었다.

"어느 날 회의에 매향리 미 공군 사격장 싸움을 하던 전만규가 나타났어. 그 친구가 몇 날 몇 시에 오토바이를 타고 사격장으로 쳐들어간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라서 그날 버스 2대를 대절해서 매향리로 갔어. 버스를 타고 간 사람들이 으쌰으쌰 하면서 '국제 폭격장 폐쇄하라'고 외치면서 본격적인 싸움을 벌였지."

결국 2001년에 소파는 일부 개정됐다. 하지만 2002년에 미군 장갑차에 두 여중생이 치여 사망하는 사건이 터졌다. 개정된 소파에 따라 미군 측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지만 가해자들은 우리 법정에 서지 않았다. 미국으로 송환됐고, 무죄판결을 받았다. 연일 불평등한 소파를 개정하라는 촛불집회가 광화문을 밝혔다. 그 때에도 문 신부는 지팡이를 든 채 맨 앞에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우리를 만나서 '남북문제는 생존에 관한 것이고 소파는 자립에 대한 것이기에, 이제 촛불을 끄자'고 말했어. 그래서 내가 그 자리에서 '우리가 자립을 하지 못하면 산 건가? 죽은 거지'라고 말하면서 따졌지. 그랬더니 노 전 대통령이 '신부님, 저 소파 개정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나가버렸어."

그 뒤에도 문 신부는 군산을 떠나 싸움의 현장을 돌고 돌았다. 이라크 파병 때에는 '평화유랑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며 평화 메시지를 전파했다. 2004년 12월에는 미군기지 확장으로 쫓겨날 운명에 처한 평택 대추리로 들어갔다. 갯벌에다 움막을 짓고 개간한 땅을 일구던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싸우다가, 2006년 5월 4일에 벌어진 아비규환 행정대집행인 '여명의 황새울 작전' 이후까지도 남아 있었다.
 
 '평화바람 부는 여인숙'의 전시공간을 둘러보는 관람객들.
 "평화바람 부는 여인숙"의 전시공간을 둘러보는 관람객들.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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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3번째 천막미사

그 뒤에 벌어진 용산참사 현장에서 매일 미사를 드리며 희생자 유가족들과 함께했고, 4대강 반대 투쟁과 쌍용차 해고자 복직 투쟁에도 힘을 보탰다. 문 신부는 2011년 7월 6일 해군기지 유치 결정이 내려진 뒤에 갈등이 증폭되던 제주도 강정마을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문 신부의 하루 일과는 대체로 이렇다.

"아침 7시에 해군기지 정문에 가서 백배 절을 하지. 아침을 먹고 오전 11시에는 천막에서 미사를 열어. 12시에는 해군기지 앞 로터리에서 인간 띠 잇기 시위를 벌이고 해군기지 정문까지 행진을 해. 어제가 천막미사 4423번째야. 10년이 넘었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천막미사를 지내고 있어. 평화의 기도이자 강정의 진실을 밝히려는 미사야."

문 신부는 "너무 속상하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어도 해군기지의 진실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지금도 해군들이 마을주민들을 부추겨, 평화 지킴이(활동가)들이 "넌 왜 분신도 안 하고 아직 살아 있냐" "너희들은 나가라"라면서 갖은 욕설을 듣는 상황이라고 한다. 

"지금은 강정마을에 들어온 운동권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 자리에서 나 혼자 서 있는 느낌이야. 하지만 미국의 전초기지를 강정에 세운 해군기지의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누군가는 남아 있어야 해. 누군가는 버텨야 한다고. 한 사람만 남아 있으면 이 싸움은 끝난 게 아냐. 그래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

'깡패 신부'는 20년 만에 군산에 여인숙을 차렸지만 온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20년] 평화 사제의 길
 
 군산 '평화바람 부는 여인숙'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는 문정현 신부.
 군산 "평화바람 부는 여인숙"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는 문정현 신부.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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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오전에 한 패거리가 왔다 갔어. 군산 미군기지 앞에서 함께 싸웠던 노동자들이야. 점심때도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했던 4~5명이 지나는 길에 들렀다면서 짜장면을 시켜 먹고 돈도 자기들이 내더라고."

활짝 웃는 문 신부에게 여인숙을 차린 까닭을 다시 물었다.

"진정한 평화가 무엇일까? 예술을 통해서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치고 싶어. 평화는 정의의 결과야. 올곧고 공평해야 해. 한미 양국 간에 공평해야 하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도 공평해야 해. 정의가 바로 서면 평등한 관계가 이뤄지는 거겠지. 이 공간에서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여는 작업을 했으면 좋겠어."

길 위의 삶을 살아온 문 신부가 지금 여인숙에서 하려고 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의 길은 아니지 않냐'고 되물었다.

"아픈 사람 찾아가고 죽어가는 사람 일으켜주는 일, 소외된 사람과 함께하고 빼앗긴 자, 탄압받는 자,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장애인들의 아픔과 함께 하는 일은 사제 이전에 크리스천의 삶이야.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현장에 남아 있는 삶. 이게 예수님을 닮으려는 노력이지. 그래야만 예수님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나는 것 아닌가. 이게 부활이야. 그날을 향해서 남아 있는 거지. 사는 거지."
 
 7월 말부터 '평화바람 부는 여인숙'에서 진행될 홍성담 화백의 초대전 포스터.
 7월 말부터 "평화바람 부는 여인숙"에서 진행될 홍성담 화백의 초대전 포스터.
ⓒ 여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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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으로 돌아온 그가 평화바람을 몰고 왔다. 이곳에서는 7월 24일부터 홍성담 화가의 초대전이 열리고, 평화영화제도 개최할 예정이다. 평화를 생각하면서 조각칼로 직접 나무판에 새긴 '평화가 무엇이냐'는 그의 서각 작품이 지금도 제주도 강정 미사천막의 벽면에 붙어 있고, 그는 군산과 강정을 오가며 기도하고 있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 복직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두꺼비, 맹꽁이가 개발에 밀려서 멸종되지 않도록 서식처를 만들어주는 것이 평화입니다. 장애인이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이 땅이 농민들이 땅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중략) 기필코 우리는 평화의 세상을 이룰 것입니다."

문정현 신부는 20년 동안 군산을 떠나 떠돈 게 아니었다. 그는 항상 평화의 길 위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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