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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의 서사가 그렇듯 이때 네덜란드를 구하는 영웅이 등장한다. 바로 빌렘 오라네(영어식으로 윌리엄 오렌지) 공이다. 1574년 저항군의 지도자인 그는 레이덴을 포위하고 있는 스페인군에게 타격을 줄 최후의 수단으로 제방의 둑을 무너뜨린다. 삽시간에 물바다 속에서 고립된 스페인군에게 저항군이 게릴라전을 펼치자 스페인군은 당황하면서 후퇴한다.

이를 계기로 전세는 역전돼 결국 스페인 군은 철수하고 네덜란드는 독립의 길을 걸어간다. 공식적인 독립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서지만, 실질적 독립은 스페인 군이 물러간 이때부터다.

수공(水攻)으로 스페인 군대를 물리쳤지만 이는 고육책이어서 레이덴 시에도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전쟁이 끝난 후 독립 영웅이 된 빌렘 오라네 공은 레이덴 시민들에게 '세금을 면제해주랴, 아니면 대학을 세워주랴' 하고 제안한다.

시민 대표들은 '우리는 대학을 원합니다'라고 했다. 돈보다 학문을 택하고 눈앞의 이익보다 미래의 준비를 원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 최고의 대학인 '레이덴 대학'이 태어났다.

네덜란드 튤립의 시작
 
 레이덴 대학교 가는 길
 레이덴 대학교 가는 길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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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운하와 골목길을 걸어서 레이덴 대학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과연 대학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건물들이 소박하다. 주위의 주택들과 비교해 그다지 높지도 않고 대학을 상징하는 건축물도 없다.

유럽의 대학들이 미주의 대학처럼 캠퍼스라는 공간성을 갖지 않는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그동안 흘끗 보아왔던 유럽의 몇몇 대학들에 비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외형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레이덴 대학은 우람한 건축물로 스스로를 드러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서 형성된 소프트웨어(스토리텔링)가 확고하기 때문에 굳이 하드웨어로 승부할 필요가 있을까? 네덜란드 사람들의 실용성이 여기서도 엿보인다. 레이덴 대학은 올해로 개교 444주년을 맞이하지만 캠퍼스에는 별다른 홍보물도 찾을 수 없었다.
 
 레이덴 대학교 입구
 레이덴 대학교 입구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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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방학 중이라 한산했고 몇몇 학생들이 이어폰을 끼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다. 건물 사이로 걸어가다가 유리 건물 앞에서 멈췄다. 자칫하면 지나치기 쉬울 정도로 소박한 유리 건물이다. 이곳이 근대 식물학의 모태가 된 곳이라고 누가 생각할까 싶다.

1593년 레이덴 대학의 식물학자인 카를로스 클루시우스(Carolus Clusius 1526~1609)는 당시 세계에서 무역 규모가 가장 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에 전세계 식물들의 표본을 채집해달라고 부탁했다. VOC의 도움을 받아 클로시우스는 식물표본실을 대학 구내에 만들고 여기에 아프리카, 아시아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가져 온 1000여 종의 식물을 심었다.

네덜란드의 상징이 되는 튤립도 레이덴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 텐산(天山)산맥이 원산지인 튤립은 오스만 투르크를 거쳐 유럽에 소개됐다. 1593년 레이덴 대학교는 플랑드르의 식물학자 샤를 드 레클루체(Charles de l'Écluse)를 초빙했다. 튤립 구근을 가지고 온 레클루체는 실험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네덜란드 기후에 맞게 개량했다.

17세기 중반에는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유리건물 온실을 세계 최초로 만들었고, 식물표본실 건물이 크게 확장됐다. 백년에 걸쳐 꾸준히 식물표본을 수집한 레이덴 대학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식물원이자 표본실을 운영하는 곳이 되었다. 말하자면 레이덴 대학교는 17~18세기 200년 동안 근대 계몽주의 학문의 산실이자 박물학의 시초였던 것이다.
 
 클로시우스 흉상
 클로시우스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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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학문에서 분류학은 계보학과 더불어 근대적 합리성의 토대를 이룬다. 서구의 근대를 연 계몽주의 학문이란 대상을 분류하고 역사성을 체계화시키면서 양자를 구조화한 것이다.

자연과학이 관찰과 실험이라는 귀납에 의존한다면, 인문학의 근저인 인식론은 추리와 논리라는 연역에 기댄다. 연역의 질료가 바로 분류이다. 분류가 되지 않은 인식은 그저 흙덩이 속의 광물질에 불과하다. 이를 정제하고 제련해 순금속으로 추출하여 개념화하는 것이 학문이라는 과정이다. 그러니 분류라는 사고의 과정은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포유류'를 만든 사람
 

분류학하면 우리는 린네를 떠올린다. 고등학교 생물책에서 우리는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한다. 세상의 동식물을 분류하고 이름을 붙인 사람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 린네 이전에는 이름이 없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우리가 '소'라고 이름을 붙인 가축을 영국인은 [cow], 일본 인은 [うし], 프랑스인은 [bœf], 아랍인은 [بقرة]라고 부른다. 이런 가운데 (당시 유럽에서) 누구나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라틴어로 학명을 붙인 이가 바로 린네다. 즉, 분류란 구별이 아닌 명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언어철학적 개념이 잠재돼 있던 것이다. 현대철학의 큰 줄기인 구조주의는 어쩌면 린네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언어에 의한 이름 붙이기는 계통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린네의 분류는 엄밀히 따지면 계통학이라고 해야 한다. 분류는 형태에 따른 구분이라는 성격이 강하지만, 계통은 형태 이전의 관계와 기능을 따진다. 즉 비슷한 형태일지라도 기능이 다르면 계통은 달라지고, 다른 형태일지라도 관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 같은 계통이라고 보는 것이다.
  
 식물원 안내판. 오른쪽 구석에 온실이 보인다
 식물원 안내판. 오른쪽 구석에 온실이 보인다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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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네(Carl Von Linne, 1707~1778)는 유럽의 변방인 스웨덴에서 레이덴 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그이 나이 20살이었다. 린네는 식물원에 살다시피 하면서 각종 식물의 형태와 특징을 분류했다. 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매 어찌 마구잡이로 했겠는가. 거기에는 분명 어떤 질서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동식물의 체계를 연구했다. 열대와 아열대 그리고 온대(특히 일본)의 다종다양한 식물을 수집한 레이덴 대학의 식물표본이 없었더라면 린네의 분류학은 훨씬 엉성했을 것이다.

그는 평생 식물·동물·광물의 체계를 연구하여 학명(계·문·강·목·과·속·종)을 만들고 이 학명에 따라서 식물 8000종, 동물 4400종의 체계를 유기적으로 분류했다. 오늘날 우리의 인식체계 속에서 포유류니 양치류니 하면서 자연스럽게 범주화되는 인식작용은 바로 린네의 작업 덕분이다.

학문적 호기심에 사로잡힌 젊은 린네가 식물원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잎과 줄기를 그리고 꽃잎을 세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바로 여행의 즐거움이다. 린네와 나는 시공간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적은 확률로 연결된 인연이다. 금강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항하의 모래알만큼 항하가 있는 우주에서 그 어떤 인연의 끈이 풀려 그와 나는 만난 것이다.

30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를 두고 동양의 어느 무명인은 서양의 어느 식물학자의 젊은 시절을 상상하고 그의 작업을 심상으로 그려본다. 그와 내가 서로 만날 것을 가늠이나 했겠는가.

인류, 역사, 그리고 지구라는 공간. 그 씨줄과 날줄의 교직에서 린네와 나는 만났다. 나는 그의 업적을 떠올리며 그를 상상하고, 그는 먼 미래 어느 동양인의 머릿속에서 존재의 스파크를 일으켰다. 이 무슨 억겁의 인연인가. 여행은 이렇듯 나를 상상의 공간으로 안내해 굳은 머리를 깨뜨리는 망치인 것이다.

갈릴레오부터 데카르트까지
 
 레이덴 대학교
 레이덴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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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덴 대학하면 떠오르는 두 명의 인물이 더 있다. 바로 갈릴레이와 데카르트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한 이유로 종교재판에 회부돼 교황청으로부터 자택에 연금된다. 그는 연금 중에도 역학원리와 실험결과를 정리하고 자신의 이론을 집대성한 <두개의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의와 수학적 논증>을 집필한다. 자신의 모든 서적이 금서가 된 이탈리아에서 출간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갈릴레이는 프랑스, 독일, 폴란드 등에 출간을 문의하나 모두 거절당한다.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결국 레이덴 대학교에서 출간(1634)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프랑스 사람이지만 완고한 가톨릭이 지배하는 고향을 떠나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는 네덜란드로 이주한다. 네덜란드에서 이곳저곳을 떠돌았지만 그중에서도 레이덴 대학에 적을 둘 때에 그 유명한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을 첫 출간한다. 몇 년 후인 1656년 암스테르담에서 라틴어로 재출간한다.

이렇듯 레이덴 대학교는 인류 지성사에서 큰 획을 그은 대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네덜란드가 우리 사회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벌자본'의 측면에서도 선호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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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