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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종승묘(普陀宗乘之庙)

걷기에는 다소 멀다며 가이드 샤오까오(小高)가 친구에게 연락하여 그의 승용차를 타고 우리는 보타종승묘로 이동했다. 보타종승묘(普陀宗乘之庙)는 청건륭32년(1767년) 3월에 시작하여 4년 후인 1771년 8월에 완공했다.

사원의 면적은 22만 평방미터로 외팔묘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하지만 티베트 라싸에 있는 진짜 포탈라궁의 3분의1 밖에 안 되는 규모라 소포탈라궁이라고도 부른다. 불교 4대산의 하나인 보타산(普陀山)을 뜻하는 티베트어 포탈라를 한어로 보타종승(普陀宗乘)이라 한다.

처음 보타종승묘를 세우려고 한 것은 1770년이 건륭제가 60세 되는 해이고, 1771년은 어머니 황태후 뉴꾸루스(钮钴禄氏)가 80세 되기에 그것을 기념하여 판첸라마를 이곳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 계획이었다. 당시에 청해(青海), 서장(西藏), 몽고(蒙古), 신강(新疆)의 왕이나 귀족들은 축수(祝寿)를 하러 자주 청더에 갔다.

특히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60세를 맞아 푸런스(溥仁寺)를 지어 그곳에서 연회를 열었던 것을 모방했다 할 수 있다. 이것은 또 한편으로는 서북의 소수민족들 동정을 파악하는 동시에 유화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판첸라마는 끝내 오지 않았다.

샤오까오의 말에 의하면 길이 멀어서, '황제가 부르면 내가 가야 되나'라는 자존심, 아이가 어려서 학습에 문제가 있다는 등의 3가지 이유를 들어 초대를 거절했다. 이에 기분이 상한 건륭제는 그래서인지 이후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아 마무리가 대충 되었다고 한다.

사원은 22만 평방미터에 크고 작은 건축물이 60여 개에 달하기에, 효율적인 관람 동선은 입구에서부터 일직선으로 비정(碑亭), 오탑문(五塔门), 유리패방(琉璃牌坊), 백탑군(白台群), 따홍타이(大红台), 만법귀(万法归), 자항보도(慈航普渡), 권형삼계(权衡三界), 금정(金顶)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 나오면 된다.

산문(山门)의 가운데 위쪽 편액에는 건륭제가 친히 지은 "普陀宗乘之庙"가 만(满), 한(汉), 몽(蒙), 장(藏) 네 개의 언어로 적혀 있다.

비정(碑亭)

산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누런 유리 기와가 빛을 발하는 전형적인 중국풍의 정방형 건물이 비정이다. 네 면에는 모두 아치형 문이 있고, 안에는 세 개의 거대한 비석이 서있다.

사원 건립 의도를 기술한 '보타종승지묘비기(普陀宗乘之庙碑记)'와 몽고의 4대부족 중 하나인 투얼후터부(土尔扈特部)를 정복한 내용을 기술한 '토이호특전부귀순기(土尔扈特全部归顺记)', '우휼토이호특부중기(优恤土尔扈特部众记)' 비석이다.

문장은 건륭제가 직접 지었다. 특이한 것은 이 네 개의 비석에 정면은 만주어, 뒷면은 한어, 동쪽면은 몽골어, 서쪽면은 티베트어로 각각 새겼다는 점이다. 이 또한 청조가 소수민족을 통합하면서도 각 민족의 특성을 살리면서 하나의 국가로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청조의 정책은 "인기교(因其教), 불역기속(不易其俗), 이습속위치(以习俗为治)"(그 가르침에 따르고, 그 풍속은 변하지 않으며, 이 습관과 풍속으로 다스린다)로 표현되어 소수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인정하며 그들을 포용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오탑문(五塔门)
 
세 개의 아치형 문이 있는 티베트식 흰 건물 위에 다섯 개의 탑이 세워져 있어 오탑문이라 한다.
▲ 오탑문 세 개의 아치형 문이 있는 티베트식 흰 건물 위에 다섯 개의 탑이 세워져 있어 오탑문이라 한다.
ⓒ 민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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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아치형 문이 있는 티베트식 흰 건물 위에 다섯 개의 탑이 세워져 있어 오탑문이라 한다. 흰색의 건물 벽에는 삼층 형식으로 창문이 있지만 실제 창이 아닌 형식적이다.

탑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흑, 백, 황, 녹, 홍색이다. 이는 티베트불교의 다섯 종파인 황(겔루파格鲁派), 홍(닝마파宁玛派), 백(카규파噶举派), 녹(샤카파萨迦派), 흑(본포파萨迦派)를 상징한다. 또한 탑신에는 다른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데 그 또한 의미하는 바가 있다.

홍탑은 연꽃으로 무량광불(无量光佛), 녹탑은 보검으로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 Amoghasiddhi, 수행을 통해 깨달음과 열반을 이룬 부처), 황탑은 보배로 보원불(宝源佛), 백탑은 법륜(法轮)으로 대일여래(大日如来, Mahavairocana, 절대진리), 흑탑은 금강저(金刚杵)로 부동금강불(不动金刚佛, Acalavajra)을 상징한다. 또한 예불의 최고인 오체투지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라고도 한다.

유리패방(琉璃牌坊)
 
건축양식은 건륭시기에 성행한 “삼간사주칠루(三?四柱七?)”로 화려한 유리패방.옛날에는 황제나 최상위 고관, 라마승을 제외한 중생들은 이 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 유리패방 건축양식은 건륭시기에 성행한 “삼간사주칠루(三?四柱七?)”로 화려한 유리패방.옛날에는 황제나 최상위 고관, 라마승을 제외한 중생들은 이 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 민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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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양식은 건륭시기에 성행한 "삼간사주칠루(三间四柱七楼)"로 화려한 유리패방의 전면 편액은 건륭제 어필인 "보문응현(普门应现)"이 새겨져 있다. 관음보살이 중생들에게 나타나는 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옛날에는 황제나 최상위 고관, 라마승을 제외한 중생들은 이 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양쪽에 동서방면으로 네 개의 하마비가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는 사원에 들어갈 수 있는 등급과 예절을 정해두었다. 왕 이하 일등대길(头等台吉) 이상과 라마승은 들어갈 수 있으며, 나머지 관리들은 유리패방에서 예불을 올려야 했다.

또한 문 양쪽으로는 사자석상이 있다. 이 사자상은 황궁이나 황족의 저택 앞에만 놓아둔 것으로 권력, 지위, 부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곳은 황제의 사원이라는 표시이며 곧 당시 불교의 지위를 가늠할 수 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지금은 누구나 들어갈 수가 있다. 길옆에 벼락 맞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무 표면에는 구불구불한 흔적이 보이는데 이를 용이 승천하는 형상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군데군데 붉은 표지판이 걸려 있는 나무는 모두 수령 300년 이상 된 것이다.

따홍타이(大红台)

저 아래 산문에서 바라볼 때 아득했던 따홍타이(大红台) 아래에 도착했다. 다시 하늘을 쳐다보니 까마득하다. 아래 흰 부분이 18미터, 위 붉은 부분이 25미터로 총 43미터 높이다. 모두 7층 구조로 아래 부분인 1층부터 4층은 자연벽면을 이용해 화강암을 길게 쌓아 올려 실내공간이 없고, 위쪽인 5층부터 7층은 벽돌을 쌓아 창문이 있는 공간구조로 만들었다.

홍타이에 내부에 있는 여장(女墻 : 건축물의 외벽이 지붕을 넘어선 부분)의 닫집에는 총 80개의 무량수불(无量寿佛)이 있다. 이는 건륭제 어머니 황태후의 80세를 상징하고, 홍타이 남쪽 정중앙 위에서 아래로 6개의 유리닫집에 있는 6개의 무량수불은 건륭제 자신의 60세를 상징하여 만들었다.
 
긴 줄에 경전을 적은 홍, 황, 흑, 백, 녹색의 깃발이 줄줄이 달려 바람에 날려 불경을 전한다는 타르초.
▲ 따홍타이 긴 줄에 경전을 적은 홍, 황, 흑, 백, 녹색의 깃발이 줄줄이 달려 바람에 날려 불경을 전한다는 타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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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과 붉은색으로 구분되는 지점에 올랐다.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신세기가 시작되기 전인 1990년대 후반 해발 3600미터의 티베트 라싸를 갔었다. 그때 고소증상에 의한 두통과 비틀거리는 다리를 힘겹게 들어 올리며 기어오르다시피 100미터가 넘는 포탈라궁에 올랐다. 비록 규모가 3분의1이라지만 당시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한없이 올려다보면서 차마 선뜻 발길이 떼어지지 않는다.

긴 줄에 경전을 적은 홍, 황, 흑, 백, 녹색의 깃발이 줄줄이 달려 바람에 날려 불경을 전한다는 타르초를 한참이나 보고, 다시 불교경전을 넣고 바깥에 만트라를 새긴 원통 마니차도 천천히 돌리며 최대한 시간을 늦춰본다. 막 계단에 발을 올리는 데 샤오까오가 한쪽 벽면을 가리킨다. 일본이 침략했을 때 저지른 만행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이 벽에 적은 낙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만법귀일전(万法归一殿)
 
둥근 동판에다 금 15,000냥으로 도금하여 덮었는데 금칠이 벗겨진 곳은 일본인들이 긁어간 흔적이라고 한다.
▲ 만법귀일전(万法?一殿) 지붕 둥근 동판에다 금 15,000냥으로 도금하여 덮었는데 금칠이 벗겨진 곳은 일본인들이 긁어간 흔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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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홍타이의 내부 중앙에 있는 전각으로 집회나 축제 등의 장소로 활용하는 곳이다. 매년 7월 11일에는 불교학위 시험이 치러지고, 음력 섣달 27일에 열리는 송년행사와 정월 14일에 모든 라마승이 모여 경전을 읽는 것은 악귀를 쫒고 평안을 강구하는 중요한 행사이다. 만법귀일전의 지붕은 둥근 동판에다 금 15,000냥으로 도금하여 덮었는데 금칠이 벗겨진 곳은 일본인들이 긁어간 흔적이라고 한다.

수미복수지묘(须弥福寿之庙)

보타종승묘가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가 있는 포탈라궁이라고 한다면, 수미복수묘는 또 하나의 종교지도자 판첸라마가 거주하는 시가체(日喀则)의 타쉬룬포사원(札什伦布寺)이라 보면 된다. 타쉬룬포의 음역이기도 하지만 수미는 불교 우주관에서 말하는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을 뜻하고, 복수는 축복과 장수의 의미를 담았다.

판첸라마6세(班禪6세)는 1780년 청건륭제 만수절에 맞춰 시가체에서 청더까지 2만여 리를 13개월 걸려 찾아와 만법종원전(万法宗源殿)에 거처하며 설법과 외국 사신들을 접견했다. 따라서 수미복수묘를 반선행궁이라고도 하며 전체면적은 36,700평방미터에 달한다.

사원의 기본구조는 보타종승묘와 비슷하다. 관람 동선은 입구에서 비정, 유리패방, 따홍타이, 묘고장엄전(妙高莊嚴殿), 금정(金顶), 길상법희(吉祥法喜), 금하당(金贺堂), 만법종원전(万法宗源殿), 만수탑(万寿塔)까지 갔다가 돌아 나오면 된다.

건륭제는 판첸라마를 맞이하기 위해 티베트 역사와 간단한 티베트어를 배울 정도로 신경을 썼다. 라마교가 티베트와 몽고를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판첸라마만 잡으면 북방민족에 대한 정치적 안정을 꾀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판첸이 도착하자 건륭제는 친히 자리로 안내하고 설법을 요청했다. 그러자 판첸은 설법에 앞서 가져온 40여 가지 선물을 건륭제에게 건넸다.
 
수미복수지묘는 판첸라마 6세가 머물렀던 곳으로 조선이 사신들도 황제의 명에 의해 이곳에서 판첸을 만났다.
▲ 묘고장엄전(妙高莊嚴殿)의 화려한 황금지붕 수미복수지묘는 판첸라마 6세가 머물렀던 곳으로 조선이 사신들도 황제의 명에 의해 이곳에서 판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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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고장엄전 지붕 위에는 여덟 마리 용과 역시 황금 1만1천5백냥을 사용하여 금박기와로 장식했다. 묘고장엄전 안으로 내려와 좌측에 있는 북을 보여주고는 샤오까오가 나를 반대편으로 데려가면서 "저 북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아세요?"라고 묻는다. 글쎄 "소가죽, 말가죽?"이라고 하니, 귓속말로 "人皮"라고 한다. 그러면서 찻잔은 사람의 해골이라며 소신공양 하듯이 사람의 육신을 바친 것인데 판첸라마가 가져왔다고 한다.

다시 연암의 열하일기를 펼쳐보자. 건륭제가 조선사신들에게 판첸라마를 만나라는 전갈을 보내자,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황제의 명이라 어쩔 수 없이 조선 사신들은 판첸라마를 만나러 가서는 모두 중에게 머리를 숙이기 싫어서 억지로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판첸라마가 말을 하면 라마승-몽골왕-군기대신-청나라역관-조선역관 순으로 5중 통역을 해야 했다.

또한 판첸에게서 선물로 받은 불상이 처치 곤란이었다. 결국에는 불상을 저자거리로 들고 나가 90냥에 팔아서는 그 돈도 하인들에게 나눠줘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어처구니가 없다고 느껴지지만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한 유교 사상이 얼마나 강고하고 경직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덧붙이는 글 | 제 개인블로그 '길 위에서는 구도자가 돤다'에도 실립니다.


태그:#신열하일기, #판첸라마, #보타종승묘, #수미복수묘, #외팔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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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지리산 자락 경남 산청, 대한민국 힐링1번지 동의보감촌 특리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여전히 어슬픈 농부입니다. 자연과 건강 그 속에서 역사와 문화 인문정신을 배우고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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