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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4일 강원도 고성에서 산불이 났다.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택 565채가 불에 탔고, 1132명이 졸지에 이재민이 됐다. 7월 13일은 산불이 일어나고 꼭 100일째 되는 날. 숫자에 드러나지 않는 천진초등학교 대피소 사람들 이야기를 담아봤다.[편집자말]
 
김씨 할머니가 앉아 있던 천진초 대피소 앞 철제 의자.
 김씨 할머니가 앉아 있던 천진초 대피소 앞 철제 의자.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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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 저녁 천진초 대피소. 식사를 마친 이재민들은 여느 때처럼 텔레비전 앞에 모여 두런두런 저마다 쌓인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대피소 맨 앞 줄 오른쪽 두 번째 텐트 지퍼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 안에서 할머니가 밖으로 나온 것은 일일 드라마가 시작되는 오후 8시가 지나서였다. 지팡이를 짚고서야 허리를 쭉 편 할머니가 고개를 몇 번 두리번거리더니 어리둥절해 했다.

"응? 벌써 저녁이 지났다고? 아이고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그래. 응? 소리를 질렀어? 나는 밥 먹으란 소리 못 들었는데..."

저녁 먹으란 소리를 못 들었다는 할머니의 말에 주변 이재민들이 한 마디씩 했다. "맨 앞 텐트인데 안 들렸다고?",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데, 쯧쯧 어쩌면 좋아 그래", "저 할머니 가는 귀가 먹었더라고", "서울서 '회장님'이었다더만 별 수 없구만."

그날 저녁 '회장님'은 결국 홀로 컵라면과 주변에서 구해다 준 김치로 늦은 식사를 해야 했다.

회장님의 바다
  
고성의 바다.
 고성의 바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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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소엔 이 지역 토박이 외에도 은퇴 후 도시에서 귀농한 외지인들도 있었다. 다른 이재민들이 "회장님"이라고 부르던 김씨 할머니(81)도 서울에서 큰 사업을 했다고 했다. "어쩐지 80이 넘었는데 아주 그냥 얼굴이 곱더만. 우리들보다 훨씬 젊어 보이잖아." 동년배의 고성 할머니들이 김씨 할머니 얘기를 듣고 수군댔다. 무슨 사업을 했었냐고 몇 번씩 물어봤지만 그때마다 김 할머니는 "이것 저것 했었다"고 웃어 넘기기만 했다. 김 할머니는 서울 강남의 신사동에서 살다가 10년 전 고성에 왔다고 했다. 혼자인 김 할머니는 텐트 밖으로 잘 나오지 않은 채 조용히 뜨개질을 하거나 교회에 가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할머니가 라면 국물까지 깨끗이 비웠을 때쯤, 그에게 다가갔다. 김씨 할머니는 자신을 '산 송장'이라고 했다.

"나는 약을 많이 먹어야 돼서 밥을 안 먹을 수가 없어. 아유, 내가 걸어 다니는 종합 병원이우. 전신마취만 몇 번 했는지 몰라. 두 다리부터 내 다리가 아니니까. 인공 관절 수술을 해서 그나마 지금은 이렇게 걸을 수가 있지. 쓸개에는 오센치 넘는 돌멩이가 생겼대서 여기 쓸개를 째고 담석을 없애는 수술을 두 번씩이나 했어. 그 다음에 피 순환이 안 돼서 심장 수술도 받았지. 혈압 주사도 계속 맞아야 되고."

그래도 몸이 아픈 게 더 낫더라는 할머니는 3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부터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했다.

"우리 아저씨가 진짜 착하고 나한테 잘했는데 먼저 하늘나라로 갔어. 우울증이 왔지. 우울증 걸리면 죽고만 싶지 딴 생각은 하나도 안 들어.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부터 저 바닷가에 나가서 빠져 죽은들 누가 알아나 줄까 싶었지. 밥도 안 먹혀서 굶을 때가 많았고. 나는 내 수의 옷까지 다 해놨었어. 이번에 불에 다 탔지만."

다소 멍했던 할머니의 눈빛이 말을 할수록 되살아났다.

하나님
  
고성군 봉포리에 있는 김(81, 여)씨 할머니의 집터가 철거되고 있다.
 고성군 봉포리에 있는 김(81, 여)씨 할머니의 집터가 철거되고 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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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만 생각하던 할머니를 건져낸 건 뒤늦게 갖게 된 종교였다. 원래 신앙이 없었던 할머니는 지인의 권유로 3년 전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모든 걸 내려놓으라는 말 한 마디가 할머니에게 큰 위로가 됐다고 했다. 할머니는 처음으로 솟구치는 자신의 신앙심을 강하게 붙들었다. 딴 생각을 안 하려고 몸도 바쁘게 움직였다. 시니어 클럽이라고 노인들에게 일할 거리를 주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거리 청소도 하고 봉사 활동도 했다. "올해 초에 진단을 받아봤는데 우울증이 무지 좋아졌다고 하더라고." 할머니가 덤덤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회장님이라고 그러지만 서울서 내려오기 전에 40년 사업한 거 다 망해서 여기 왔어. 예전에 별장용으로 지어놨던 집이 여기 있었거든. 아들도 사람 잘못 만나서 사기 당하고 우리 빌딩도 다 날렸었지. 그 성격 좋던 우리 아저씨도 화병에 걸릴 정도였으니까. 천상 돈벌이는 못해도 정말 착한 남자였는데. 사업 수완은 내가 좋았지, 우리 아저씨는 날 못 따라왔어, 흐흐. 우리 아저씨 보고 싶구만. 엊그제는 하도 골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 왔는데 혈압이 너무 높아졌다 그러더라고. 애들이 4남매인데 애들한텐 나 아프다고 말 안 해. 다들 멀리서 사는데 혼자 있는 엄마가 아프다면 또 얼마나 놀라겠어. 그냥 혼자 택시 타고 왔다 갔다 하면 되지 뭐."

할머니는 그나마 마지막 남아 있던 재산마저 이번에 신이 다 가져갔다고 했다.

"다 이유가 있겠지. 다 내려놓으라 하셨으니까."

불이 나던 급박한 순간에도 할머니는 텐트에서 저녁 식사를 놓친 그날처럼 혼자 집 안에만 있다가 바깥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스르르 잠들어 있던 할머니를 동네 집사님이 문을 두드려 급하게 깨웠다. 할머니는 다음날 시니어클럽에 입고 가려고 챙겨놓은 옷가지만 급히 챙겨선 잠옷바람으로 집을 나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하나님이 다 가져갔는데 나는 아직 안 데려가네."

할머니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불이 났던 날을 회상했다.

홈 드레스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그날 3시간이 넘도록 내게 옛날 얘기를 했다. 할머니는 젊을 때 다니던 옛 명동 중앙극장 뒤편 수영장의 깨끗한 물이 그립다고 했고 그 주변 맛있는 음식점과 남편과 함께 다녔던 세계 여행, 형형색색 맞춰 입었던 자신의 홈 드레스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할머니는 지나고 보면 인생은 부질 없는 거였다고 했고 그러니 크게 걱정할 것도 없는 거였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저 모두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마음 편히 대화한 게 너무 오랜만이라고 했다.

"우울증 걸린 사람은 이렇게 대화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져. 혼자 드러누워 있기만 하면 나쁜 마음만 들더라고. 나는 원체 이렇게 나와서 같이 드라마 보거나 수다 떠는 성격이 못 돼 놔서. 나도 집에 불이 난 건 처음이지만 힘들긴 뭘. 그때 그때는 죽으라고 힘들지만 지나고 보면 다 별거 아니야. 그게 인생이지. 고맙네. 이렇게 말 들어줘서."

태그:#고성, #산불, #천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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