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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소설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이다. 이 4음절 11글자를 쓰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고 저자 김훈은 산문집 <바다의 기별>에서 밝힌 바 있다.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를 두고 작가는 오래도록 고민했다고 말한다. <칼을 노래>를 읽으면서 나도 이 첫 문장을 오래 생각했다. 왜 '꽃은 피었다'라고 쓰지 않았을까, 하고.

이처럼 김훈의 글은 한 문장 한 문장 어감의 차이를 생각하며 여러 번 곱씹어 읽어야 한다. 그래야 작가의 의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김훈의 글을 좋아한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은 최인훈이 소설을 시처럼 쓴다고 감탄하면서 최인훈과 정반대에 있는 김훈에 대해 이야기한다.

최인훈의 유려한 문장을 읽다 지극히 사실적인 글쓰기를 추구하는 김훈의 문장을 읽으면 마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지하 20층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연필로 쓰기> 표지 <연필로 쓰기> 표지
▲ <연필로 쓰기> 표지 <연필로 쓰기>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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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신작 산문집 <연필로 쓰기>는 그의 저작이 늘 그렇듯이 사실적인 글쓰기의 표본이다. 충실한 현장취재를 기본으로 지극히 단편적인 일상에서 짚어내는 삶에 대한 통찰은 그의 글을 허투루 읽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다.

제목처럼 김훈은 지금도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쓴다고 한다. 수백 수천 장의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연필로 꾹꾹 눌러 가며 <칼의 노래>를 비롯한 수많은 소설과 산문들을 썼다는 것이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 밤에는 글을 쓰지 말자. 밤에는 밤을 맞자. - <연필로 쓰기> 중

이것이 연필로 글을 쓰는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자세다. 글과 삶이 별개가 아니라 삶 속의 글이고자 하는,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자세! 저자는 구석기 시대의 주먹도끼와 같은 연장이 몸과 외계를 이어줌으로써 인간을 둘러싼 현실을 개조하고 미래를 맞이하는 동력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저자에게 연필은 현실을 개조하고 미래를 맞이하는 힘이다. 아마도 김훈의 정신은 연필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이다.

위험수당이 100원이라고?!

우리나라만큼 음식배달 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또 있을까? 예전엔 자장면, 짬뽕과 같은 중국 음식이 배달음식의 주종이었다면 요즘은 종목을 가리지 않는 분위기다. 통닭, 햄버거, 피자, 떡볶이는 물론 배달 안 되는 음식이 있을까 싶을 만큼 배달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국내 배달산업의 시장 규모가 3조원을 넘었다고 하니 뭐.

저자는 어느날 우연히 오토바이 라이더가 뒤 차에 부딪쳐서 쓰러진 사고를 목격한 후 배달 라이더에 관한 취재를 한다. 길바닥에 흩어진 음식들을 바라보는 배달 라이더의 눈빛을 보며 먹고 사는 일의 무서움에 치를 떨었고, 삶 앞에서 까불지 말고 경건해져야 한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눈 오고 비 오고 덥거나 추운 날에 비탈길을 오르내리기 싫으면 배달음식을 주문하는데, 라이더들은 그 눈 쌓인 비탈길을 달려 올라가서 밥을 가져다준다. 밥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눈 쌓여서 미끄러운 비탈길, 비지땀을 흘려야 하는 꼬부랑오르막길을 대신 오르내려주고 눈비를 대신 맞아준다. 이래서 밥이 무섭다는 것이다.' - 본문 165쪽

저자의 취재에 따르면 배달 라이더에는 직고용 라이더와 배달대행 라이더가 있는데 프랜차이즈 업체에 고용된 직고용 라이더일 경우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시간당 최저임금에 배달 1건당 400원을 더 받는다. 눈비가 올 때면 위험수당이 추가되는데 그 금액이 100원이란다. 그나마 폭염은 제외라고 한다.

배달대행 라이더들은 고용 계약이 없는 개인사업자들로 고정급, 시간급 없이 1건당 3천 원 정도를 받는데 기름값, 수리비, 사고처리비, 안전장구 값 등을 모두 본인이 부담해야 하며, 하루 열 시간 이상 뛰어야 한 달에 250~300만 원 정도를 벌 수 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니 과속, 역주행, 신호 위반, 인도 주행, 끼어들기를 거듭하며 도심의 거리를 헤집고 다닌다는 것이다.

가난했던 시절에 한국 사람들은 나라가 잘살게 되고 국민소득이 늘어나면 빈곤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으로 믿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소득이 늘어나자 빈곤은 구조화되었고 구조적 빈곤은 토착되고 세습되어간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가난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다. 빈곤은 그 결핍을 포함한 소외, 차별, 박탈, 멸시로 이 구조는 이제 일상화되어서 아무도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수많은 소비자와 배달노동자들과 프랜차이즈업계를 로그인 시켜놓고 핸드폰의 작동으로 수요와 공급을 연결시키는 노동형태가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는 가운데, 노동은 대규모로 소외되어가고, 노동은 오직 노동자의 책임으로 돌아간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고작 100원을 더 주면서 위험한 일을 시켜도 되는 것인지, 그것이 여전히 의문이라고 말한다.

배달의 나라 한국에서 배달은 일상으로 자리잡았지만, 국회나 행정부에서 라이더와 배달업의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고 도와준 적은 없다고 한다. 배달을 시켜놓고 빨리 와 달라는 말은 하지만 그들의 안전에 대해 걱정해준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다음에 배달주문을 할 때는 꼭 '늦어도 괜찮으니 안전하게 와 달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야겠다.

할매는 몸으로 시를 쓴다?!
 
눈이 사뿐사뿐 오네
시아버지 시어머니 어려와서
사뿐사뿐 걸어오네
김점순(곡성) (본문 276쪽)

80살에 가까워 한글을 깨친 할매들의 글을 모은 시집, 일기들이 책으로 출판되고 있는데, 할매들의 글을 읽어보면 마치 어린 아이의 글처럼 순수하다. 할매들의 글에는 문자가 인간에게 주는 환상이 없고, 관념이나 추상이 들어 있지 않다고 저자는 설명하는데, 아마도 할매들의 글이 순수한 까닭이 그 때문인 듯하다.

기록된 역사가 없는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하는데, 이 문맹 노인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 현대사 속에서 전쟁, 이산, 이농, 기아, 가난, 억압의 시대고를 개인의 삶으로 치러냈다. 한 시대 전체의 무늬가 나이테처럼 몸에 쟁여져 있고 옹이로 박혀 있지만, 그들의 생애는 당대사에 편입되지 못하고 선사의 지층 밑바닥에 매몰되어 있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는 한글을 모르는 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이 정부가 시행한 노인정책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이라고 평가한다. 이 사업은 노인을 보호나 관리, 수용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노인을 세상 안으로 끌어들여서 그들의 말을 사회적으로 통용시켜 주었고, 이를 통해 세종어제 훈민정음 '나랏말ㅆㆍ미'에 나타난 임금의 간절한 소망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없이 사느라고 남의 신세만 지고 좋은 일 한번 못 해보고 그게 한이 돼서 내가 조금이나마 보냈다.(....) 아이 옷 벗어 논 걸 껴안고 아이 엄마가 그렇게 우니 사는 게 숨이 붙었으니 살지 사는 게 사는 거 같겠나. 텔레비전 보면 맨 속상하기만 하다. (본문 270쪽)

이 글은 강원도에 사시는 아흔일곱의 이옥남 할매가 쓰신 일기라고 한다. 일곱 살 때부터 생산노동에 내몰려 살았던 이옥남 할매는 지금도 오일장에 나가 강낭콩, 쑥, 달래, 고들빼기, 고추 등을 팔아 용돈을 번다고 한다.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때 이옥남 할매는 양양군청에 가서 성금 10만 원을 냈다.

할매가 성금으로 보낸 10만 원은 바로 그 오일장 수입을 모은 돈이었다. 위의 일기는 성금을 낸 바로 그날의 일기다.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눈물이 난다. 할매의 지난한 삶이 생각나 가슴이 아리고, 할매의 그 따뜻한 마음이 또 짠하다. 저자는 이처럼 연세가 들어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다정히 할매라고 부른다.

저자는 할매의 책들은 단순히 '문맹의 할머니들이 80살 무렵에 한글을 깨쳤다'는 식의 뉴스 거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책들은 시대와 역사,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해서 근본적인 반성의 자료를 제공하며, 그 자료는 곧 할매들의 생애라는 것이다.

고난에 찬 한 시대를 살아낸 여성들의 생애와 아무도 편들어주지 않던 그들의 작은 몸, 할매들은 그 몸을 시대의 밑바닥에 갈면서 살아냈고 이념은 야만과 억압을 풍속으로 만들어서 개인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저자는 할매들은 몸으로 시를 쓴다고 표현한다.

삶의 양면적 진실에 대한 탐구, 긴장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매혹적인 글쓰기로 모국어가 도달할 수 있는 산문 미학의 한 진경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고 있는 김훈의 <연필로 쓰기>는 담백하면서도 날카로운 삶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아내고 있다.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연필을 깎아 종이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글을 쓰고 싶어졌다. 삶의 연장인 연필의 기운을 받아서.

덧붙이는 글 | <연필로 쓰기>, 김훈 지음, 문학동네 펴냄, 2019년 3월, 468쪽


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은이), 문학동네(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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