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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가적으로 선양 사업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4월 25일 국가보훈처로부터 충남 태안군 출신 애국지사인 이종헌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한 '사단법인 애국지사 이종헌 선생 선양회'가 허가를 득했다. 선생은 대한독립결사단 단장으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다가 체포되어 4년의 옥살이를 하는 등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종헌 선생 선양회는 14일 20여 명의 이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1차 정기총회를 개최해 충남도의회 의장을 지낸 박동윤 전의원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선양사업에 대한 논의를 가졌다. 이에 애국지사 이종헌 선생의 걸어온 삶을 정리해 보았다. - 기자 말

이종헌 선생은 1890년 4월 9일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91번지에서 이규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일찍이 유학에 입문하여 16세가 되던 해까지 한학 공부에 정진했다. 그러던 차 광무 10년(1906년) 11월 당시 대한제국의 승지로서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던 우국지사 김병년(炳秊)이 안면읍에 낙향하여 교육진흥과 애국사상 고취를 목적으로 사립 광영신숙(廣英新塾)을 설립하자 선생은 광영신숙 학원고등과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융희 3년(1909년)에 졸업했다.

그 후 선생은 28세가 되던 해에 안면초등학교 전신인 광영(光英)학교 교사로 취임했다가 광영학교 9대 교장으로 부임하기도 했다. 이 당시 광영신숙은 독립운동의 보루로써 은밀히 애국자를 양성하는 애국단체로 활동했다.
    
독립운동에 헌신
 
애국지사 이종헌 선생 영정
 애국지사 이종헌 선생 영정
ⓒ 신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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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명치 100년사 제6장 제2편 3.1운동과 제3장의 조선 국내에 있어서의 민족주의 운동 편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선생은 독립운동에 적극 활동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독립운동자금 모집자 검거에 관한 건에서 당시 충남지사가 일본국 총무대신, 각성대신, 경시총사령관, 양 사단장에 보고한 요지 가운데 선생이 대한독립결사단(大韓獨立決死團)에서 지단장으로 활동한 것과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서산지단장으로 활동하며 군내 청년을 대상으로 단원 모집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물론, 각지의 부호를 설득하여 군자금을 모집한 것이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법당국은 관계 범인의 검거작전에 돌입하였는데 이때 22명이 체포되었고, 수배 중인 7명은 체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체포된 자를 보면 광영학교장으로 있던 이종헌 선생을 비롯 이종성, 이기환, 가재창, 오몽근이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배중인 자로는 한태국, 서병철 선생 등으로 기록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선생은 부인할 수 없는 열렬한 독립지사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한편 대한독립결사단 지단은 후에 결성된 대한독립 서산지단의 모체가 되었고 지단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한독립단 서산지단의 결성 경위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 거주하던 이종성 선생은 대한독립단 수령이던 이종정 선생으로부터 지단 설치와 군자금을 모금할 것을 지시받고 황해도, 경기도, 충청남도 일원을 전전하며 활약하던 중 임시정부의 재무관 한태국 및 서병철과 상봉, 의논 끝에 서병청은 자기 고향인 서산에 내려가 대한독립 서산지단을 창설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할 것을 위촉받았다.

서병철은 안면면에 내려와 사립학교장으로 있던 이종헌 선생을 만나 의기투합하여 서로 광복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고 서산지단을 창설하기에 이르렀고 이종헌 선생을 지단장으로 추대하자 선생은 먼저 조직한 결사단과 혼연일체가 되어 교육 사업을 통한 애국사상 고취와 군자금 모금, 독립투사 양성을 위한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충남 태안군 고남면 누동리에 위치한 이종헌 선생 묘역
 충남 태안군 고남면 누동리에 위치한 이종헌 선생 묘역
ⓒ 신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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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가재창, 오몽근, 염성환, 김정진 등을 단원으로 포섭하여 태안, 부석, 남면 및 서산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는데 모금한 군자금은 선생 자신이나 단원인 이기환, 가재창 등이 상경하여 상해 임시정부 재무관인 서병철이나 한태국, 김상옥 등에게 전달하였다.

한편 군자금 제공자에게는 '명치(明治) 100년사' 라는 사료에 기재된 바와 같이 대한독립단 명의로 영수증을 발급하여 군자금임을 명백히 해 왔다.

그리고 선생은 위 사료에 나와 있듯 군자금을 위해서는 각지의 부호들이 심하게 반발하는데도 독립운동에 꼭 필요한 자금임을 끝까지 설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1919년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선생은 선선히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였다고 진술하였는데(명치 100년사에는 육헐포로 부호를 위협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다고 기록 되어있다) 안면면 범죄인명부에 따르면 당신 선생은 제령위반 및 공갈혐의로 재판을 받았음이 기록 되어 있다.

체포 직전 선생은 3.1운동에 만세를 주도한 바 있고 또 광영학교 교직원 및 학생들에게는 3.1운동의 정당성과 대한 독립이 동양평화에 기여함은 물론 민족의 영원한 행복과 영광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교육하면서 나라 읽은 참상과 비분을 수업 시간에 글로 지어 주었다.

이 글을 한 학생이 집에서 읽었는데 이것이 순사 김상희에게 포착되어 안타깝게도 결국 선생의 독립운동행위 전모가 밝혀지게 되고 체포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6개월의 형을 언도받고 항소했는데 항소심에서 선생은 "내가 내 나라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 마땅한 일이라 상을 주어야 할 일인데 무슨 형벌이냐"고 당당히 호통 치면서 손에 찬 쇠고랑으로 책상을 치며 대들었다. 이에 검사는 괘씸죄를 더하여 징역 9년을 구형하였고, 재판장도 이에 동조해 징역 4년형을 언도하여 선생은 독립운동가가 주로 수감되는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게 되었다.

선생은 출옥 후에도 초지일관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는데 우선 교육 사업을 통해 인재양성과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선생은 불령선인(不逞蘚人)으로 지목받아 항상 일제 고등계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았는데 특히 화수회, 시제 및 대동계를 이용하여 동지를 규합해 나가면서 독립사상을 선양하는데 주력하던 중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 후 선생은 초대 안면면장으로 추대되어 고향의 발전을 위해 애쓰시다가 1957년 6월16일 향년 67세로 파라만장한 생을 마감 하셨다.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정부에서는 1977년 12월 13일 대한독립 유공자로 포상을 하였다가 1990년 12월23일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하였다.
 
태안반도 안면청년회가 조성 관리 중인 이종헌 선생 애국공원
 태안반도 안면청년회가 조성 관리 중인 이종헌 선생 애국공원
ⓒ 신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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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7월에는 사단법인 태안반도 안면청년회에서 태안군 안면읍 장터로 42에 추모공원을 조성하고 선생에 대한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1984년 9월에는 대통령 특별지시로 정부에서 고남면 누동리 582-1 의 묘역을 단장하고 묘비를 건립하여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벌인바 있다.

애국지사 이종헌 선생 선양회 2018년 11월에 설립하고 2019년 4월 25일 국가보훈처에서 법인 설립 허가를 취득 2019년 5월 13일 애국지사 이종헌선생 선양회 법인등록을 하였다.

앞으로 이종헌 선양사업회는 선생의 묘역 정비와 자라나는 세대들의 교육을 위한 유품전시관 및 교육장 건립에 주력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바른지역언론연대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3,1운동 100주년, #이종헌 애국지사, #태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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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시대를 선도하는 태안신문 편집국장을 맡고 있으며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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