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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수업을 들을 일이 있어 선정릉 근처에 갔다가 놀라운 변화를 목격했다. 불과 7개월 전까지만 해도 한쪽에 인도와 공영주차장이 있는 도로였는데, 공영주차장이 없어지고 그 대신 보행로가 들어서 있었다. 어떻게 7개월 만에 가능했을까. 그 과정이 궁금했다. 강남구청 교통행정과에 전화를 걸어 내막을 물었다. 그 근처에 어린이집 세 곳이 있어 위험하다는 민원이 있었고, 동주민 자치위원회에서 의견을 내 공사를 할 수 있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사는 화곡본동의 도로는 대부분 폭이 6m 남짓 되는 좁은 골목길이다. 다세대 주택 밀집 지역으로 주차 공간이 부족해 골목길의 절반은 차량이 차지하고 있어, 안 그래도 좁은 골목길이 더 좁게 느껴진다. 차도 사람도 똑같이 좁은 길에 있으니 상대적으로 '강자'인 자동차가 우선이 되고, 보행자는 벽에 붙어 다녀야 하는 난감한 꼴이다. 

아이들이 많아 초등학교가 2곳, 어린이집이 31곳인 만큼 아이들의 크고 작은 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학교 교문에서 길 건넛집에 가려다 트럭에 치인 초등학생이 사망했고, 놀이터 앞 교차로에서 자동차를 보지 못하고 뛰어가던 아이가 사고를 당했다. 나보다 조금 앞서 뛰어가던 둘째 아이도 길을 건너다 자동차와 부딪쳐 응급실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 

이에 동네에서 아이와 편하게 걷고 싶은 일곱 명의 엄마들이 모여 2016년부터 '화곡본동 보행로 안전을 위한 주민 모임'을 꾸렸다. 꾸준한 요청으로 마을 곳곳에 교차로 알리미, 자동차 속도 표시판 같은 안전 시설물이 설치되었다. 지난해에는 '서울시 보행환경 개선지구'로 지정되어 눈에 잘 띄도록 디자인된 도로로 재포장하는 공사가 진행됐다. 주민들의 인식 개선을 위해 한국교통대학교 진장원 교수를 모시고 보행권에 대한 강연을 열고 '마을길 안전속도 30km 지키기' 캠페인을 추진했다. 4년 동안 조금씩 변했으나, 의도한 대로 결과가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보행환경을 개선하는 도로 공사를 했는데 자동차가 다니기 편한 길이 되어 버렸고, 담당 공무원들은 눈에 잘 띄는 시설물을 설치한 후 마을길이 안전해졌다며 공치사했다.

우리는 사람이 안전한 보행로를 원하는데 그들은 자동차의 원활한 흐름에만 관심이 있어 보였다. 인도를 설치할 수 없다면 보차도 분리 포장이라도 해 달라 요청하였으나, 거주자 우선 주차 구역이 있어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 도로 폭이 좁아 사람이 다니는 보행로를 만들지 못하는데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은 설치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화곡본동에서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우리 모임이 4년 동안 애써도 만들지 못한 보행로인데 선정릉 옆길에는 7개월 만에 생기다니, 도깨비가 방망이 뚝딱하고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강남구청 담당자에게 공영주차장을 없앤 과정을 물었더니 "주차장 폐쇄 열람공고하고 주민 의견을 받았다"고 답했다. '민원은 없었느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있었지만 그 길이 서울시 보행환경 축이라는 사업에 포함된 구간이라 2~3년 후면 없어질 주차장이니 미리 없애고 보행로를 확보하자는 식으로 주민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해 합의를 봤다"고 했다. 그가 말한 주민들은 어떤 주민들이었을까. 보행로를 찬성하는 주민들의 자체적인 모임은 없었고, '동주민 자치위원'들의 의견과 그 주변 어린이집의 민원을 반영하여 공무원이 추진했단다. 결과는 빠르고 확실했다. 

우리 모임은 2015년 화곡본동 주민 100인 토론회에서 마을 의제 1순위로 꼽힌 보행로 안전 문제를 우리 손으로 직접 바꾼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더디지만 조금씩 변하는 모습들이 재미있었다. 선정릉 옆길의 사례를 보면서 다시 의문이 들었다. 행정이 앞장서면 '쉽게' 처리 될 수 있는 일인데 주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직접 주도하도록 한다는 '주민자치'나 '협치'를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기운이 빠진 채 돌아와 구성원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떤 신속한 결과물을 원하는가, 아니면 '보행권'이라는 의제가 마을의 공동체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적 합의로 가는 모습을 꿈꾸는가.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아프리카 격언을 새기며 다시 숨 고르기를 했다. 

지난달에는 마을 주민들과 '마을길 함께 걷기'를 했다. 직접 걸으면서 우리 마을길이 얼마나 위험한지 체험했다. 보행로가 더 생기면 좋겠다,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이 없어지면 좋겠다, 인식개선이 필요하다 등의 의견을 냈다. 같이 걷는 행위를 통해 마을길이 안전해지는 방향으로 조금씩 주파수를 맞추는 중임을 확인했다. 도로 폭이 좁아 보행로를 만들 수 없다면, 차량이 마을길 속도 30Km를 지키도록 하는 캠페인에 집중해야 할까? 좀 더 안전한 마을길을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보행권'이 우리의 권리임을 알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올해 또 보행권 강연을 연다. 

50년 전 네덜란드 작은 마을에서 한 주민이 자기 집 앞에 화분을 내놓으며 차량이 서행하도록 한 본엘프 운동이 현재 보행자와 자동차 모두 안전한 도로를 만들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듯,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노력도 50년 동안 어떤 변화가 생기길 기대하면서.

덧붙이는 글 | 소셜워커 7월호에 기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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